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체온 정화라면…… 손 말고 팔짱이나 입술도 유효한가?”
낮게 가라앉은 칼리스의 목소리가 아기방의 포근한 정적을 단번에 깨뜨렸다. 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레이나의 뺨가를 조심스레 스치며, 땀방울로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연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북부의 혹한을 다스리는 얼음 마정을 머금은 듯, 그의 손가락 끝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하지만 그 시린 감촉이 닿자마자 레이나의 뺨에서 피어오르던 붉은 열기가 치지직 소리를 내며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레이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 칼바람 부는 대공저의 주인인 괴물 대공이, 방금 제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를 한 게 맞나?
입술? 팔짱?
뇌리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부풀어 오르는 로맨틱한 설렘 따위는 자본주의의 철벽 뒤로 밀어둔 지 오래였다. 길거리 고아 출신으로 뼈아픈 배신을 겪으며 살아온 레이나에게, 칼리스 대공이란 생존을 위한 일류 고성능 냉장고이자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었다.
“대공 전하.”
레이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단단한 손등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신체 접촉의 범위를 무단으로 확장하시는 것은 계약 위반입니다.”
칼리스의 은빛 눈동자가 짙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은 레이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왼쪽 눈가에 피어난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레이나가 아기 용 리온의 흉포한 마력을 흡수해 정화할 때마다, 그녀의 가녀린 몸에는 뼈가 타들어 가는 듯한 마력 역류의 열병이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그 열병의 전조가 그녀의 피부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투명하도록 하얀 레이나의 왼쪽 눈가 피부 아래로, 일시적으로 타오르는 붉은 불꽃 나비 문양이 화려하게 날갯짓을 하며 명멸했다. 파스텔톤의 붉은빛과 오렌지빛이 뒤섞인 불꽃 나비는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고고하게 펄럭였다.
“……이 문양은 뭐지?”
칼리스가 홀린 듯 중얼거리며 그녀의 눈가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의 차가운 검지 끝이 불꽃 나비 문양에 닿는 순간, 찌릿-! 하는 짜릿한 마력의 스파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레이나의 몸속에서 미쳐 날뛰던 용의 화염 마력이 칼리스의 정제된 혹한 마력과 맞부딪치며 급격히 정화되기 시작했다. 얼음 계곡의 깊고 맑은 물이 온몸을 적시는 듯한 극상의 시원함이 척추를 타고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마력이 강제적인 순환을 일으키며, 방 안에 투명하고 몽글몽글한 체온 정화 결계가 피어올랐다. 허공에서 연분홍빛과 하늘빛 마력 입자가 부드러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칼리스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요동쳤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낯설고도 강렬한 충만감이었다. 매번 그녀를 안고 손을 잡을 때마다 얼어붙었던 그의 가슴속에 뜨거운 갈증이 싹트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레이나를 더 깊이 끌어안고 싶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냉정했다. 그녀는 칼리스의 손을 부드럽지만 아주 단호하게 떼어내며, 품속에서 가죽 표지의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을 꺼내 들었다.
“체온 정화 계약서 제3조 2항을 상기해 주십시오. 기본 계약에 포함된 신체 접촉은 ‘손잡기’와 ‘가벼운 포옹’까지입니다. 팔짱은 30%의 추가 할증이 붙으며, 입술을 통한 접촉은…….”
레이나가 깃펜 끝으로 수첩 면을 톡톡 두드렸다.
“대공가의 연간 재정을 통째로 흔들 만한 초특급 특수 계약금이 청구될 예정입니다. 전하의 개인 지갑 사정을 고려하신다면, 영역 확장은 자제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레이나.”
칼리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목소리에 짙은 상실감과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천하를 호령하는 북부의 지배자가, 고작 길바닥 출신의 유모 앞에서 안달이 나 목을 태우는 꼴이라니.
“내가 돈이 부족해 보이나?”
“비즈니스에서 예산의 효율성과 엄격한 선 확보는 기본이니까요. 저는 정직한 노동의 대가만을 원합니다. 상호 합의되지 않은 감정적 과소비는 사절이에요.”
레이나는 싱긋 웃으며 수첩을 덮었다. 칼리스는 그녀의 철두철미한 태도에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그저 ‘걸어 다니는 고성능 빙결 냉장고’로 취급하는 그녀가 야속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달아올랐다. 언젠가는 저 단단한 비즈니스 장벽을 무너뜨리고, 계약이 아닌 진심 어린 온기를 나누고 싶다는 갈망이 그의 마음에 깊게 뿌리내렸다.
***
다음 날 아침, 대공저의 수석 행정실에는 페퍼민트 향이 감도는 따스한 온기와 팽팽한 활력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대공가의 역사에 남을 혁명입니다, 레이나 님!”
수석 행정관 줄리어스가 서류 뭉치를 흔들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평소의 차갑고 냉철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안경이 코끝에 걸려 대롱거리는 것조차 모른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레이나가 밤새 작성하여 발급한 ‘아기 용 영양 급식 일지 및 영지 환경 개선 기획안’이었다.
“그동안 저희는 리온 도련님의 폭주를 막기 위해 영지 전체의 마력 장벽을 강화하는 데만 매년 수천만 골드를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레이나 님이 수첩의 통계 기능으로 분석해 주신 자료를 보니, 마정석의 마력 누수가 가장 심한 곳은 바로 고대 유적 터널의 노후화된 봉인 통로들이었군요!”
레이나는 찻잔을 들어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맞아요, 줄리어스 님.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봐야 항아리만 깨질 뿐이죠. 특히 매달 들어오는 기형적인 석탄 수입 영수증을 봤을 때 확신했습니다. 북부의 겨울이 아무리 혹독하다 해도, 이 정도의 화력 연료가 소비되는 건 명백한 낭비예요.”
그녀는 지난번 장부에서 발견했던 의심스러운 수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줄리어스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대공가의 행정관을 자처하면서도 놓쳤던 맹점을, 갓 들어온 유모가 완벽하게 간파해 낸 것이다.
“그래서 제가 제안한 대로 노후 통로들을 정령 마력 결계로 2중 차단하고, 새어나가는 열을 대공저 지하 난방 선로로 우회시켰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죠?”
“놀랍게도……!”
줄리어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최종 정산 장부를 내밀었다.
“이달의 영지 난방 비용이 예전의 정확히 40% 수준으로 절감되었습니다! 무려 60%의 예산이 남게 된 겁니다! 절약된 예산은 영지민들의 겨울철 구호 식량과 방한복 지급으로 즉각 전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지민들이 유모 님의 성함을 연호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정산이네요. 비즈니스는 이렇게 서로 상생할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죠.”
레이나가 수첩의 ‘영지 경영’ 페이지에 ‘성공’ 도장을 쾅 찍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레이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그런데 줄리어스 님. 지난번 엘가 남작부인이 보물창고에서 밀수하려다 적발된 고대 아티팩트 ‘겨울의 숨결’ 말입니다. 그 아티팩트의 행방은 확실히 복구되었나요?”
“예, 레이나 님. 남작부인이 지하 감옥에 유폐된 이후, ‘겨울의 숨결’은 대공가의 삼중 결계가 처진 비밀 보관함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잔존 세력들이 영지 주변을 서성인다는 보고가 있긴 합니다만, 기사단이 삼엄하게 통제 중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레이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엘가 남작부인은 대공가의 실권을 잡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위인이었다. 고대 유적의 마력 흐름을 강제 제어할 수 있는 ‘겨울의 숨결’을 노렸던 그녀가,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순순히 포기했을 리가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에에웅-! 레이나아-!”
그때, 아기방 한구석에서 꼬물거리는 아기자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온이 레이나가 직접 만든 ‘정령 마력 이유식’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양손에 쥐고 붕붕 흔들고 있었다. 딸기 핑크빛 정령 마력과 바닐라 옐로빛 마력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보기만 해도 달콤하고 따뜻한 영양 이유식이었다.
“우리 도련님, 맘마 먹을 시간이에요.”
“에웅! 맘마! 레이나, 아아-!”
리온이 짤따란 팔을 바둥거리며 레이나의 품으로 쏙 파고들었다. 레이나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따뜻한 이유식을 한 입 조심스레 떠먹여 주었다.
우물우물, 냠냠.
하얗고 통통한 볼을 다람쥐처럼 실룩거리며 이유식을 맛있게 받아먹은 리온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은지 짧은 용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레이나는 아이의 이마를 살며시 쓸어 올렸다. 붉게 부어오른 자리 아래에 자리 잡은, 손톱만 한 크기의 단단하고 미세한 검은색 몽우리가 손끝에 닿았다.
단순한 피부 트러블이 아니었다. 이것은 원작에서 리온을 폭주로 몰고 갔던 ‘고대 흑룡의 마력 응집체’, 즉 흑룡의 뿔이었다.
‘가려울 텐데도 잘 참아주어서 다행이야. 내가 정령 마력으로 꾸준히 정화해 줄게, 리온.’
그녀가 속으로 다짐한 순간, 레이나의 눈앞에 홀로그램 수첩 화면이 화사한 빛을 뿜으며 펼쳐졌다.
띠링-!
[알림: ‘아기 용 영양 급식 일지’ 및 ‘영지 환경 개선 기획안’ 최종 반영 완료!] [영지 기여도가 사상 최고치로 폭증하였습니다!] [보상: 생명 포인트 40점 획득!] [현재 보유 생명력 포인트: 540P] [레이나 님의 잔여 수명이 +3개월 연장되었습니다. 안전하고 따뜻한 ‘스위트홈’ 건설에 한 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앗……!”
레이나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올라갔다. 시한부의 어두운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완벽한 내 집과 진짜 가족을 갖겠다는 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생명이 3개월이나 연장되다니, 이보다 더 확실하고 든든한 비즈니스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레이나아, 조아? 레이나가 조으면 리온이두 조아!”
리온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레이나의 볼을 감싸 쥐며 헤헤 웃었다. 솜사탕처럼 사랑스럽고 따뜻한 온기가 온 마음에 가득 차올랐다.
***
그날 밤, 대공저의 중앙 연회장은 은은하게 빛나는 얼음 조각 조명과 타오르는 벽난로의 붉은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영지의 난방비가 획기적으로 절감되고 식량 배급이 대폭 늘어나자, 영지민들과 하인들은 레이나를 ‘대공가를 구원한 천사 유모’, ‘북부의 수호 정령사’라 칭송하며 작은 감사의 연회를 열어주었다.
“레이나 님 덕분에 올해 겨울은 얼어 죽는 사람 없이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레이나 유모 님을 위하여!”
하인들과 영지 기사들이 잔을 부딪치며 환호했다.
레이나는 연회장 구석에서 따뜻한 마시멜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가치와 실력을 완전히 입증하고,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쫓아낼 수 없는 안전한 입지를 다진 이 순간이 그 무엇보다 짜릿했다.
저 멀리서, 정장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칼리스 대공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은빛 눈동자는 평소의 냉혹함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으며, 오직 레이나 한 사람만을 담기 위해 안달이 난 듯 애틋하고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레이나, 오늘 밤만큼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그가 잔을 들어 올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려던 찰나.
쾅-!
연회장의 참나무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려 젖혀졌다.
“전하! 전하! 큰일입니다!”
온몸이 흙먼지와 핏빛 상흔으로 얼룩진 보초병 하나가 비틀거리며 연회장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 경고 인장이 찍힌 절박한 전보가 들려 있었다.
연회장의 음악이 뚝 끊기고, 사방이 얼어붙은 듯 차가운 정적이 휩싸였다.
“무슨 일이지?”
칼리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영하의 온도로 내려앉았다.
보초병이 피를 토해내듯 다급하게 외쳤다.
“지하 감옥을 탈옥한 엘가 남작부인의 잔존 세력이…… 고대 유적 터널의 외곽 방어벽을 폭파했습니다! 지하 터널이 붕괴하며 고대 마력이 봉인실로 역류하고 있습니다! 리온 도련님이……!”
그 순간, 레이나의 품에 안겨 있던 리온의 이마에서 기괴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