"서한율. 오랜만이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강도진의 목소리는 뱀의 비늘처럼 미끈거렸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귓가를 찌르는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물속에 처박힌 듯 세상의 소음이 일시에 덥석 뭉개지며, 한율의 시야가 가볍게 흔들렸다. 눈앞에 선 루미너스 멤버들의 얼굴이 흐릿한 잔상으로 쪼개졌다.
- "네가 쓰레기통에서 뭘 주워서 꼼지락거리는지 다 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재미있는 놀이는 여기까지야. 루미너스의 남은 계약은 오늘부로 우리가 강제 종료한다. 물론, 그동안 걔들이 녹음했던 모든 음원과 지적 자산은 에이펙스의 이름으로 영구 동결될 거야."
비열한 조소가 고막을 긁었다. 심인성 난청의 어둠이 한율의 목을 조르는 순간, 그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윤서연에게 머물렀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서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아우라가 보였다. 가늘게 떨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완강한 빛. 그 빛이 한율의 눈을 타고 뇌리로 스며들자, 마비되려던 감각 회로가 삐걱거리며 다시 맞춰졌다. 먹먹하던 고막이 뚫리며 소리가 선명하게 돌아왔다.
한율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강제 종료?"
- "그래. 계약서상의 독소 조항은 네가 더 잘 알 텐데? 에이펙스의 자산을 네 멋대로 주무르려 한 대가다."
"착각이 심하군, 강도진."
한율이 전화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관자놀이의 핏대가 가늘게 솟아올랐다.
"표준계약서 제12조, 기획사의 의무 불이행 및 아티스트 지원 방치 시 계약은 자동 해지 사유가 된다. 지난 1년간 너희가 루미너스에게 배정한 예산은 제로. 활동 지원은커녕 연습실 대관조체 차단했지. 이 방치 기록과 정산서 미발행 내역서가 내 손에 있어. 법정에서 이 쓰레기 같은 계약서가 효력을 가질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
- "이 새끼가……."
"여론전이라도 해 볼까? 업계 1위 에이펙스가 무명 아이돌의 고혈을 짜내고 방치하다가, 다른 프로듀서가 손대려 하니 영구 동결로 발목을 잡는다. 대중이 참 좋아할 만한 헤드라인이네. 민설아가 공들여 쌓아 올린 에이펙스의 수학적 사운드 공식에도 먹칠이 좀 되겠지."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도진의 오만한 여유가 순식간에 깨져나가는 소리였다.
"재미있는 놀이는 내가 시작해. 넌 구경이나 해."
한율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폴더폰을 닫듯 가차 없는 동작이었다. 로비에 무겁게 내려앉았던 침묵을 깨고, 한율이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류 봉투를 꺼냈다. 루미너스의 새로운 전속 프로듀서 계약서였다.
"사인해."
한율이 펜을 내밀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에이펙스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이제 너희의 모든 음악적 권한은 나에게 귀속된다. 벼랑 끝에서 떨어지기 싫다면, 내 지옥 같은 디렉팅을 버텨내."
서연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펜을 쥐었다. 종이 위에 서연의 이름이 날카롭게 쓰였다. 뒤이어 백은우와 다른 멤버들도 떨리는 손으로 사인을 마쳤다.
은우가 붉어진 눈으로 한율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진짜 우리 노래 할 수 있는 겁니까?"
"입 열 시간에 목이나 풀어."
한율은 차갑게 돌아서며 손가락을 튕겼다.
"스튜디오로 이동한다. 컴백 타이틀곡 'Resonance' 작업 개시다."
***
지하의 허름한 개인 작업실.
에이펙스의 화려한 레코딩 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장비들만큼은 한율의 고집대로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모니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드럼 비트와 베이스 라인이 공간을 묵직하게 채웠다.
"백은우, 보컬 부스로."
한율의 지시에 은우가 침을 삼키며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헤드폰을 쓰는 그의 귀끝이 긴장으로 붉어져 있었다.
"아까 로비에서 한 말 기억해라. 3옥타브 도 음에서 호흡을 급하게 끊지 마. 흉식의 깊이를 반 뼘 더 내리고, 소리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얹어서 보낸다고 생각해."
"예, 알겠습니다."
반주가 흘러나왔다. 은우가 숨을 들이쉬고 고음 파트를 내질렀다.
"멈춰."
단 한 소절 만에 한율이 인터컴 버튼을 눌렀다. 그의 차가운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은우의 귀에 꽂혔다.
"소리가 뒤로 빠지잖아. 턱에 힘 빼. 목구멍으로 소리를 쥐어짜니까 음색이 텁텁하게 변하는 거다. 콧등 뒤쪽의 공간을 열고 소리를 던져."
"다시 가겠습니다!"
은우의 목소리에 오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이어진 시도 역시 한율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틀렸어. 호흡이 너무 가볍다. 릴리즈 타이밍이 반 박자 빨라."
"아오, 다시요!"
"안 돼. 그렇게 지르면 목만 상한다. 흉격의 위치를 고정하고 숨을 뱉어."
한율의 눈에는 은우의 목소리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고스란히 보였다. 처음에는 사방으로 거칠게 튀는 붉은색 파동이었다. 날카롭고 조율되지 않아 듣는 귀를 피로하게 만드는 소리.
한율의 정밀한 디렉팅이 더해질 때마다, 그 붉은 파동의 가장자리가 서서히 깎여나갔다.
"거기서 한 음 더 위로. 호흡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던져."
"아아아아-!"
순간, 부스 안에서 뻗어 나온 은우의 고음이 공기를 찢었다.
뭉툭하고 갈라지던 소리가 아니었다. 흉격 깊은 곳에서부터 단단하게 받쳐진 소리가 비강을 타고 맑게 울려 퍼졌다. 한율의 시야에 비친 은우의 아우라가 거친 붉은색에서 투명하고 단단한 실버 라인으로 탈바꿈했다.
조정실의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압도적인 성량에, 밖에서 대기하던 멤버들이 입을 떡 벌렸다.
"어……?"
은우 스스로도 놀란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 한 번도 내보지 못했던, 막힘없이 뻗어 나가는 고음이었다. 목에 가해지던 불쾌한 압박감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봤지."
한율이 무심한 목소리로 인터컴을 켰다.
"네가 가진 진짜 성대는 그 소리를 낼 수 있어. 그동안 쓰레기 같은 창법으로 네 목을 네가 조르고 있었던 것뿐이다."
"피디님……."
은우의 눈에 열망이 들끓었다. 자존심 강하던 서브 보컬의 눈빛이 완벽한 추종의 그것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에이펙스의 기계적인 분석 장비도 잡아내지 못한 성대의 비밀을, 한율은 오직 귀와 눈만으로 완벽하게 교정해 냈다.
"다음, 서브 보컬들 들어와. 화음 정렬한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어. 릴리즈 타이밍을 완벽하게 일치시켜라."
한율의 가차 없는 지휘 아래, 루미너스의 소리가 실시간으로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망돌의 목소리가, 천재 프로듀서의 손길을 거치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석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
시간은 어느덧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연습실 구석의 소파와 바닥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며칠 동안 이어진 강행군에 몸이 버텨내지 못한 탓이었다.
콘솔 앞에는 오직 한율과 서연만이 남아 있었다.
서연은 악보 위에 빼곡하게 적힌 디렉팅 노트를 보며 연신 졸음을 쫓으려 눈을 비벼댔다. 하지만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꺾였다.
꾸벅, 꾸벅.
동그란 이마가 콘솔 유리에 부딪히기 직전, 한율이 빠른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받아냈다.
"……."
서연은 잠결에 따뜻한 온기가 닿자, 한율의 손바닥에 뺨을 살포시 비비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가녀린 어깨가 피로로 인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율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놓여 있던 두꺼운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담요의 끝을 감싸 쥐며, 그의 손가락이 서연의 어깨에 가만히 머물렀다.
그 순간이었다.
윙-.
시야 전반이 황금빛 광채로 거칠게 물들었다.
귓가에 이정표처럼 떠오른 시스템의 파동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공명 계수: 40% → 60%] 수치가 수직으로 상승했다.
동시에 한율의 뇌리로 서연의 감각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스킨십이 짙어질수록, 동조율이 깊어질수록 가속화되는 감각 동조.
그녀의 어깨를 타고 느껴지는 극심한 피로감, 온몸의 근육이 젖산으로 가득 차 무겁게 가라앉는 감각이 한율의 신경망을 그대로 복제해 나갔다.
하지만 그 고통과 함께 찾아오는 소리의 세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청명했다.
먹먹하던 세상의 소음이 완전히 걷히고, 서연의 가슴팍에서 울리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부풀어 오르는 소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미세한 흐름까지 청각을 장악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가혹한 구원이라니.
한율은 신음을 삼키며 서연의 어깨에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잠결에 온기를 느낀 서연이 무의식중에 그의 소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피디님…… 조금만 더……."
가냘픈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영혼과 연결되는 감각은 마약과도 같아서, 한율은 차마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소리를 잃어버린 암흑 같은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유일한 빛의 주파수였기에.
***
"저, 이 부분 다시 해볼게요."
잠에서 깬 서연이 완강한 눈빛으로 부스 안을 가리켰다. 새벽 5시.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한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돼. 네 목 상태는 이미 한계다. 내일 해."
"아니요, 지금 감이 왔을 때 해야 해요. 'Resonance'의 브릿지 파트, 여기서 내가 확실하게 고음을 질러줘야 은우의 파트랑 연결이 매끄러워져요. 제발요."
서연의 눈에 서린 열망은 한율의 완벽주의만큼이나 단단했다. 그녀는 한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부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헤드폰을 쓴 서연이 마이크 앞에 섰다.
반주가 흘러나왔고, 서연이 가슴 가득 숨을 채웠다. 그리고 이어진 브릿지의 초고음 파트.
"아아아아-!"
그녀의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한율의 시야에 비친 서연의 황금빛 아우라가 붉은 균열을 일으키며 파르르 떨렸다. 무리하게 성대를 짜내어 고음을 지르는 순간, 그녀의 성대 세포가 미세하게 찢어지며 핏기가 도는 파동이 일었다.
"억……!"
그 순간, 조정실 콘솔 앞에 서 있던 한율이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커헉!"
목구멍 안쪽에서 들끓는 화염이 솟구쳤다.
누군가 뜨겁게 달군 인두로 목구멍을 사정없이 지지는 듯한 극통이었다. 성대가 찢어발겨지는 고통이 한율의 신경계를 타고 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동조율이 오를수록 상대가 느끼는 육체적 통증이 자신에게 '두 배의 강도'로 역류하는 저주.
"피디님?!"
부스 안에서 서연이 비명을 지르며 헤드폰을 벗어던졌다.
한율은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잡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틀어막았다.
"커흑, 쿨럭!"
격렬한 기침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손수건을 적셨다.
손수건을 떼어내자, 흰 천 위로 선명하고 붉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각혈이었다. 입안 가득 비릿하고 짠 피 맛이 고였다.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목구멍이 부어오르는 느낌과 함께,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이 다시금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이것이 동조의 대가다.
그녀를 빛나게 할수록, 자신의 몸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잔혹한 등가교환.
한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손수건을 다급하게 뭉쳐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일으켰다.
부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서연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 나왔다.
"피디님! 괜찮으세요? 방금 무슨 소리가……."
서연의 발걸음이 한율의 코앞에서 멈췄다.
그녀의 콧날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공기 중에 지독하게 감도는, 비릿하고 무거운 철분의 냄새.
서연의 시선이 한율의 창백하게 질린 입술과, 그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구겨져 들어간 손수건의 붉은 모서리에 머물렀다.
그녀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디님, 방금…… 그거 뭐예요?"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서연의 손끝이 한율의 주머니를 향해 뻗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