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크아아아악-!”

지하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쪽빛 빙하가 갈라지듯 날카롭고, 동시에 벼락이 치듯 고막을 찢어발기는 괴음. 무너진 고대 유적 터널의 틈새로 뿜어져 나온 검은 안개는 연한 살구색과 라벤더 빛깔이 뒤섞여 있던 헤일로 영지의 하늘을 단숨에 먹칠하듯 삼켰다. 불길한 보랏빛 서리가 대지를 따라 빠르게 기어왔다.

“전원, 방어 장벽을 전개해라!”

기사단장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냉기 마법이 서린 장벽이 허공에 솟구쳤다.

그러나 검은 안개가 장벽에 닿는 순간,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바스스스슥!

“윽! 손이…… 손이 얼어붙는다!”

“마력이 역류하고 있습니다! 장벽이 버티질 못합니다!”

철통같던 대공가의 마법 방어막이 한순간에 유리 파편처럼 박살 났다. 차가운 안개에 스친 기사들의 손끝이 순식간에 시퍼런 얼음으로 뒤덮였다. 살을 에는 듯한 고통에 기사들이 무기를 떨어뜨리며 비틀거렸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생명력을 통째로 빨아들이며 영혼까지 얼려 버리는 고대의 저주받은 마력이었다.

검은 안개는 굶주린 맹수처럼 아수라장이 된 전열을 뚫고, 레이나와 칼리스가 서 있는 마차 코앞까지 밀려들었다.

기사들이 무참히 결빙되며 비명을 지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칼리스가 검자루를 꽉 쥐며 레이나의 앞을 가로막아 서려 했다. 그의 등 뒤에서 차가운 빙한 마력이 폭풍처럼 웅성거렸다.

하지만 레이나는 그보다 한 발짝 더 빨랐다.

‘여기서 기사단이 전멸하면 내 편안하고 안전한 유모 생활도 끝장이야!’

평생을 길바닥에서 뒹굴며 살아남은 생계형 힐러의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어렵게 따낸 대공가의 정식 유모 자리였다. 따뜻한 벽난로와 푹신한 침대, 그리고 귀여운 아기 용 리온이가 기다리는 나만의 스위트홈을 이깟 검은 안개 따위에 빼앗길 수는 없었다.

레이나는 품 안에서 가죽 표지의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을 홱 꺼내 들었다.

뾰로롱-!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수첩은 눈치 없이 발랄하고 경쾌한 효과음을 내며 허공에 반짝이는 홀로그램 화면을 띄웠다.

[위험! 고대 역류 마력 및 생명력 흡수 저주 감지!] [추천 대처법: ‘장내 마력 전자기 분산막’ 가동] [※주의: 가동 시 사용자의 잔여 수명이 30일 차감됩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화면에 뜬 시뻘건 경고 문구와 수명 차감 경고에 레이나의 미간이 완전히 찌푸러졌다. 간신히 늘려 놓은 수명인데, 한 번에 한 달 치나 깎아 먹다니 속이 쓰리다 못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나의 계산기는 그 짧은 찰나에도 바쁘게 두드려졌다.

‘여기서 기사들 수십 명이 얼어 죽으면 영지 방어선이 무너져. 리온이의 안전도 보장 못 해. 무엇보다…… 대공가의 정예 기사 수십 명의 목숨을 구하는 대가라면, 나중에 청구할 비즈니스 보상금은 수명 30일 그 이상이야!’

이것은 뼈를 깎는 희생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미래를 위한 초특급 투자였다.

“진행해!”

레이나가 망설임 없이 화면의 수락 버튼을 꾹 눌렀다.

그 순간, 레이나의 가슴팍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화사한 봄날의 벚꽃 핑크빛 정령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아악!

연분홍빛 빛의 입자들이 소용돌이치며 마차 주변을 감쌌다. 솜사탕처럼 몽글몽글하고 따스한 온기를 품은 정령의 결계가 거대한 돔 형태로 펼쳐졌다. 사납게 밀려들던 칠흑 같은 검은 안개가 연분홍빛 결계 벽에 부딪히는 순간-

치이이이익!

마치 뜨거운 달궈진 철판에 얼음이 닿은 것처럼, 검은 안개가 하얀 김을 내뿜으며 힘없이 스러졌다.

“어…… 어라?”

검푸른 얼음이 손목까지 차올라 절망하던 기사단장이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피부 안쪽을 파고들던 끔찍한 냉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온몸을 얼려 붙이던 저주받은 서리가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리며, 뺨을 스치는 정령의 온기가 잃어버린 생명력을 빠르게 채워 주었다.

“서리가…… 녹고 있어!”

“살았다! 우리가 살았어!”

여기저기서 감격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마차 앞에 당당하게 서서 수첩을 쥔 채 정령 마력을 통제하고 있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칼리스 역시 검을 쥔 손을 멈춘 채, 붉게 상기된 얼굴로 결계를 유지하는 레이나의 옆모습을 넋을 잃고 응시했다. 그의 얼어붙은 심장이 정령의 따스한 분홍빛 온기에 닿아 쿵쾅쿵쾅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기사단 전체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린 것은 대공가의 강력한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이 길바닥 출신이라며 은근히 무시했던, 아기 용의 뽀짝한 전담 유모 레이나였다.

“전원 정신 차리세요!”

레이나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안개는 일시적으로 억눌렀을 뿐이에요. 근원지를 찾아 해결하지 않으면 결계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유, 유모 님의 말씀이 맞다! 전원 무기를 정돈하고 대형을 유지해라!”

기사단장이 허겁지겁 지휘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제 레이나를 향한 무한한 경외심과 절대적인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레이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일단 평판 점수는 최고 수준으로 적립해 놨고.’

수명 30일의 지출이 아깝지 않을 만큼 확실한 사이다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이 끔찍한 마력 역류와 붕괴가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밝혀내야 했다.

레이나는 손에 쥔 수첩의 화면을 빠르게 탭하며 ‘유적 마력 레이더 스캔’ 기능을 활성화했다.

띠링! 띠링!

수첩의 투명한 액정 화면 위로 복잡한 마력의 흐름도가 홀로그램 지도로 3차원 입체화되어 떠올랐다. 기하학적인 선들이 얽히고설키며 붕괴한 봉인석 주변을 붉은색으로 깜빡이며 가리켰다.

[분석 완료: 고대 봉인석의 인위적 오염 및 마력 강제 과부하.] [감지된 외부 오염 물질: 고농축 정제 마력탄 재 및 성당 특제 봉인 훼손용 성수] [연관 배후 데이터 매칭 중…… 매칭 완료: 엘가 남작부인이 매수한 성당 사제단의 마력 파장과 99% 일치.]

화면 가득 떠오른 상세한 도표와 인명 리스트를 보는 순간, 레이나의 눈매가 정교하게 다듬어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워졌다.

“역시 쥐새끼들이 꼬여 있었군요.”

레이나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마차 옆에서 경계를 서던 수석 행정관 줄리어스가 귀를 쫑긋 세우며 다가왔다.

“레이나 님, 무언가 알아내신 겁니까?”

“줄리어스 씨.”

레이나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수첩 화면의 일부를 띄워 그에게 보여 주었다.

“전에 제가 대공가의 겨울철 재정 장부를 정리하면서, 북부 봉인 영지의 석탄 수입 영수증이 기형적으로 과다 청구되었다고 지적했던 것 기억하시나요?”

줄리어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유난히 추운 겨울이라 난방용 자재가 많이 소모된 줄로만 알고 결재를…….”

“그 석탄들, 난방용이 아니었습니다.”

레이나가 수첩의 도표를 톡톡 두드렸다.

“엘가 남작부인의 사주를 받은 성당 사제들이 고대 봉인석을 은밀히 오염시키기 위해, 마력 정제탄을 태우는 연막용으로 그 엄청난 양의 석탄을 소모한 거예요. 석탄 타는 연기와 냄새로 마력 오염의 불길한 징조를 가려 왔던 거죠. 장부상의 수치가 기형적으로 튄 건, 그들이 음모를 꾸미느라 자금을 빼돌리고 증거를 인멸한 흔적이었습니다!”

“이, 이럴 수가……!”

줄리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행정을 목숨처럼 아끼는 그에게, 자신이 꼼꼼히 검토하지 못해 결재해 준 석탄 영수증이 대공가를 파멸로 몰고 갈 뻔한 역모의 도구였다는 사실은 뼈아픈 충격이었다. 동시에, 복잡하게 얽힌 음모의 실타래를 장부의 수치와 고대 마력 분석만으로 단숨에 엮어낸 레이나의 천재적인 통찰력에 소름이 돋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레이나는 유적 안쪽에서 여전히 웅웅거리며 진동하는 봉인석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 봉인석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은, 요즘 부쩍 가려워하며 리온이의 이마에 돋아나기 시작한 미세한 검은색 뿔 주변의 문양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엘가 남작부인이 지하 보물창고에서 훔쳐내려 했던 고대 아티팩트 ‘겨울의 숨결’ 역시 이 봉인석의 결계를 해제하는 열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수첩의 연동 정보로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이 모든 것은 철저히 기획된 거대한 역모였다.

“줄리어스 씨, 이 분석 자료들을 즉시 영지 행정 장부와 대조해 공식 보고서로 작성하세요. 엘가 남작부인과 그녀에게 매수된 성당 사제들을 영지 반역죄로 단숨에 목을 칠 수 있는 완벽한 물증이 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줄리어스는 이제 레이나를 단순한 유모가 아닌, 거의 영지의 구원자이자 존경해 마지않는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눈에는 레이나를 향한 숭배에 가까운 경외심이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상황이 통쾌하게 정리되고 역모의 배후까지 탈탈 털어낸 순간.

쿵-!

레이나의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덜컥 내려앉았다.

“윽…….”

갑자기 시야가 핑글 돌며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뼈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경고! 대규모 정령 결계 가동 및 마력 정화로 인해 체내 마력 역류 발생!] [체온 급상승! 현재 온도가 임계점을 돌파했습니다. 즉시 얼음 속성 마정석 혹은 ‘냉각제’와의 피부 접촉을 시도하십시오!]

수첩의 붉은 경고등이 뇌리 속에서 미친 듯이 경보음을 울려 댔다.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었고,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가쁘게 흘러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레이나의 몸이 마차 바닥을 향해 힘없이 꺾였다.

“레이나!”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얼음처럼 차갑고도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칼리스였다.

그의 품에 닿는 순간, 레이나는 타오르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얼음 폭포를 만난 것 같은 극심한 쾌감에 몸을 잘게 떨었다. 하지만 이번 열병은 평소보다 훨씬 지독했다. 수명 30일을 깎아 가며 대규모 결계를 전개한 부작용이었다. 단순한 포옹이나 손잡기 정도로는 체내에서 요동치는 화염 마력을 식힐 수 없었다.

“하아, 읏…… 차가워…… 더…….”

레이나가 무의식중에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쥐며 매달렸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칼리스의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짙은 욕망과 안타까움으로 거칠게 흔들렸다.

그는 더는 지체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주변의 기사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도, 대공으로서의 체면도 지금의 칼리스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품 안에서 불덩이처럼 타들어 가는 이 작고 소중한 여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레이나, 실례하겠다.”

칼리스가 나직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차가운 입술이 레이나의 벌어진 입술 위로 사정없이 겹쳐졌다.

읍……!

레이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칼리스의 입술을 통해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빙핵(氷核) 마력이 다이렉트로 그녀의 목구멍을 넘어 체내로 밀려 들어왔다. 뜨겁게 끓어오르던 화염 마력이 그의 빙한 마력과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의 몸 주변으로 파스텔톤의 은빛 결계가 회오리치며 찬란하게 피어올랐다.

“하아…… 읍…….”

타오르던 열기가 급격히 정화되며 가라앉는 감각에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칼리스는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으며, 마치 목마른 자가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그녀의 달콤하고 뜨거운 온기를 탐닉했다.

두 사람의 마력이 완벽하게 순환하며 마차 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따뜻한 은빛 눈꽃으로 가득 찼다.

마침내 체내 마력 포화도가 안전 수치로 떨어지자, 칼리스가 아쉬운 듯 느리게 입술을 뗐다.

레이나는 완전히 풀린 눈으로 붉어진 입술을 가쁘게 달싹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뺨을 한 채, 그녀는 평소처럼 비즈니스적인 멘트를 던지려 입을 열었다.

“후우…… 정화 완료했네요. 이번 스킨십에 대한 계약 조건은…….”

그러나 레이나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칼리스의 눈빛이, 평소의 냉혹한 대공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은빛 눈동자에는 애달픔과, 집착, 그리고 깊은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소년 같은 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칼리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레이나의 뺨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래도 단순한 고용 계약일 뿐인가?”

그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레이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내 온 영혼이 너의 온기에 휩싸여 타들어 가고 있는데…… 레이나, 너는 아직도 나를 그저 쓸모 좋은 냉장고로만 보고 계약서 뒤에 숨을 생각인 건가?”

그의 절박한 고백이 차가운 북부의 바람을 타고 레이나의 귓가에 맴돌았다.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로 선을 그어 두었던 레이나의 마음의 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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