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리온 도련님이……!”

보초병의 절규가 연회장의 높은 돔 천장을 사납게 흔들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파스텔톤 핑크빛 얼음 조각 조명들이 일제히 깜빡이며 불길한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레이나의 품 안에서 곤히 자고 있던 아기 용 리온이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앙-! 아포, 아포오! 레이나아!”

아이의 이마, 솜털처럼 부드러운 살구색 앞머리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돋아나 있던 검은색 뿔이 기괴하게 요동쳤다. 평소에는 단순한 피부 트러블처럼 조그맣던 그 뿔이, 지금은 타오르는 검은 불꽃처럼 짙은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레이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고대 유적 터널의 붕괴와 리온의 마력이 공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방이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방금 전까지 레이나를 찬양하며 잔을 부딪치던 영지민들과 하인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칼리스 대공의 수려한 얼굴 역시 순식간에 혹한기의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당장 상황을 보고해라.”

칼리스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으며, 연회장 바닥을 서서히 얼려 나갈 만큼 차가웠다. 보초병은 바르르 떨며 품에서 붉은 경고 인장이 찍힌 전보를 꺼내 들었다.

레이나는 망설이지 않고 보초병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칼리스보다 한발 앞서 그 핏빛 전보를 낚아챘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질감 너머로 불길한 열기가 느껴졌다. 전보에 적힌 조잡한 필체와 급박한 문장들을 훑어내리는 레이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엘가 남작부인의 잔존 세력…… 그리고 고대 유적 터널 외곽 방어벽 폭파.’

레이나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위기는 곧 기회였고, 훌륭한 비즈니스 파트너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를 가장 비싸게 파는 법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회장 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수석 행정관 줄리어스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줄리어스 경.”

“네, 네? 레이나 님!”

갑작스러운 부름에 줄리어스가 어깨를 움츠리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레이나는 품에서 자신의 보물인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을 꺼내 들었다. 반짝이는 파스텔 블루빛 호환 스크린이 허공에 매끄럽게 떠올랐다.

“지난번 제가 대공가의 재정 장부를 검토할 때 지적했던 부분, 기억하십니까? 북부 봉인 영지의 기형적인 석탄 수입 과다 영수증 말입니다.”

줄리어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대공가의 일급 기밀이라며 레이나에게 숨기려 했던 그 영수증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 그건 영지민들의 겨울철 난방을 위한…….”

“거짓말은 비즈니스 테이블에서 가장 먼저 퇴출당하는 악덕입니다, 줄리어스 경.”

레이나가 수첩의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화면 위에 붉은색 마력 포화도 그래프와 함께, 대공가 지하 터널의 입체 지도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단순한 난방용이 아니었죠. 지하 고대 터널에서 흘러나오는 이상 마력의 누출을 억누르기 위해, 열을 내는 특제 마력 석탄을 끊임없이 쏟아부으며 억지로 온도를 맞추던 ‘땜질 공사’의 흔적이었습니다. 내 말이 틀립니까?”

줄리어스는 숨을 들이켰다. 레이나의 날카로운 지적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칼리스 역시 뜻밖이라는 듯 은빛 눈동자를 크게 뜨며 레이나를 응시했다.

“땜질은 결국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엘가 남작부인의 잔당들이 노린 것은 바로 그 불안정한 땜질 지점이었습니다. 방어벽이 무너지면서 축적되어 있던 고대 마력이 한꺼번에 역류하고 있는 겁니다.”

레이나는 수첩을 닫아 품에 넣으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지금 즉시 제가 현장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직접 지휘하여 터널의 마력 누출을 막고, 리온의 폭주를 예방하겠습니다.”

“안 된다, 레이나.”

칼리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레이나를 폭 가두었다.

“그곳은 고대 마력이 날뛰는 위험한 현장이다. 내 기사단이 갈 것이다. 그대는 리온과 함께 안전한 대공저에 남아 있어라.”

“대공 전하.”

레이나는 칼리스의 단단한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 짚으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리온의 마력은 그 어떤 기사단의 방어벽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아이의 정서와 마력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정령사는 오직 저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유모 계약서’ 제3조 4항, ‘도련님의 신변에 이상 기류 발생 시 즉각적인 현장 조치 권한’에 따른 정당한 의무 수행입니다. 비즈니스 계약을 어기실 셈입니까?”

칼리스의 입술이 팽팽하게 다물어졌다. 계약이라는 단어에 그가 묘하게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레이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이 냉혈한 대공에게는 감정적인 호소보다 철저한 비즈니스적 접근이 백 배는 더 잘 통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으아아아앙! 레이나아! 가지 마아! 리온이두 갈래에! 리온이 두고 가면 앙대!”

리온이 레이나의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꼬꼭 붙잡고 매달렸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흘러내릴 때마다, 바닥의 얼음 타일들이 뜨거운 마력에 녹아내리며 치이익 소리를 냈다. 수첩의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경고: 대상 ‘리온’의 스트레스 수치 88% 돌파!] [마력 포화도 급증! 대폭주의 위험이 감지됩니다.]

이대로 리온이 울음을 터뜨리며 힘을 통제하지 못하면, 현장에 가기도 전에 대공저가 통째로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붕괴 현장에 네 살짜리 아기 용을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온이, 레이나 좀 볼까요?”

레이나가 무릎을 굽혀 리온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것은, 연회장 뒷마당에서 정성스레 만들어 둔 분홍색과 노란색이 솜사탕처럼 섞인 말랑말랑한 정령 젤리였다. 은은한 딸기 향과 함께 따뜻한 정령의 마력이 젤리 주변을 몽글몽글 감싸고 있었다.

“짜잔, 이게 뭘까요? 레이나가 리온이를 위해 만든 특별한 ‘용용이 냠냠 젤리’예요.”

“냠냠…… 제리이?”

리온이 코를 훌쩍이며 젤리를 바라보았다. 우주에서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가 아이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거 먹고 대공저를 멋지게 지키는 ‘위대한 대장 용님’이 되어 줄 수 있나요? 레이나가 아주 중요한 임무를 하러 가는 동안, 리온이가 이 성을 지켜줘야 해요. 할 수 있죠?”

“웅…… 리온이 대장 용님이야! 젤리 주면 얌전하게 기다릴 수 이써!”

리온이 통통한 고사리손으로 젤리를 낚아채 입안에 쏙 넣었다.

오물오물, 말랑말랑한 젤리가 씹히는 소리와 함께 리온의 눈가가 탁 트이듯 맑아졌다. 아이의 이마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시스템: 대상 ‘리온’의 스트레스 수치 급감! 88% -> 10%] [시스템: 정서 불안 완벽 치유! ‘온순한 안전모드’ 가동.]

단 10초 만이었다. 리온은 언제 울었냐는 듯 베시시 웃으며 메이드의 품으로 쏙 안겼다.

“레이나, 조심히 다녀와아! 리온이가 성 잘 지키고 이스께!”

“착하지, 우리 도련님.”

레이나는 리온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준 뒤,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전장을 지배하는 지휘관의 그것과 같았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대공 전하. 마차를 대기시키시죠.”

칼리스는 멍하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기사단 전체가 매달려도 진정시키기 힘든 아기 용의 폭주를, 단 10초 만에 젤리 하나로 잠재운 그녀의 능력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줄리어스는 이미 감탄을 넘어 경외에 찬 눈빛으로 레이나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가자.”

칼리스가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

검은색 대공가 마차는 세찬 눈보라를 뚫고 북부 외곽의 유적 터널을 향해 질주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 좁은 공간 속에는 오직 칼리스와 레이나 두 사람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바깥의 매서운 바람 소리가 창문을 거칠게 때렸지만, 마차 내부의 침묵은 그보다 더 무겁고 팽팽했다.

유적에 가까워질수록 지하에서 역류하는 고대 마력의 파동이 강해졌다. 그리고 그 파동은 레이나의 체내에 잠들어 있던 마력과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으윽…….”

레이나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리온을 정화하며 쌓였던 뜨거운 열병(마력 역류)이, 외부의 고대 마력 자극을 받아 폭발하듯 끓어오른 것이다. 폐허가 된 혈관을 따라 용암이 흐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덮쳤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을 찢는 것 같았다.

[경고: 플레이어 ‘레이나’의 체온 급상승!] [마력 역류 위험 수치 도달. 즉각적인 냉각 조치가 필요합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레이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트를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그때, 맞은편에 있던 칼리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나의 바로 옆자리로 몸을 옮겼다.

“레이나!”

“전, 전하…… 오지…… 마세요…….”

“시끄럽다.”

칼리스는 레이나의 거절을 가차 없이 묵살했다. 그의 억센 두 팔이 레이나의 가냘픈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자신의 넓은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스윽-!

차가운 박하 향과 함께, 얼음처럼 서늘하고 맑은 냉기가 레이나의 뜨거운 살결에 닿았다. 레이나는 본능적으로 그 차가움에 몸을 밀착시키며 신음했다.

“하아…… 읏.”

“더 밀착해라. 열이 너무 심해.”

칼리스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레이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차가운 손이 레이나의 목덜미를 감싸 쥐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빈틈없이 껴안았다.

단순한 접촉이 아니었다. 칼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하고 고결한 빙한(氷寒)의 마력이, 레이나의 피부를 통해 인공호흡을 하듯 아낌없이 주입되고 있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얼음물 가득한 샘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극상의 쾌감이 전신을 관통했다.

레이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전하…… 이건 어디까지나 영지 위기 극복을 위한…… 비즈니스적 체온 정화…… 계약의 일환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 칼리스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가 레이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차가운 뺨을 지그시 맞댔다. 그의 은빛 눈동자 속에 서린 애틋함과 안달 난 열기가 레이나의 심장을 쿵 하고 내려앉혔다.

“그놈의 비즈니스…….”

칼리스가 밭은 숨을 내쉬며 낮게 읊조렸다.

“나를 그저 쓸모 좋은 냉장고로만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를 이용해 네 목숨을 구하고, 네 안전을 확보해라. 다만…….”

그의 차가운 입술이 레이나의 귓가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나를 바라볼 때 그 계약서 따위는 잊어 줄 수는 없는 건가?”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오만함이나 냉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레이나라는 존재를 갈망하고,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는 절박함만이 가득했다.

레이나는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마력의 열기 때문이 아니라, 대공의 이 뜨거운 진심이 그녀의 철옹성 같은 방어 기제를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거리 고아 출신으로서 타인의 호의를 절대 믿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마음속에, 칼리스라는 존재가 아주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력이 강렬하게 순환하며 마차 안을 은빛 결계로 가득 채웠다. 레이나의 체온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거친 호흡이 잦아들 무렵.

덜컹-!

마차가 거칠게 멈춰 섰다.

“전하! 레이나 님!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긴박한 목소리가 굳게 닫힌 마차 문을 두드렸다.

레이나는 아쉬움을 누르며 칼리스의 품에서 서둘러 몸을 떼어냈다. 칼리스는 허공에 남겨진 자신의 손을 쓸쓸하게 바라보았지만, 이내 냉정한 대공의 얼굴로 돌아와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고대 유적 터널의 무너진 입구 장막 너머로, 기이하게 푸른 불꽃을 내뿜는 거대한 봉인석이 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봉인석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은, 리온의 이마에 돋아난 검은 뿔 주변의 문양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무너진 틈새를 뚫고,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칠흑 같은 검은 안개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기이한 울음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전원, 방어 장벽을 전개해라!”

대기하고 있던 마법 기사들이 서둘러 마력 장벽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지하에서 분출된 검은 안개가 장벽에 닿는 순간-

바스스스슥!

“윽! 손이…… 손이 얼어붙는다!”

기사들의 마력 장벽이 유리처럼 깨져 나가고, 안개에 닿은 기사들의 손발이 순식간에 검푸른 얼음으로 변하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생명력을 통째로 얼려 버리는 고대의 저주받은 마력이었다.

검은 안개는 무서운 속도로 레이나와 칼리스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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