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피하지 마세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서연의 절박한 간청이 빗속으로 흩어지던 그 찰나였다.

그녀가 빗물에 젖은 손으로 한율의 손을 꽉 맞잡은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쾅! 하고 뇌리를 때리는 거대한 침묵 뒤로, 벼락 같은 청각의 해방이 몰려왔다.

두 사람의 손끝이 맞닿은 경계면에서부터 시작된 황금빛 파동이 한율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귓속 깊은 곳에서 지지직거리는 이명이 날카롭게 스러지더니, 이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하고 맑은 주파수가 머릿속으로 내리꽂혔다.

빗방울이 아스팔트에 부딪쳐 부서지는 미세한 마찰음, 멀리서 지나가는 차량의 타이어가 젖은 도로를 긁는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눈앞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서연의 호흡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입체적인 서라운드로 복구되어 한율의 고장 난 감각 신경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아……!"

한율의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 빗속에서 떨고 있는 서연의 전신을 감싸 안은 황금빛 아우라가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빛의 고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박동에 맞춰 일렁이고, 호흡의 깊이에 따라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살아있는 영혼의 파동이었다.

공감각 레조넌스.

한율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시각화된 소리의 지도. 그것은 오직 서연의 목소리와 존재를 통해서만 열리는 기적의 문이었다.

한율은 서연의 떨리는 입술 움직임과 손끝에서부터 전도되는 황금빛 파동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의 아우라는 찬란했지만, 동시에 깊은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목덜미 부근, 성대가 위치한 자리에 집중된 아우라는 기이하게 뒤틀린 채 날카로운 붉은색 실선들을 뿜어내고 있었다.

성대의 포지션이 비정상적이었다.

"윤서연 씨."

한율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나직하게 불렀다.

"지금까지 네 성대를 학대하고 있었군."

"……네?"

서연이 젖은 눈을 크게 뜨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의 눈에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에이펙스의 기계적인 트레이닝 시스템이 그녀에게 강요했던 창법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억지로 톤을 높여 얇고 청아한 고음만을 뽑아내기 위해, 그녀는 후두를 과도하게 끌어올리고 성대를 비정상적으로 쥐어짜고 있었다.

본래 그녀가 가진 진짜 아우라는 그보다 훨씬 깊고 묵직한 흉성의 아우라였다. 폭발적인 성량과 풍부한 배음을 품을 수 있는 거대한 그릇인데도, 억지로 좁은 병목 속에 목소리를 가두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턱을 내려."

한율이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확신이 담겨 있었다.

"후두를 억지로 띄우지 마. 가슴에 고인 공기를 그대로 밀어 올린다고 생각해. 네 진짜 소리는 거기가 아니야. 반 옥타브 아래, 더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기획사에서 원하는 예쁜 목소리가 안 나와요. 음정이 흔들린다고……."

"그딴 쓰레기 같은 기준은 집어치워."

한율이 서연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내가 보는 것을 믿어. 넌 지금까지 네 목소리의 반의반도 쓰지 못하고 있었어. 다시 해 봐. 아까 불렀던 그 소절, 내 지시대로 발성법을 바꿔서."

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율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기묘한 긴장감과, 그의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광기 어린 신뢰가 그녀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서연이 천천히 가슴을 열고 호흡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후두의 긴장을 풀고, 한율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온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의 밤은…… 여전히 어둡지만……."

그 순간, 골목길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서연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이전의 얇고 위태롭던 고음이 아니었다. 깊고 풍부한 울림이 빗소리를 뚫고 묵직하게 퍼져 나갔다. 그녀의 전신을 감싸던 황금빛 아우라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골목길 전체를 가득 채우는 듯한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냈다.

압도적인 성량. 숨겨져 있던 그녀의 진짜 성대 포지션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윽!"

그 찬란한 기적의 순간, 한율의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극통이 습격했다.

귓구멍 깊숙한 곳에서 비린 피 냄새와 함께, 고막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휘몰아쳤다. 서연이 올바른 발성을 찾아가며 일으키는 폭발적인 성대의 마찰과 에너지 소모가, 감각 동조의 대가가 되어 한율에게 '두 배의 신체적 통증'으로 리바운드된 것이다.

뇌가 흔들리고 시야가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 한율의 턱관절이 으스러질 듯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 극심한 통증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그녀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열쇠였기에.

한율은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서연이 노래를 마치자, 주변을 가득 채웠던 황금빛 오라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잔잔한 빛무리로 변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온전히 뱉어냈다는 경이로움과 해방감이 서려 있었다.

* * *

비가 잦아든 늦은 밤.

에이펙스 사옥 근처의 허름한 대피처이자 루미너스의 임시 연습실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비에 젖은 서연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율은 수건을 가져와 서연의 머리 위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뻗어, 비에 젖어 뺨에 엉망으로 달라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그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서연의 이마와 귓가를 스칠 때마다, 미약한 황금빛 파동이 잔잔한 물결처럼 피어올랐다. 거칠고 독설적이던 평소의 언행과는 대조적인, 기이할 정도로 섬세한 손길이었다.

"피디님……."

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한율은 손길을 멈추지 않고, 서연의 젖은 머리칼을 차분히 빗겨내린 뒤 그녀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차갑게 식어있던 서연의 손끝으로 한율의 체온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한율이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밤하늘처럼 깊고 어두운 그의 눈동자 속에 오직 서연 한 사람만이 담겨 있었다.

"이제 '너'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한율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울렸다.

"나의 보컬, 윤서연 씨."

서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의 보컬'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 선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의 목소리를 지켜내겠다는 완벽주의자 프로듀서의 맹세였다.

"당신은 지금까지 쓰레기 같은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었어. 하지만 오늘 확인했지. 당신의 진짜 가치는 그들이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한율이 서연의 손을 쥔 힘을 더 단단히 했다.

"앞으로 내가 지시하는 모든 트레이닝은 고통스러울 겁니다. 뼈를 깎는 과정이 될 거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가혹할 거야. 하지만 나를 믿고 따라온다면……."

한율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자신감과 집념으로 가득 찬, 천재 프로듀서의 오만한 미소였다.

"당신을 이 가요계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놓지. 에이펙스가 세운 그 알량한 빅데이터 공식 따위는 내 발밑에서 짓밟아 주겠어."

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한율의 손을 마주 꽉 쥐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게요, 피디님. 제 목소리가 찢어지고 부서진다고 해도…… 피디님이 가리키는 곳으로 갈게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절대 깨지지 않을 묵직한 동반자적 계약이 완성되었다.

* * *

다음 날 오후,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 본사 로비.

루미너스의 잔여 계약 서류 정리와 공식적인 복귀 절차를 밟기 위해 사옥을 방문한 한율과 서연의 앞을 거대한 인파가 가로막았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수십 명의 경호원이 길을 여는 가운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선 여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에이펙스의 간판 스타이자, 민설아였다.

수학적이고 정교한 탑백 히트곡들을 기계처럼 찍어내며 가요계의 정점에 선 그녀는, 차갑고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한율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설아가 걸음을 멈추고 한율을 흘겨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제되어 있었지만, 뼈가 가시처럼 돋아 있었다.

"지저분한 소문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서한율 씨 맞죠? 여긴 무슨 일로 기어 들어온 건가요?"

설아의 도발에 한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공감각 레조넌스]의 시야가 열렸다.

한율의 눈에 비친 민설아의 모습은 대중이 보는 화려한 여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고 있는 아우라는 화려한 청색 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 실상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빛의 표면 곳곳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고, 기계적인 보정(오토튠)의 인위적인 파동이 그 균열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성대 결절의 흔적. 그리고 본래 지닌 소리의 붕괴 기전이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포착되었다.

'기계적인 보정으로 억지로 때우고 있군. 성대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어.'

한율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에이펙스가 자랑하는 완벽한 음악적 공식의 실체가 고작 이런 왜곡과 땜질에 불과했다니.

설아는 한율 옆에 서 있는 서연을 힐끗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도 그 망해가는 루미너스인가 하는 애들을 붙잡고 계시네. 고물상에서 고철을 주워다가 금이라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현실을 좀 보시죠. 걔들은 태생부터가 아웃이에요."

"껍데기만 요란한 기계음은 조만간 밑천이 드러나지."

한율이 차가운 목소리로 설아의 말을 받아쳤다.

"네 진짜 목소리가 안쪽에서부터 얼마나 썩어 들어가고 있는지,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군. 억지로 주파수를 왜곡해서 만든 완벽함은 결국 무대 위에서 가장 처참하게 깨지기 마련이다, 민설아 씨."

"뭐, 뭐라고요?!"

설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자신의 성대 상태와 기계적 보정의 비밀을 단번에 꿰뚫어 본 듯한 한율의 날카로운 지적에, 그녀의 이성이 흔들리는 것이 눈빛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때, 로비 구석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대기하고 있던 루미너스의 메인 보컬 백은우와 멤버들이 다가왔다. 은우는 한율을 향해 여전히 반항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한율은 개의치 않고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율의 눈에 루미너스 멤버들의 아우라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아우라는 가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었지만, 에이펙스의 기계적인 인형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강력한 잠재력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한율이 은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백은우."

"……왜요."

은우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 하이텐션 파트에서 3옥타브 도 음이 플랫되는 거, 네 성대 한계 때문이 아니야."

"네? 그게 무슨……."

"네가 호흡을 급하게 끊어버리는 나쁜 습관 때문에 생기는 착시다."

한율의 목소리가 로비에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주변의 에이펙스 직원들과 연습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흉식의 깊이를 반 뼘만 더 아래로 내려서 호흡을 유지해 봐. 음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꽉 찬 소리로 뻗어 나갈 테니까. 그리고 서브 보컬들, 너희들의 화음이 엉키는 건 음색의 문제가 아니라 릴리즈 타이밍이 미세하게 어긋나서다. 서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한율의 거침없는 지적과 초월적인 통찰력에 은우를 비롯한 루미너스 멤버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기계적인 분석 장비로도 잡아내기 힘든 미세한 보컬의 결점들을, 오직 직관과 눈빛만으로 단번에 짚어낸 것이다.

로비에 있던 에이펙스의 트레이너들과 직원들 역시 충격에 휩싸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장 난 프로듀서라 불리던 서한율의 귀신같은 통찰력이 로비 전체를 압도했다.

통쾌한 침묵이 로비를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영광스러운 순간도 잠시.

징이이잉-.

한율의 코트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발작하듯 격렬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강도진'. 에이펙스의 대표이자, 과거 한율을 배신하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원흉이었다.

한율이 전화를 받아 귀에 가져다 대는 순간, 먹먹하게 왜곡된 청각 너머로 강도진의 뱀처럼 차갑고 오만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 "서한율. 오랜만이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는 잔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 "네가 쓰레기통에서 뭘 주워서 꼼지락거리는지 다 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재미있는 놀이는 여기까지야. 루미너스의 남은 계약은 오늘부로 우리가 강제 종료한다. 물론, 그동안 걔들이 녹음했던 모든 음원과 지적 자산은 에이펙스의 이름으로 영구 동결될 거야."

한율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 "한 걸음도 못 나간다는 소리지. 어때, 다시 귀가 먹먹해지는 기분이? 얌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어, 한율아."

전화가 뚝 끊겼다.

한율의 손아귀 속에서 스마트폰이 으스러질 듯 비명을 질렀다. 또다시 덮쳐온 절망적인 위기 앞에, 한율의 귓가에서 이명이 다시금 날카롭게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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