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흐려진 시야 사이로 종이 조각들이 함박눈처럼 흩날렸다.
가장 비싼 이탈리아제 클래식 수트 위로, 그리고 잔뜩 일그러진 강도진의 이마와 뺨 위로, 갈가리 찢긴 계약서 파편들이 사정없이 내려앉았다. 종이 모서리에 긁힌 강도진의 뺨에 붉은 핏금이 가늘게 그어졌다.
"더러운 손 치워, 강도진."
윤서연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시릴 정도로 투명했다. 강도진의 허를 찌른 그녀의 눈동자는 깊고 고혹적인 황금빛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 미친년이……!"
강도진이 이성을 잃고 손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서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대 옆 벽면에 붙은 비상 호출 벨과 인터폰을 동시에 내리눌렀다.
"원장실 직통 경호팀이죠? 특실에 무단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장 끌어내세요."
"너 지금 뭐 하는 지거리야! 감히 누구더러 무단 침입이라는 거야!"
강도진이 고함을 지르며 서연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길이 서연의 옷깃에 닿기도 전에, 병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 수트 차림의 병원 전담 경호원 대여섯 명이 들이닥쳤다. 서연이 이 병원의 VIP 병동을 예약하며 미리 사설 경호 계약까지 마쳐둔 상태였다.
"이분들 내보내 주세요. 환자의 절대 안정을 방해하는 외부인들입니다."
서연의 단호한 지시에 경호원들이 강도진의 단단한 어깨와 팔을 가차 없이 꺾어 쥐었다. 에이펙스의 군주로 군림하며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 없는 강도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놔! 이거 안 놓아?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딴 짓을 해! 윤서연, 네가 정녕 미쳤구나! 서한율 저 새끼랑 같이 바닥에 처박혀 봐야 정신을 차리지!"
강도진이 바둥거리며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서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뒤에 유령처럼 서 있던 민설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민설아의 목덜미 부근에서 일렁이는 비정상적이고 균열된 청색 빛. 그것은 한율이 예전에 말해주었던 공감각의 형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기계적인 완벽함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성대 결절과 기계적 보정의 한계 파동.
"민설아 프로듀서님."
서연의 나직한 부름에 민설아의 어깨가 굳어졌다.
"당신의 그 완벽한 수학적 사운드, 그리고 기계 보정 없이는 일상 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목소리. 그 푸른 균열을 우리는 이미 보고 있어요."
민설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서연은 멈추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게다가 에이펙스가 자랑하는 핵심 오디오 엔진. 8.2kHz 대역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클리핑 버그 데이터도 이미 확보했어요. 야외 라이브에서 그 주파수를 건드리면 시스템 전체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지난 서머 페스티벌 때 똑똑히 보셨을 텐데요?"
"너, 너희가 그걸 어떻게……!"
민설아의 목소리가 쇳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에이펙스의 철옹성 같던 완벽주의가 실은 추악한 기계적 왜곡과 치명적인 결함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끌어내세요."
서연의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강도진과 민설아는 비참하게 병실 밖으로 축출당했다. 문이 쾅 닫히고 나서야 사방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대 위의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는 서연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아무런 소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양이 실청. 서연과의 동조율이 150%를 돌파하며 겪은 감각 동조의 피드백은 기어코 그의 귀를 완전히 멀게 만들었다.
물속 깊은 심해에 갇힌 것처럼 먹먹하고 고요한 세계. 한율의 시야에 비친 서연은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어떤 음성도 그의 고장 난 달팽이관을 자극하지 못했다.
서연은 한율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한율의 시선이 머무는 모니터 화면 구석에는 붉은색 경고등이 신경질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반쯤 열린 서랍 틈새로 보이는, 다 써버려 뒹굴고 있는 고장 난 보청기 배터리들. 그것들이 한율이 홀로 견뎌온 자학적인 투쟁의 흔적임을 서연은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혼자 아프게 두지 않아.'
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대신 그녀는 품에서 스마트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율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허공에 대고 큼직한 글씨를 써 내려갔다.
[ 파 이 널 무 대 파 트 전 격 개 편 안 ]
한율의 미간이 좁아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그의 천재적인 두뇌는 즉각 서연의 의도를 파악하려 움직였다. 서연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놀림으로 패드 화면을 넘기며 새로운 보컬 레이어링과 주파수 분배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율이 짜놓았던 완벽한 솔로 고음 위주의 구성을 완전히 뒤엎는 설계였다.
"……!"
한율이 제지하려 손을 뻗었으나, 서연은 그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저지했다. 그리고 패드 위에 다시 글을 적었다.
[피디님의 공감각 레조넌스는 우리의 영혼을 읽는 기적이에요. 하지만 그 대가가 피디님의 청력을 앗아가는 저주라면, 저는 그 기적을 거부하겠어요. 아니, 우리가 직접 안전한 주파수를 만들 거예요.]
서연은 한율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메인 고음역대를 독점하며 피디님의 신경을 자극하는 대신, 멤버들이 각자의 음역대에서 배음을 쌓아 8.2kHz의 타격을 분산시킬 거예요. 피디님이 리바운드를 겪지 않도록, 우리가 스스로 소리의 방어막을 칠게요.]
한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평생을 독선적인 완벽주의자로 살며 타인을 믿지 못했던 그였다. 음악은 오직 자신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정교한 기계여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소녀는 그의 통증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무대의 룰을 재설계하고 있었다.
서연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한율의 뺨에 닿았다. 서연은 한율의 수척해진 뺨 위에 부드럽고 뜨거운 입맞춤을 내렸다.
고장 난 한율의 신경망을 타고, 차가운 침묵을 깨부수는 영혼의 파동이 밀려들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눈앞의 서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아우라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고 따스하게 그의 온몸을 감쌌다.
"내가 당신의 귀가 될게요."
들리지 않는 고백이었지만, 한율은 그녀의 입모양과 영혼의 울림을 통해 그 진심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당신의 음악을 지킬 테니까, 제발 나를 믿어줘요."
서연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한율의 뺨을 적셨다. 한율은 거칠게 떨리는 손으로 서연의 젖은 뺨을 쓸어올렸다. 차갑게 닫혀 있던 그의 마음의 빗장이, 그녀의 주도적인 구원의 손길 앞에 마침내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 * *
"찬성입니다. 아니, 무조건 이렇게 해야 해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백은우가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악보 뭉치가 들려 있었다. 과거 한율이 미완성 상태로 버려두었던 어쿠스틱 오케스트레이션 메인 뼈대 악보였다. 그 구석에는 은우가 연습생 시절 서투르게 낙서해 놓았던 미비한 브릿지 파트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피디님 곡의 이 브릿지 파트, 제가 다시 다듬었어요. 서연 누나의 고음 부담을 줄이면서도 곡의 극적인 감동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합창 라인으로요."
은우의 뒤로 루미너스의 다른 멤버들도 차례로 들어섰다. 하은, 채희, 유주. 모두의 눈에는 눈물 대신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저희 망돌이었잖아요."
하은이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피디님 아니었으면 벌써 해체해서 각자 알바나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 피디님이 우리 때문에 귀가 안 들리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맞아요. 맨날 독설만 퍼붓는 까칠한 피디님이지만…… 그래도 우리 피디님이잖아요."
채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은우는 한율의 손을 꼭 잡았다.
"피디님은 그냥 무대 아래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세요. 이번엔 우리가 피디님을 증명할 차례입니다."
그날부터 루미너스의 지옥 같은 3일간의 연습이 시작되었다.
연습실의 거울은 하루 종일 멤버들의 뜨거운 입김으로 하얗게 흐려졌다. 서연의 주도하에 완성된 새로운 파트 구성은 극도로 까다로웠다. 기계적인 전조 구도에 의존하는 에이펙스의 방식과 달리, 오직 보컬들의 완벽한 호흡과 배음의 조화만으로 소리의 파동을 만들어내야 하는 자가 안전 영혼 믹싱법이었다.
"다시! 유주야, 3도 하모니 들어올 때 서연이 누나 음역대 밑으로 깔아줘야 해. 그래야 주파수가 부딪치지 않아."
은우가 디렉터 테이블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쳤다. 한율의 부재 속에서, 은우는 훌륭하게 임시 프로듀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서연 언니, 숨 쉴 때 가슴을 너무 닫지 마요. 공기를 더 밀어내야 소리가 둥글게 감싸져요."
서연은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단 한 번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노래를 부르는 매 순간, 자신의 주파수가 한율의 뇌에 가할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스로 발성 메커니즘을 정교하게 조율해 나갔다.
그것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적 같은 성장이었다.
단 3일.
대기업의 억대 장비와 수십 명의 엔지니어가 달라붙어 만드는 기계적 사운드를, 다섯 명의 소녀들은 오직 서로에 대한 신뢰와 간절함 하나로 뒤엎기 시작했다. 연습실 안에서 울려 퍼지는 루미너스의 하모니는 이제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영혼을 단단하게 엮어 만든,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소리의 성벽이었다.
마침내 약속된 컴백 파이널 무대이자, 빌보드 선정 점수 합산 가요 시상식 당일이 밝았다.
올림픽 체조경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기실 복도는 에이펙스 측 스태프들과 방송 관계자들로 분주했다.
서연은 무대 의상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대기실 한편에는 휠체어 대신 제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꼿꼿이 서 있는 한율이 있었다.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겠지만, 그의 눈은 루미너스 멤버 한 명 한 명을 깊은 신뢰가 담긴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시각화된 루미너스의 아우라는 더 이상 예전의 불안정한 붉은빛이 아니었다. 서로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과 은빛의 거대한 구체. 그것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영혼의 형태였다.
한율이 서연을 향해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였다.
'가라.'
소리 없는 격려에 서연이 활짝 웃음 지었다. 이제 무대 위로 올라가 세상에 그들의 완벽한 홀로서기를 증명할 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대 감독이 다급하게 대기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이닥쳤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윤서연 씨! 백은우 씨!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죠?"
서연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무선 오케스트라 배킹 트랙(MR) 시스템이……! 메인 콘솔 제어 프로그램에 원격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파일이 통째로 잠겨버렸습니다! 지금 복구도 안 되고, 재생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예요!"
대기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빙결되었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백업 서버는요?"
은우가 감독의 덜미를 잡을 듯이 다가섰다.
"백업까지 싹 다 감염됐습니다. 에이펙스 전용 오디오 엔진 망을 타고 들어온 특수 바이러스라, 우리 엔지니어들 힘으로는 해킹을 풀 수가 없어요. 이대로 가면…… 반주 없이 맨목소리로 무대에 올라가야 합니다!"
저 멀리 대기실 복도 끝에서, 강도진의 보좌관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는 모습이 은우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에이펙스의 최후의 비열한 공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클리핑 버그가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아예 루미너스의 무대 자체를 원천 봉쇄하려 든 것이다.
무대 진입까지 남은 시간은 단 3분.
반주가 잠겨버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서연의 시선이 한율과 마주쳤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율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