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단순한 고용 계약일 뿐인가?”
칼리스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좁은 마차 안을 무겁게 채웠다.
그의 은빛 눈동자에는 평소의 냉혹함 대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애달픔과 집착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레이나의 볼을 쓸어내리는 대공의 손가락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차갑고 단단한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역설적이게도 뜨거웠다. 방금 전 입술을 통해 나누었던 빙한 마력의 여운이 여전히 혀끝에 남아 달콤하고도 아릿한 감각을 자아냈다.
마차의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파스텔톤의 보랏빛 노을이 스며들어, 두 사람의 얽힌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대공의 은백색 머리카락이 노을빛을 받아 부드러운 살구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쿵쾅, 쿵쾅.
레이나는 제 가슴속에서 터질 듯이 울리는 고동 소리가 칼리스에게 들릴까 보아 조바심이 났다. 뺨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그의 품에 기대어 모든 경계심을 내려놓고 싶다는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 차려, 레이나 헤이즐. 길바닥에서 썩어 가던 시한부 고아였던 나를 구해준 건 사랑 따위가 아니야. 오직 내 쓸모와 계약뿐이었어.’
호의를 순수하게 믿는 순간 배신당한다. 완벽하게 안전하고 따뜻한 진짜 내 집을 갖기 전까지는, 그 어떤 달콤한 속삭임에도 닻을 내려서는 안 되었다. 칼리스의 고백은 너무나 매혹적이었기에, 오히려 그녀의 방어 기제를 더 단단하게 자극했다.
레이나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붉어진 얼굴을 애써 굳혔다. 그리고 칼리스의 손을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밀어냈다.
사락, 비단 자락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 미세한 거리감이 생겼다.
“대공 전하.”
레이나는 품에서 언제나 들고 다니는 양가죽 가죽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 입맞춤을 나눈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사무적이었다.
“비즈니스에선 감정 과잉은 파산의 지름길입니다. 전하께서 방금 베푸신 마력 정화는 계약서 제4조 2항, ‘유모의 마력 역류 발생 시 대공은 즉각적인 신체 접촉을 통해 이를 냉각한다’는 조항에 의거한 정당한 업무 집행이었습니다.”
“레이나.”
칼리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상실감이 마차 안의 공기를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그것이 정말로 업무에 불과하단 말인가? 방금 네 입술이 내게 닿았을 때, 네 영혼이 내 마력을 갈구하며 떨리던 것도 고작 계약서 한 장 때문이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레이나는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모른 척하며 생긋 웃어 보였다. 파스텔 핑크빛 입술이 호선을 그렸지만, 눈동자만큼은 철저한 계약직 유모의 그것이었다.
“감정은 변하지만, 계약서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전 전하의 감정보다 전하의 얼음 마력이 주는 안전성을 더 신뢰합니다. 그러니 다음 정화 일정 전까지는 사적인 감정 소모를 지양해 주셨으면 합니다.”
칼리스는 허탈한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먹이 단단하게 쥐어졌다. 저 철벽 같은 여인의 마음을 열기 위해선 대체 얼마나 더 자신을 내던져야 하는 걸까. 안달이 나다 못해 가슴속이 시커넓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레이나가 그어 둔 선을 강제로 넘어설 수도 없었다. 그녀는 대공인 자신을 상대로 완벽하게 ‘갑’의 위치에 서서 건강과 마력을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타이밍 좋게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추어 섰다. 영지 거점 요새에 도착한 것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차가운 북부의 바람과 함께 대공가의 수석 행정관 줄리어스가 창백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레이나 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줄리어스는 마차 안의 기묘하게 가라앉은 붉은 기류를 눈치챘는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서류철을 고쳐 잡았다. 레이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차에서 가볍게 내려섰다.
“줄리어스 경.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요청했던 장부 조사를 끝냈거든요.”
레이나가 소매 안에서 꼬깃꼬깃한 영수증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줄리어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지난 4화에서 레이나가 대공가의 장부를 샅샅이 뒤지다 발견했던, 북부 봉인 영지의 기형적인 석탄 수입 과다 영수증이었다. 줄리어스가 어떻게든 숨기려 했던 대공가의 가장 뼈아픈 재무적 약점이기도 했다.
요새 내부의 간이 집무실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레이나는 탁자 위에 영수증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설명해 주시겠어요, 줄리어스 경? 일 년 내내 얼음 마정석으로 단단히 얼어붙어 있는 이 봉인 영지에서, 왜 황실 표준 소비량의 다섯 배에 달하는 석탄 수입 영수증이 매달 발행되고 있는 거죠? 심지어 석탄의 단가도 일반 시장 가격보다 30%나 더 비싸게 책정되어 있더군요.”
줄리어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힐끗 칼리스의 눈치를 살폈으나, 칼리스는 그저 턱을 괸 채 레이나의 날카로운 지적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칼리스의 시선은 여전히 레이나의 붉은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그것은…….”
줄리어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봉인 유적의 마력 열기관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소모였습니다. 고대 결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열원을 확보하려면 대량의 석탄이 필요하고, 북부의 험난한 지형 때문에 운송비가 추가되어 단가가 높아진 것입니다.”
“거짓말.”
레이나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가죽 수첩을 촤르륵 넘기며, 시스템이 계산해 낸 완벽한 통계 수치를 소리 내어 읽었다.
“수첩의 정밀 분석에 따르면, 현재 유적 터널의 방어벽 구조망은 연비 효율이 최악인 구형 열기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석탄을 납품하는 상단은 파면당한 엘가 남작부인의 친인척이 운영하는 유령 상단이더군요. 즉, 줄리어스 경이 숨기려 했던 이 기형적인 영수증은 엘가 일당이 유적 관리 비용을 핑계로 영지의 재정을 합법적으로 횡령하고 있었던 증거입니다.”
“……!”
줄리어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레이나의 손가락이 영수증 위의 붉은 인장을 콕 짚었다.
“줄리어스 경은 효율성을 목숨처럼 아끼시는 분이면서, 왜 이런 명백한 횡령을 묵인하셨죠? 대공가의 가신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그, 그것이 아니라…… 엘가 남작부인이 유적의 제어권을 쥐고 위협하는 바람에, 영지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묵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레이나 님.”
줄리어스가 결국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대공가의 수석 행정관이 일개 유모 앞에서 완전히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다.
레이나는 차갑게 가라앉았던 눈빛을 거두고, 특유의 사랑스럽고 경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요. 사정을 알았으니 해결책을 드려야죠. 이 기형적인 석탄 수입 계약은 오늘부로 전면 해지합니다. 대신 대공저의 얼음 마정석에서 방출되는 잉여 냉기를 정령 마력으로 치환해 열기관을 가동하는 ‘마력 순환식 하이브리드 제어법’을 도입할 거예요. 그렇게 하면 석탄 수입 비용은 제로(0)가 되고, 영지 예산의 40%를 절감할 수 있죠.”
줄리어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석탄 없이 유적 결계를 유지한다고요? 그게 정말 가능합니까?”
“제 수첩의 설계도를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레이나가 수첩을 펼쳐 보이자, 은은한 민트색 마력 홀로그램이 허공에 떠오르며 완벽한 정산 및 설계 도면을 그려냈다. 줄리어스는 침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그 도면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 레이나는 더 이상 단순한 유모가 아니었다. 인생 최고의 비즈니스 롤모델이자, 대공가를 구원할 초특급 행정의 신이었다.
“레이나 님……! 진정 천재이십니다! 이 줄리어스, 레이나 님의 혜안에 평생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줄리어스가 감격에 겨워 외쳤다. 칼리스 역시 그녀의 당당하고 야무진 모습에 다시 한번 깊게 매료된 듯, 입가에 옅은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우르릉!
갑자기 요새 전체가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대지를 타고 흐르는 마력이 기형적으로 뒤틀리며 사방의 얼음 마정석들이 비명을 지르듯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칼리스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며 레이나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전신에서 시릴 듯한 빙한의 마력이 뿜어져 나와 사방의 진동을 억눌렀다.
그때, 간이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전령 기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들이닥쳤다.
“전하! 비보입니다! 지하 유적 터널의 방어 결계가 완전히 정지되었습니다!”
“뭐라구? 석탄 열기관을 정지하지도 않았는데 결계가 정지되다니, 그럴 리가 없다!”
줄리어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전령 기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엘가 남작부인의 잔당들입니다! 유폐되어 있던 남작부인의 부하 사제들이 탈옥하여 지하 유적에 난입했습니다! 그들이…… 보물창고에서 밀수해 갔던 고대 아티팩트 ‘겨울의 숨결’을 기폭제로 사용했습니다!”
레이나의 머릿속에 번개가 친 듯 경고등이 켜졌다.
‘겨울의 숨결!’
과거 남작부인이 보물창고에서 불법 탈취하려다 레이나의 수첩 이상 탐지에 걸려 밀수 정황이 확보되었던 바로 그 아티팩트였다. 남작부인이 체포될 때 미처 회수하지 못했던 잔당들이, 그 강력한 결계 작동기를 들고 최후의 발악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이 ‘겨울의 숨결’의 빙한 마력을 역방향으로 폭주시켰습니다! 터널 구조망이 전격 정지되었고, 유적 전체에 외부와의 소통을 완전히 차단하는 강력한 ‘빙결 차단 결계’가 전개되었습니다! 저희 기사단도 격리되어 진입할 수 없습니다!”
“치밀한 놈들……!”
칼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명백했다. 결계를 차단해 대공과 유모 레이나를 이곳 거점에 묶어두고, 대공저에 홀로 남겨진 아기 용 리온을 납치하려는 음모였다.
그 순간, 레이나의 손에 들려 있던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경고! 경고! 시스템 비상사태 발생!] [대상: 아기 용 ‘리온’] [영지 마력 충격도: 98% -> 100% 임박!] [대상 상태: 극도의 정서 불안정, 외부 마력 자극으로 인한 공포 상태.] [위험 요인: 유적 결계 붕괴로 인한 고대 흑룡의 마력 공명. 대상의 이마에 돋아난 ‘검은 뿔’의 가려움증 및 통증 급증!] [예측: 3분 이내에 대규모 납치 및 유괴 발생 우려!]
붉은색 경고 창이 레이나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깜빡였다. 화면 속 리온의 조그만 아바타가 덜덜 떨며 울고 있었다. 리온의 이마에 돋아나기 시작했던 그 미세하고 가려운 검은색 뿔이, 고대 마력의 공명으로 인해 급격히 자극받아 리온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리온……!”
레이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평소의 비즈니스적인 침착함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계약 관계라고 스스로를 세뇌해도, 날 보며 꺄르르 웃던 그 뽀짝한 아기 용은 이미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요새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사들은 우왕좌왕했고, 줄리어스는 장부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칼리스마저 차단 결계를 깨부수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으나, ‘겨울의 숨결’이 만들어 낸 결계는 고대의 힘이 깃들어 있어 무력으로 돌파하려면 최소 수십 분의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때는 이미 리온이 납치당한 뒤다. 3분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레이나의 맑고 쨍한 목소리가 시끄러운 집무실 안을 관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사랑스러움 대신, 범접할 수 없는 서슬 퍼런 위엄과 카리스마가 서려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레이나에게로 쏠렸다.
레이나는 수첩을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수첩이 공중에서 회전하며 거대한 민트색 홀로그램 지도를 요새 홀 전체에 투사했다. 그것은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다. 유적의 마력 흐름과 차단 결계의 미세한 균열, 그리고 최단 구출 동선이 실시간으로 계산되어 표시되는 ‘경고 루트 지도’였다.
“줄리어스 경! 지금 즉시 동쪽 제3 마력 파이프라인의 밸브를 차단하세요! 그곳의 흐름을 막으면 차단 결계의 동부 모서리가 일시적으로 약화됩니다!”
“아, 예, 예! 즉시 실행하겠습니다!”
줄리어스는 귀신에 홀린 듯 레이나의 지시에 따라 통신 마도구를 쥐고 소리쳤다.
“기사단 1조는 서쪽 터널의 우회로를 통해 진입하세요! 그곳은 결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사각지대입니다. 2조는 대공저의 중앙 연병장으로 통하는 포털을 강제 개방할 준비를 하세요. 제가 결계의 마력 파동을 역이용해 포털을 30초간 열어드리겠습니다!”
레이나의 손가락이 허공의 스크린을 정밀하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지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했고, 전술은 일사불란했다. 두려움에 떨던 기사들의 눈빛이 유모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군인으로서의 생기를 되찾았다.
“움직이세요! 리온 도련님의 목숨이 여러분의 손끝에 달려 있습니다!”
“와아아아!”
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섰다. 칼리스는 멍하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위기의 순간, 자신보다 더 대공가의 지휘관처럼 빛나는 이 여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레이나, 너는 대체…….”
“전하, 감탄할 시간 없습니다. 제 검이 되어 결계의 핵을 베어 주셔야겠습니다.”
레이나가 칼리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단호한 의지에, 칼리스는 가슴이 터질 듯한 고양감을 느끼며 검을 굳게 쥐었다.
“기꺼이 네 검이 되지.”
레이나의 지휘 아래, 대공가의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차단 결계의 약점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수첩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마력의 흐름이 뒤틀리며, 마침내 결계의 중앙부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얼음 장벽이 깨어지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차단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요새의 통신 마도구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공저에 잔류해 있던 수하 기사의 목소리였다.
- 전하! 레이나 님! 큰일났습니다! 리온 도련님의 자취방 격실이…… 검은색 화염으로 완전히 휩싸였습니다! 도련님의 마력이 폭주하며 침입자들과 함께…… 끄아악!
쿠구구구둥!
통신이 끊김과 동시에, 대공저가 있는 북쪽 하늘에서 거대한 검은 불꽃둥둥이가 솟구쳐 오르는 것이 요새의 창문을 통해 보였다. 굉음이 요새 전체를 강타하며 사방의 유리가 산산조각 나 파스텔톤의 서리 파편으로 휘날렸다.
레이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