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까지 싹 다 감염됐습니다. 에이펙스 전용 오디오 엔진 망을 타고 들어온 특수 바이러스라, 우리 엔지니어들 힘으로는 해킹을 풀 수가 없어요. 이대로 가면…… 반주 없이 맨목소리로 무대에 올라가야 합니다!"
무대 감독의 절망적인 외침이 대기실의 무거운 공기를 찢고 발을 뻗었다.
백은우의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손가락 관절이 뚝뚝 소리를 내며 꺾였다. 그의 시선은 열린 문틈 너머, 복도 저편에서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사라지는 강도진의 보좌관에게 처박혀 있었다.
"그 개자식들이 결국……!"
은우의 목가슴에서 짐승 같은 그르렁거림이 터져 나왔. 당장이라도 복도로 튀어 나가 멱살을 잡아챌 듯한 기세였다. 다른 멤버들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컴백 파이널, 빌보드 점수 합산이 걸린 이 가장 거대한 무대에서 반주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가창력을 가졌을지라도, 오케스트라 배킹 트랙의 웅장함이 빠진 무대는 텅 빈 운동장처럼 초라해질 터였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기괴할 정도의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한율.
그는 귀를 감싼 붕대 위로 단단히 눌러쓴 비니 아래,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귀청을 찢는 비명도, 무대 감독의 다급한 설명도 그에게는 단 한 조각의 진동으로도 닿지 않았다. 완전한 무음(無音)의 세계. 물속에 처박힌 듯 먹먹하고 차가운 심연 속에서, 한율은 오직 사람들의 일그러진 얼굴 근육과 공중에 흩뿌려지는 아우라의 파동만으로 상황을 읽어 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모니터 화면 구석에서 미친 듯이 점멸하는 혈적색 경고등에 닿았다.
'결국 움직였군, 강도진.'
한율의 차가운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갔다. 인간의 선의 따위는 믿지 않는다. 에이펙스가 자신들의 치명적인 클리핑 버그를 덮기 위해 이런 극단적인 파괴 공작을 감행할 것 정도는 이미 그의 머릿속 시나리오에 들어 있었다.
스스로를 파괴해가며 터득한 독선적인 완벽주의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장 먼저 대비하도록 그를 채찍질해 왔다.
한율은 제 손으로 단단히 쥐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짚었다. 툭, 툭, 카펫 바닥을 누르는 가벼운 진동이 그의 발바닥을 타고 뇌로 전해졌다. 그는 한 걸음씩, 그러나 누구보다 무겁고 꼿꼿한 걸음걸이로 마스터 콘솔 앞에 다가섰다.
"피디님! 지금 귀 상태로 콘솔을 잡으시면 안 됩니다! 동조율이……!"
테크니션 팀장이 한율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지만, 한율은 단호하게 그 손을 쳐냈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운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한율은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것은 차갑고 고장 난 보청기 배터리였다. 언제나 스스로의 한계를 상기시키며 서랍 구석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실패와 낙인의 상징. 그는 그것을 꽉 쥐었다가 이내 놓아버렸다. 지금은 도망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콘솔 체어에 주저앉듯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키보드 위로 길고 곧은 손가락을 올렸다.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보였다.
한율의 안구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공감각 레조넌스]의 파동이 그의 뇌세포를 강제로 깨웠다. 감각 회로가 뒤틀리며, 모니터 너머로 흐르는 디지털 데이터의 흐름이 형형색색의 빛줄기로 치환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바이러스에 오염된 오케스트라 배킹 트랙은 시커멓게 타버린 잿빛 가시덩굴처럼 얽혀 있었다. 마스터 콘솔의 제어권은 완벽히 잠겨 있었다. 억지로 풀려고 했다간 시스템 자체가 과부하로 타버릴 터였다.
하지만 한율의 시선은 그 너머, 에이펙스가 자랑하는 오디오 엔진의 메인 주파수 대역으로 향했다.
'8.2kHz.'
과거 서머 페스티벌 합동 라이브에서 간파해 냈던, 에이펙스 오디오 엔진의 치명적인 설계적 결함. 특정 대역에서 디지털 클리핑(음 깨짐) 피드백이 발생하면 시스템 전체가 과부하로 무너지는 버그 데이터가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옆방에서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 에이펙스의 간판, 그리고 민설아.
한율의 눈에 무대 대기석에 앉아 있는 민설아의 아우라가 보였다.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음악의 파동이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균열된, 썩어가는 청색 빛의 고리. 그것은 기계적인 실시간 튠(Tune) 보정 없이는 일상적인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성대 결절의 시각화였다. 에이펙스의 완벽주의라는 가면 아래 숨겨진 추악한 모조품의 진실.
한율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탁, 탁, 타닥.
그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진동이 콘솔 데스크를 타고 멤버들에게 전달되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프로듀서가 보내는, 오직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혼의 수신호였다.
* * *
"다들 내 손가락을 봐."
한율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렸다. 스스로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평소보다 더 거칠고 건조한 음색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배력이 깃들어 있었다.
백은우가 멈칫하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가볍게 건반을 누르듯 손가락을 튕겼다. 규칙적인 템포. 80BPM.
그 움직임을 본 은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과거 은우가 한율의 미완성 어쿠스틱 오케스트레이션 악보 구석에 서투르게 그려 넣었던, 미비한 브릿지 파트의 낙서 번호였다. 한율이 쓰레기통에 처박았던 줄만 알았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치기 어린 멜로디의 박자.
'그걸…… 기억하고 계셨던 건가.'
은우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한율은 은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네가 만든 브릿지다. 반주는 필요 없다. 네가 직접 무대 위에서 세션의 뼈대를 잡아.]
말은 없었지만, 은우는 한율의 손가락 떨림 아우라와 눈빛을 통해 그 명령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진정한 동료이자 아티스트로 인정해 준 프로듀서의 무언의 신뢰. 은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일렉트릭 아쿠스틱 기타 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한율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윤서연에게 닿았다.
서연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에서 흘러내린 피가 붕대를 조금씩 적셔가는 조용한 파멸의 현장을,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두 눈에 담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한율이 자신들과의 동조율을 높일수록, 그의 청각은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한율은 자신들을 위해 영혼의 주파수를 강제로 개방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망가지게 두지 않아.'
서연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하게 타올랐다. 지켜지기만 하는 수혜자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자신이 그의 한계를 부수고, 그를 이 심연에서 끌어내려 구원할 차례였다.
서연이 한율에게 다가가 그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글씨를 새겼다.
[우리를 믿어.]
한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언제나 독선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던 그의 세계에, 서연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룰을 깨부수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는 순간, 대기실을 가득 채웠던 불안의 회색빛 아우라가 순식간에 걷히고, 서로를 단단하게 감싸 안는 황금빛과 은빛의 거대한 구체가 완성되었다.
완벽한 싱크. 동조율이 다시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루미너스 입장하겠습니다! 무대 대기해 주세요!"
스태프의 외침과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가득 메운 8만 관객의 함성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무대 뒤편, 에이펙스의 기술 제어실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강도진은 와인잔을 기울이며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주가 안 나오는 아이돌이라. 그것도 가요 시상식 라이브 무대에서. 아주 볼만하겠군, 서한율."
그의 옆에 선 민설아는 불안한 듯 자신의 목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기계적 보정 필터를 거치지 않으면 바람 빠지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 상태였다. 만에 하나 루미너스가 자신들의 오디오 시스템을 건드린다면, 그녀의 가짜 목소리 또한 천하에 드러날 터였다.
"대표님, 정말 괜찮을까요? 저들의 무대를 아예 취소시키는 편이……."
"걱정 마라, 민 실장. 우리 오디오 엔진은 완벽해. 저들이 반주 없이 입을 여는 순간, 대중은 그 초라함에 침을 뱉을 테니까."
강도진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를 바라본 바로 그 순간.
암전된 무대 위로 다섯 개의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관객석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보통 화려한 인트로나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먼저 공연장을 지배해야 하건만, 무대 위에는 오직 기괴할 정도의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어? 왜 음악이 안 나오지?" "방송 사고인가?" "에이펙스 소속 애들은 아까 빵빵하게 나오더만, 루미너스는 왜 이래?"
현장의 관객들뿐만 아니라, 실시간 라이브 스트리밍의 채팅창 역시 순식간에 폭발했다.
- 뭐야 ㅋㅋㅋ 무반주 댄스냐? - 헐 대박 방송사고 아님? 루미너스 어떡해 ㅠㅠ - 반주 안 나오는데 그냥 서 있음... 대박 대참사다 진짜.
그 수많은 혼란과 조소 속에서, 윤서연은 마이크 스탠드 앞에 우뚝 섰다.
그녀가 입은 순백의 드레스가 조명 아래에서 마치 전장의 여왕이 입은 갑옷처럼 빛났다. 그녀의 시선은 관객석이 아닌, 저 멀리 콘솔 박스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율의 실루엣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한율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비트. 비트가 느껴진다.
그것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뼈를 울리는 영혼의 메트로놈이었다.
서연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백은우가 들고 있던 어쿠스틱 기타의 단 한 줄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팅-.
그것은 단순한 음이 아니었다. 한율이 설계하고 은우가 완성한, 에이펙스의 8.2kHz 대역을 정밀하게 타격하기 위한 첫 번째 신호탄이었다.
동시에 서연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아아-."
반주가 없는 무대에, 오직 한 여자의 순수한 목소리가 침묵을 찢고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공연장에 설치된 모든 스피커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에이펙스의 오디오 엔진 제어실 모니터에 파란색 경고등이 들어왔다.
"어……? 이거 주파수가 왜 이래?" 테크니션이 당황하며 자판을 두드렸다.
서연의 목소리는 정확히 8.2kHz의 경계선을 드나들며, 에이펙스 오디오 엔진의 디지털 클리핑 버그를 실시간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반주를 없앰으로써, 오히려 서연의 목소리가 가진 순수한 주파수의 파괴력이 극대화된 것이다.
시상식장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관객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무대를 바라보았다. 반주가 없었기에, 오히려 그녀들의 목소리가 가진 영혼의 울림이 날것 그대로 관객들의 심장에 꽂혔다. 그것은 가창력을 넘어선, 생명력 그 자체의 포효였다.
- 미친... 소름 돋았어. - 반주 없는데 성량으로 경기장 다 채우는 거 실화냐? - 와, 백은우 기타 한 대랑 목소리만으로 이 정도라고?
채팅창의 여론이 순식간에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에이펙스의 제어실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대표님! 시스템이…… 시스템이 제어가 안 됩니다! 루미너스 보컬 주파수가 우리 필터링 시스템이랑 충돌하면서 역류하고 있어요!"
"뭐라고?! 막아! 당장 오디오 뮤트(Mute)시켜!"
강도진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서연의 고음이 가장 장엄한 솔로 서사의 도입부를 향해 치닫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파동이 되어 에이펙스의 메인 오디오 타워 시스템을 강타했다.
퍼엉! 퍼어엉!
무대 측면에 설치된 에이펙스의 실시간 보정 앰프 몇 군데에서 불꽃이 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과부하로 인한 시스템 완파였다.
그리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대기석에 있던 민설아의 마이크와 보정 필터로 이어졌다.
"아악!"
민설아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보정 필터가 깨진 그녀의 생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온 경기장과 생방송 송출 망으로 흘러나갔다.
"끄으윽…… 켁, 켁!"
쇳소리가 나다 못해 갈라져 찢어진, 괴물 같은 기괴한 소리. 그것은 기계적 왜곡 없이는 단 한 소절의 노래도 부를 수 없는 에이펙스 기술 완벽주의의 추악한 민낯이었다.
"저, 저게 민설아 목소리라고?" "대박…… 완전히 목 나갔잖아? 그동안 다 기계로 만진 거였어?"
관객석이 거대한 충격과 조소로 뒤덮였다. 강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들이 세운 철옹성 같은 빅데이터 독점 공식과 기계적 완벽주의가, 루미너스의 날것 그대로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의해 잔혹하게 부서져 내린 순간이었다.
무대 위에서, 서연은 그 붕괴의 현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이 무대의 가장 찬란한 절정을 완성하는 것.
그녀는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며, 한율이 있는 콘솔 박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 씨.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 목소리가 당신의 주파수가 될 테니까.'
그리고 저 멀리 콘솔 박스 안.
한율은 자신의 양쪽 귀에서 다시금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붉은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서 툭, 떨어졌다. 청각 마비와 함께 전신을 찢는 듯한 두 배의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따윈 없었다.
그의 시야 가득히, 서연과 루미너스 멤버들이 만들어내는 눈이 부실 정도의 찬란한 황금빛 아우라가 우주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의 영혼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소리가 사라진 세계에서,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유일한 구원의 빛으로 반짝였다.
한율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콘솔 데스크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붉은색 스위치 위로 손을 올렸다.
[공감각 레조넌스 - 초고농도 동조 체인 접속.]
자신의 모든 신체적 마비 장벽을 일순간에 깨부수고, 소리의 한계를 초월하여 그녀의 영혼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기 위한 파괴적인 접속. 이것이 끝나면 영원히 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잔혹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한율은 주저 없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스위치를 내리 눌렀다.
눈앞의 세상이 완전한 황금빛의 폭발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