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귀를 찢는 굉음이 요새 전체를 통타했다. 산산조각 난 유리창이 파스텔톤의 분홍빛과 하늘빛 서리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휘날렸다. 멀리 북쪽 하늘을 물들인 것은 리온의 마력이 폭주하며 뿜어낸 시커먼 불꽃둥둥이였다.

"리온!"

내 심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레이나, 내 뒤로 피하십시오!"

칼리스가 나를 거칠게 잡아당겼지만, 나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쳐내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지금 물러서면 내 전부를 잃는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가 기필코 지켜내야 할 나의 보금자리가 저 불길 속에 있었다.

"피할 시간 없습니다, 전하. 지금 당장 가야 해요!"

그녀는 품 안에서 반짝이는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을 꺼내 들었다. 화면 위에 붉은색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위험! 대상 '리온'의 마력 포화도 180% 돌파! 정서 불안정 극상!] [시스템 가동: 상급 정령 방화 방패(Fireproof Shield)를 전개합니다. 소모 생명력 포인트: 50pt]

"정산은 나중에 해!"

레이나가 외치자마자,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에메랄드빛 정령 마력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칼리스는 레이나의 눈부신 결계를 보며 푸른 눈동자를 크게 떴다.

"이건...!"

"설명은 나중에요. 제 손 꼭 잡으세요, 냉장고 전하!"

그녀가 칼리스의 차가운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의 서늘한 얼음 마력이 레이나의 체내로 흘러들어와, 긴장감으로 타들어가던 심장을 순식간에 진정시켰다.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불길이 치솟는 대공저의 중앙 격실로 몸을 던졌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가로막았지만, 레이나의 방패는 한 치의 그을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격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순간, 아수라장 속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포착되었다.

엘가 남작부인이었다. 그녀는 품에 푸른빛을 발하는 정교한 눈꽃 모양의 아티팩트를 안고 있었다. 3화에서 레이나의 수첩에 이상 탐지로 걸렸던 대공가의 비보, '겨울의 숨결'이었다.

"이, 이 천한 유모 년이 어떻게 여기까지...!"

엘가가 비명을 지르며 아티팩트를 조작해 차원 탈출 결계를 열려 했다.

"어딜 도망가시려고요, 남작부인?"

레이나가 차갑게 읊조리며 수첩의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기능: 아티팩트 강제 동조화 및 차단]

슈우우웅!

'겨울의 숨결'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마력이 순식간에 흐트러지며 엘가의 발밑에 생성되던 마법진이 거품처럼 꺼졌다.

"아, 안 돼! 내 결계가...!"

"남의 집 보물창고에서 훔친 물건으로 유유히 퇴근하시려다니, 양심이 너무 없으시네요."

레이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엘가의 손목을 꺾어 쥐고 '겨울의 숨결'을 나꿔챘다. 엘가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애앵! 애아아앙!"

침대 구석, 타오르는 검은 불꽃 속에서 작은 아기 용이 부르르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리온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력이 방 안의 가구들을 닥치는 대로 태우고 있었다.

"리온! 이리 오렴, 유모 여기 있어!"

레이나가 불길을 헤치며 리온을 품에 안았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을 턱 막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온의 등을 쓰다듬었다.

"흑, 흐으응... 웅..."

리온이 레이나의 익숙한 정령 마력 향기를 맡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작은 머리를 비볐다.

[대상 '리온'의 마력 정화 시작.] [마력 역류 발생! 사용자 '레이나'의 체온 급상승! 39.5도... 40도...]

숨이 턱 막히는 열병이 레이나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피가 끓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아찔해진 순간, 등 뒤로 거대한 얼음 장벽이 솟구쳐 올랐다.

콰과과광!

천장에서 떨어지던 불타는 대들보가 칼리스가 뿜어낸 빙한의 마력에 가로막혀 그대로 얼어붙으며 바스라졌다. 칼리스는 레이나의 뒤를 단단히 받쳐 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뺨을 밀착시켰다.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나의 몸을 잠식하던 열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전부 베어 버리겠다."

칼리스의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주변으로 수천 개의 얼음 칼날이 전개되어 방 안을 가득 채웠던 검은 불꽃을 단숨에 얼려 깨뜨렸다. 그야말로 전쟁터를 지배하는 전신(戰神)의 위용이었다. 그 철벽 같은 비호 아래, 레이나는 리온의 스트레스 지수가 40%까지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저의 임시 심문실.

차가운 대리석 탁상을 사이에 두고 엘가 남작부인이 쇠사슬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레이나를 쏘아보았다.

"이까짓 쇠사슬로 황실의 비호를 받는 나를 가둘 수 있을 것 같으냐? 대공, 당장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레이나는 대답 대신 탁상 위에 두꺼운 서류 뭉치를 툭 던졌다. 종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레이나는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엘가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1분, 2분... 침묵이 길어질수록 엘가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압박이라는 것을 레이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이게 뭐지? 헛수작 부리지 마라!"

"남작부인."

레이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심문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건 수첩의 정산 시스템으로 추출한 '황실 반역 연합체 거래 명세 증명서'입니다. 그리고..."

레이나가 서류 한 장을 더 빼내어 엘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재무관 줄리어스 경이 숨기려 했던, 북부 봉인 영지의 기형적인 석탄 수입 과다 영수증이죠."

구석에 서 있던 줄리어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줄리어스 경은 대공가의 예산을 아끼려다 부인에게 속아 넘어가 영수증을 숨겼을 뿐이지만, 전 그 영수증의 진짜 흐름을 추적했습니다. 부인께서는 겨울철 난방용 석탄을 과다 수입하는 척하면서, 그 대금으로 황실 배후 세력에게 뇌물을 바치고 '겨울의 숨결'을 밀수하는 자금을 세탁하셨더군요."

"그, 그건...!"

엘가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장부의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인의 서명이 들어간 이 명세서가 바로 황실 반역의 증거입니다. 이제 황실이 부인을 구해줄 것 같습니까? 꼬리를 자르기 위해 부인을 가장 먼저 죽이려 들 텐데요."

레이나의 정량적인 팩트 폭격에 엘가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탁상 위로 툭툭 떨어졌다.

"내가...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들이 시켜서...! 황실의 2황자 측에서 대공가의 결계를 무너뜨리면 나를 대공비 자리에 앉혀주겠다고..."

엘가는 스스로 무덤을 파듯 모든 자백을 쏟아냈다.

칼리스가 차가운 지시를 내렸다.

"반역 죄인을 지하 감옥 깊은 곳에 가두고, 종신형에 처한다.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하라."

울부짖으며 끌려 나가는 엘가의 비명 소리가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완벽한 사이다의 순간이었다.

"해냈어요, 전하."

레이나가 미소를 지으며 품 안의 리온을 바라보았다. 줄리어스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영지의 가장 큰 암덩어리가 도려내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아주 잠시였다.

레이나의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몰아쉬던 리온의 이마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쩍-!

"리온...?"

리온의 이마에 돋아나 있던, 단순 트러블인 줄 알았던 미세한 검은색 뿔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바지직! 콰아앙!

검은 뿔이 급속도로 박살 나 깨어짐과 동시에, 리온의 눈동자가 흰자위를 보이며 뒤집혔다.

"꺄아악!"

리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파란색 광풍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심문실 전체를 휩쓸었다. 리온이 혼절하며 내뿜는 고대 용의 마력이 레이나와 칼리스를 집어삼킬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리온!"

비명 같은 외침이 파란 광풍 속에 묻혔다. 사나운 바람이 심문실의 단단한 대리석 벽면을 깎아내며 라벤더빛과 민트빛이 뒤섞인 기묘한 마력 파편을 허공에 뿌렸다. 방 안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사방에 얼음꽃이 피어났지만, 그것은 칼리스가 통제하는 온화한 냉기가 아니었다. 날카롭고 난폭한, 모든 것을 얼려 부수겠다는 고대의 파괴적인 빙한이었다.

"꺄윽!"

바람에 밀려 뒤로 넘어지려던 순간, 단단하고 거친 손길이 내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내 품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칼리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의 은발이 광풍에 어지럽게 휘날리며 차가운 뺨이 내 살구색 뺨에 닿았다. 평소라면 차갑고 든든한 '인간 냉장고' 같았을 그의 체온이, 지금은 마치 얼어붙은 빙하 한가운데에 던져진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시렸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짙은 청색으로 물들어 리온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련님! 리온 도련님!"

줄리어스가 비명을 지르며 문가로 밀려났다. 기사들이 서둘러 그를 대피시키려 했지만, 이미 심문실의 출입구는 리온이 뿜어낸 파란색 빙정 결계로 완전히 봉쇄된 뒤였다.

[경고! 고대 흑룡의 봉인 마력이 해제되었습니다!] [대상 '리온'의 생명력 급격히 감소 중! 마력 폭주율 250% 돌파!] [주의: 현재 상태가 3분 이상 지속될 경우, 대상의 영혼이 영구히 동결됩니다.]

눈앞에 번쩍이는 수첩의 붉은 시스템 경고등이 내 시야를 피빛으로 물들였다. 3분이라니. 내 소중한 아기 용이 겨우 네 살의 나이에 영원히 얼어붙는다고?

안 돼.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아. 이 녀석은 내 손으로 정성껏 끓인 영양 만점 단호박 이유식을 먹고, 내 품에서 꼬물거리며 꼬리를 흔들던 내 유일한 진짜 '가족' 후보였다. 누구도 내 보금자리를, 내 아이를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정령 치유 관리 수첩, 최대 출력으로 기동! 가지고 있는 생명력 포인트를 전부 정화 마력으로 치환해!"

[명령 접수 완료. 보유 생명력 포인트 120pt를 전량 정화 마력으로 변환합니다.] [경고: 정화 마력의 과다 방출로 인해 사용자에게 치명적인 마력 역류(화열병)가 발생합니다. 생존율 15%...]

"시끄러워! 그냥 해!"

내 손끝에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에메랄드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광풍을 헤치며 리온을 향해 기어갔다. 무릎이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에 긁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리온... 리온, 아가! 유모 여기 있어! 무서워하지 마!"

품에 닿은 리온의 작은 몸은 마치 영하의 얼음덩어리 같았다. 이마에서 깨진 검은 뿔의 파편들이 미세한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그 자리에서 솟구치는 파란 마력이 내 양손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치이이이익!

리온의 마력을 흡수하는 순간, 내 체내에서 뼈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화염의 마력 역류가 시작되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의 열병이 혈관을 타고 달아올랐다. 입안에서 비릿한 핏방울이 맴돌았다. 뜨거운 열기와 리온의 차가운 냉기가 내 몸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며 숨통을 죄어왔다.

"헉... 흑...!"

"레이나!"

칼리스가 미친 듯이 소리치며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의 두 팔이 내 허리를 부서질 듯 단단히 얽어맸고, 그의 넓은 가슴이 내 등에 밀착되었다.

"내 마력을 가져가십시오! 전부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버텨라...!"

그의 서늘한 빙한 마력이 내 심장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타오르던 혈관이 순식간에 식어가며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리온의 폭주 마력이 칼리스의 개입에 반발하듯 더 거세게 요동쳤다.

"웅... 으웅... 아파아..."

리온이 고통스러운 듯 버둥거리며 내 목덜미를 꽉 쥐었다. 리온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내 뺨에 닿자마자 얼음 알갱이가 되어 툭툭 떨어졌다.

"괜찮아, 리온. 유모가 다 치료해 줄게. 착하지..."

나는 리온을 가슴 깊이 안아 주며 남은 정화 마력을 쥐어짜 냈다. 칼리스의 얼음 마력이 내 몸을 통과해 리온에게 전달되며, 차가운 빙판 아래 흐르는 따뜻한 봄물처럼 부드러운 정화의 결계가 형성되었다. 체온 정화 결계. 오직 우리 세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기적이었다.

파란 광풍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사방을 뒤덮었던 거친 얼음 가시들이 솜사탕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눈송이가 되어 머리 위로 포슬포슬 내려앉았다.

"으응..."

리온의 마력 포화도 수치가 90%로 떨어지며, 아기는 마침내 평온한 얼굴로 내 품에 쓰러져 곤히 잠들었다.

"하아... 하아..."

나는 리온을 안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칼리스가 나를 바쳐 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내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오직 나를 향한 깊은 갈망과 애절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레이나, 제발... 자신의 목숨을 비즈니스 계약 따위의 판돈으로 쓰지 마십시오. 당신이 잘못되면 난..."

칼리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북부의 냉혈한 대공이, 평생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을 괴물이 내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뺨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는 감촉이 너무나 다정해서, 심장이 간지럽게 쿵쾅거렸다.

이건 단순한 냉장고와 사용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안의 방어 기제가 속삭였다. 호의를 믿지 마. 비즈니스일 뿐이야.

"전하... 이건 리온의 유모로서 제 임무를..."

내가 밀어내려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품에 안긴 리온의 몸이 갑자기 기이할 정도로 가벼워졌다.

"어...?"

리온의 이마, 검은 뿔이 완전히 부서져 나간 그 자리에서 검붉은색 마력의 실타래가 피어오르더니 허공에 기괴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문의 문장도, 정령의 표식도 아니었다.

[돌발 상황! 고대 흑룡의 '멸망의 낙인'이 발동되었습니다!] [시스템 분석: 아기 용 리온의 진짜 생부이자, 황실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 흑룡의 의식이 깨어납니다.]

수첩의 화면이 붉은색을 넘어 검은색으로 완전히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문실 바닥의 얼어붙은 틈새를 뚫고, 피비린내 나는 검붉은 마력의 손길들이 리온을 향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리온의 마력이 아니야."

칼리스가 검을 뽑아 들며 신음을 흘렸다. 검붉은 손길들이 리온의 작은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는 순간, 허공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나의 파편을 돌려받으러 왔다.

그와 동시에 리온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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