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턱끝에서 툭, 떨어졌다.
소리는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고요한 무음의 세계. 세상을 가득 채운 장대비는 거대한 침묵의 장막이 되어 서한율의 고막을 짓눌렀다. 아스팔트를 사정없이 때리는 빗방울의 궤적도, 우산을 부딪치며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바쁜 발걸음도, 모두 소리 없는 흑백 무성영화처럼 기괴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귀를 틀어막고 가슴을 짓누르는 이 먹먹함은 벌써 반년째 한율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심인성 난청.
의사는 신경학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뇌가 스스로 소리를 거부하고 있다는 진단서의 활자들은 한율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 가요계의 정점에서 천재 프로듀서라 불리던 사내의 귀가 먼 것이다.
원인은 단 하나였다.
-한율아, 대중은 예술을 원하는 게 아니야. 완벽하게 규격화된 상품을 원하지. 네 그 잘난 '영혼이 담긴 멜로디' 같은 건, 내 빅데이터 공식 앞에서는 한낱 쓰레기 조각에 불과해.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실. 가죽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와인잔을 흔들던 강도진의 비열한 미소가 눈앞에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10년을 동고동락하며 형제라 믿었던 동료. 그 자는 한율이 밤을 새워 가며 뼈를 깎아 만든 미발매 작곡 포트폴리오를 통째로 빼돌렸다.
그것도 모자라, 한율을 '상습 표절 작곡가'라는 더러운 프레임 속에 가두어 업계에서 영원히 매장해 버렸다.
신뢰는 산산조각 났고, 인간에 대한 극심한 불신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한율의 온몸을 찔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쁘게 뛰던 그날 밤, 한율의 세계에서 모든 소리가 일시에 소멸했다.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청각의 문을 닫아걸어 버린 것이었다.
"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한숨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율은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빗물이 눈으로 흘러들어 가 시야가 흐려졌지만, 닦아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저 멀리 거대한 전광판에 에이펙스 엔터테인먼트가 새로 론칭한 신인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화면 속 아이돌들은 자로 잰 듯한 군무를 추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민설아가 설계한 차갑고 수학적인 비트가 화면 너머로 흘러나오고 있을 터였다. 영혼이 거세된, 기계적인 탑백 히트곡의 복제품들.
속이 뒤틀렸다. 신물이 올라왔다.
자신의 실패한 음악을 증명하고 싶었다. 강도진의 그 오만한 빅데이터 공식을 보란 듯이 짓밟고, 소리를 잃어버린 이 저주받은 몸뚱이로 다시 세상에 온전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가둔 완벽주의의 감옥 속에서, 한율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이 회색빛 슬픔으로 가득 찬 강남대로를 향했다. 빗방울의 크기가 더욱 굵어졌다. 사람들은 우산 밑으로 머리를 처박은 채 한율을 비껴갔다. 소리 없는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이방인처럼 겉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혼잡한 인파 속에서, 유독 이질적인 움직임이 한율의 시야에 걸려들었다.
모두가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을 치는 도로 한복판. 홀로 우산도 없이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고 서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이미 물에 젖어 뺨에 찰딱 달라붙어 있었고, 얇은 셔츠는 살갗이 보일 정도로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빗물에 젖어 흐물거리는 종이 뭉치가 가득 들려 있었다.
여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매깃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저희 이번에 새로 나오는 앨범인데, 한 번만……!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행인들은 귀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거나, 벌레를 보듯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비껴갔다. 어떤 남자는 그녀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자마자 보란 듯이 구겨서 바닥에 던져 버렸다.
빗물에 젖어 아스팔트에 흘러내린 전단지.
그 위로 스쳐 지나가는 구두 굽들 사이로, '루미너스(Luminous)'라는 팀명과 함께 다섯 소녀의 조잡한 프로필 사진이 번져가고 있었다.
데뷔 3년 차 무명 아이돌. 기획사의 지원도 끊겨 해체 직전의 벼랑 끝에 몰린 망돌.
그 루미너스의 리더, 윤서연이었다.
서연은 바닥에 짓밟힌 전단지를 줍기 위해 차가운 빗물 고인 아스팔트 위로 무릎을 꿇었다. 젖은 손가락으로 찢어진 종이를 긁어모으는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붉게 충혈된 눈동자만큼은 빗속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맑게 빛났다.
한율은 멈춰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바보 같은 짓이다. 저런 간절함 하나로 버티기에는 이 바닥은 너무도 잔혹하고 차갑다. 자본과 기계적인 마케팅이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저런 날것의 열정은 그저 쉽게 소비되고 버려질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흙탕물 속에서 전단지를 품에 안고 다시 일어서는 그녀의 몸짓에는 꺾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서연이 젖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서연과 한율의 시선이 공중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서연의 눈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찰나, 한율의 망막을 강타하는 초현실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웅-, 하는 진동과 함께 서연의 전신을 감싸 안고 있던 회색빛 빗줄기들이 일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미세한 불꽃이 순식간에 번져나가더니, 이내 형언할 수 없이 눈부신 황금빛 아우라가 되어 서연의 온몸을 휘감았다.
[공감각 레조넌스(Synesthesia Resonance).]
닫혀 있던 한율의 감각 회로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파동이었다. 서연이 품고 있는 음악적 잠재력, 그녀의 목소리가 가진 독보적인 주파수가 찬란한 금빛 아우라가 되어 시각적인 파동으로 춤추고 있었다.
금빛 주파수는 거친 비바람을 뚫고 한율을 향해 뻗어 나왔다. 일정한 리듬을 타며 물결치는 황금빛 파동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한율의 가슴팍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쿵. 쿵. 쿵.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가슴을 때리는 비트가 시각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음역대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악보가 그려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장 아름답게 발성되는 주파수 대역, 대중의 심장을 단숨에 관통할 수 있는 감정의 깊이가 황금빛 파동의 굴곡을 통해 실시간으로 뇌리에 내리꽂혔다.
어마어마한 잠재력이었다. 에이펙스의 그 어떤 기계적인 가창 조율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날것의 기적.
한율의 오감 회로가 꿈틀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흐릿하던 시야가 극도로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 하나하나의 낙하 궤적이 느리게 보일 정도로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먹먹한 고요 속에서, 오직 서연의 황금빛 아우라만이 세상의 유일한 실체로 다가왔다. 시각적 자극이 뇌 손상으로 마비되었던 청각 신경을 강제로 두드리고 있었다.
서연이 비틀거리며 한율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절박함과 함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한율의 시선에 대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젖은 전단지 한 장을 한율에게 내밀었다.
"저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 모양과, 그녀를 둘러싼 황금빛 아우라가 순간 거세게 요동치며 사방으로 빛을 뿌렸다. 그 파동이 한율의 고막을 직격했다.
쩍-, 하고 귓속을 가로막고 있던 두꺼운 얼음벽에 마침내 거대한 균열이 갔다.
머릿속에서 쇠사슬이 끊어지는 듯한 강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눈앞이 번쩍이며 현기증이 일었다. 한율은 자신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움켜쥐며 신음을 삼켰다.
그 일그러진 표정을 오해한 것일까.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젖은 손을 뻗어, 한율의 차가운 손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따뜻했다.
얼음장 같은 빗속에서,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한율의 손목을 타고 심장으로 빠르게 흘러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제발…… 저희 노래 한 번만, 들어주세요……."
벼락이 내리꽂혔다.
먹먹하던 한율의 귓가로 세상의 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쏴아아아아아-!
아스팔트를 사정없이 두드리는 장대비의 거친 마찰음. 지나가는 차량의 날카로운 경적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그 모든 소음의 정점 위로, 세상에서 가장 투명하고 맑은 주파수를 가진 단 하나의 목소리가 한율의 영혼을 관통했다.
"우리가…… 진짜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서연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단순한 말의 전달이 아니었다. 한율의 심장에 다이렉트로 꽂히는 음악이었고, 완벽한 조율을 거친 악기의 울림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귓가를 괴롭히던 이명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율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소리가 들린다.
수많은 음향 장비로도 복구하지 못했던 닫힌 세계의 문이, 오직 이 여자의 목소리 하나로 인해 강제로 열려 버린 것이다.
한율은 멍하니 자신의 손목을 잡은 서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금빛 아우라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한율의 팔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이것이 공명(Resonance)이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서늘한 통증이 가늘게 피어올랐다. 감각이 연결된 대가로 치러야 할 잔혹한 등가교환의 전조였으나, 지금의 한율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소리를 되찾았다는 본능적인 희열이 뇌리를 지배할 뿐이었다.
서연은 젖은 눈으로 한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절당할 것을 예감한 듯 잔뜩 움츠러든 어깨, 하지만 결코 손을 놓지 않는 굳건한 아귀힘.
한율이 서서히 입술을 열었다. 소리를 잃어버렸던 천재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마침내 빗소리를 뚫고 차갑게 흘러나왔다.
"그 노래."
서연의 어깨가 움찔했다.
"내가 들어보지."
"그 노래."
서연의 어깨가 움찔했다.
"내가 들어보지."
서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사이로, 그녀의 길고 젖은 속눈썹이 잘게 파르르 떨렸다. 사기꾼을 보는 듯한 경계심, 그러나 그 뒤에 도사린 벼랑 끝의 간절함이 한율의 시선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그녀는 선뜻 손에 쥔 전단지를 내밀지 못했다. 이미 수십 번도 넘게 거절당하고 짓밟힌 탓에,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영혼이 닳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율은 대답 대신 서연의 손에 들린 전단지 뭉치로 시선을 던졌다.
빗물에 젖어 흐물거리는 종이 더미. 그 맨 위, 물에 번진 잉크 사이로 조잡하게 인쇄된 타이틀곡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Run Away]
구시대적인 댄스 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제목이었다. 에이펙스의 기계적인 공식에 밀려 시장 구석으로 처박힌 무명 기획사의 전형적인 실패작. 보지 않아도 어떤 비트와 멜로디일지 뻔히 그려졌다.
하지만 한율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제목이 아니었다.
서연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전단지 종이를 타고 번져가는 황금빛 미립자들. 그것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악보처럼, 종이 위의 가사 한 줄 한 줄을 타고 흐르며 미세한 진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진짜…… 들어주실 거예요?"
서연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열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대기를 타고 흐르는 순간, 한율의 고막을 짓누르던 수압 같은 이명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빗소리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었다. 솨아아, 하는 빗소리는 서연의 목소리를 받쳐주는 완벽한 배경 노이즈(White Noise)가 되어 깊은 입체감을 만들어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들린다. 진짜로 들린다.
"여기서 불러봐."
한율이 서연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낮게 읊조렸다.
"……예?"
"무대 위에서 스피커 찢어지게 울려 퍼지는 기계음 섞인 목소리 말고. 네 진짜 목소리."
한율의 차가운 눈빛이 서연의 젖은 얼굴을 꿰뚫었다.
"이 장대비 속에서 네 목소리가 내 귀에 닿는다면, 기꺼이 들어주지."
서연의 턱끝이 굳어졌다. 빗속에서 노래를 하라니.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발끝이 뒤로 반 보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서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황금빛 아우라가 순간적으로 붉은빛을 띠며 타올랐다. 그것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야생마 같은 투지였다.
서연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가슴을 부풀렸다.
그리고.
"……어두운 밤, 길을 잃은 별들 사이로."
반주도 없었다. 마이크도 없었다.
오직 쏟아지는 장대비와 회색빛 빌딩 숲만이 그녀의 무대였다. 하지만 서연의 목소리가 빗줄기를 가르고 터져 나오는 순간, 한율은 숨을 들이켰다.
청량했다.
그녀의 성대를 통과해 나온 소리는 차가운 비바람을 뚫고 1000Hz 대역의 완벽한 주파수를 그리며 한율의 고막을 직격했다. 음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호흡은 빗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율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서연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녀의 입술 끝에서 시작된 황금빛 파동이 음표 모양의 입자가 되어 허공으로 비산했다. 빗방울들이 그 황금빛 파동에 부딪쳐 마치 정교하게 컷팅된 다이아몬드처럼 사방으로 빛을 뿌리며 산란했다.
-쿵. 쿵. 쿵.
한율의 심장이 서연의 호흡 템포에 맞춰 뛰었다.
이것은 날것의 기적이다. 에이펙스의 슈퍼컴퓨터가 백만 번을 시뮬레이션해도 결코 연출해 낼 수 없는, 영혼의 떨림이 고스란히 담긴 천상의 발성.
"찾아 헤매던 너의 목소리…… 내게 닿을 때까지."
서연의 목소리가 고조되며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순간이었다. 황금빛 아우라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한율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완벽한 싱크. 영혼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환상적인 공명이었다.
하지만 그 극적인 희열과 동시에.
"……윽!"
한율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짓누르는 끔찍한 통증이 덮쳐왔다.
마치 뜨겁게 달군 쇠창살로 심장을 꿰뚫는 듯한 고통이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비린 피 냄새가 훅 끼쳤다. 서연이 추위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겪는 성대의 미세한 마찰과 폐부의 압박, 그리고 극도의 긴장감이 한율에게는 '두 배의 신체적 통증'이 되어 고스란히 리바운드된 것이다.
머릿속이 깨질 것처럼 아팠다. 한율의 무릎이 꺾이듯 주저앉으려 했다.
"어……?"
한율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본 서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노래를 멈췄다.
"저기, 괜찮으세요?! 얼굴색이……!"
서연이 한율을 부축하기 위해 뻗었던 손을 움츠리며, 한율의 손목을 쥐고 있던 힘을 풀었다. 신체적 접촉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찰나.
쏴아아아…… 솨……
밀물처럼 밀려들었던 세상의 소리가, 거짓말처럼 썰물이 되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아스팔트를 때리던 빗소리도, 서연의 다급한 외침도, 지나가는 차량의 소음도.
모든 것이 물속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듯 먹먹해지더니, 이내 완전한 무음(無音)의 감옥이 다시 한율을 가두어 버렸다.
소리가 사라졌다.
또다시 찾아온 지독한 고요. 한율의 눈동자가 공포로 거칠게 흔들렸다.
단 몇 초간 맛보았던 그 청명한 소리의 세계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눈앞의 서연은 입술을 달박이며 무언가 소리치고 있었지만, 한율의 귀에는 그 어떤 진동도 닿지 않았다.
다시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 절망감이 한율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살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하는 인간처럼, 한율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탁!
한율은 도망치듯 물러서려던 서연의 가냘픈 손목을 악착같이 낚아챘다.
빗물에 젖어 미끄러운 살결이었지만, 뼈마디가 하얗게 바래도록 세게 움켜쥐었다. 놓치면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힐 것만 같은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서연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목을 타고 다시금 미약한 황금빛 아우라가 전도되기 시작했다.
지지직, 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한율의 귓속에서 굳게 닫혀 있던 청각 신경이 다시 한번 억지로 비틀려 열렸다. 끄으으, 하는 신음이 한율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상관없었다. 들려야 했다. 이 목소리가 없으면 자신은 그저 살아있는 시체에 불과하니까.
한율은 젖은 머리칼 사이로 광기에 젖은 눈빛을 빛내며 서연을 응시했다.
그리고 빗소리를 뚫고, 집착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뱉어냈다.
"손목."
"……네?"
"내 허락 없이 그 손, 절대로 놓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