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 종이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어지럽게 흩어졌다.

재무관 줄리어스의 안경알 너머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제 자리에 굳어 버린 그의 시선은 두 사람의 깍지 낀 손과 책상 위의 장부에 번갈아 머물렀다.

정작 의심의 한가운데 선 레이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칼리스의 차가운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한 번 더 꽉 쥐었다가, 아주 느긋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떼어냈다.

“줄리어스 경, 문은 두드리고 들어오는 것이 신사적인 비즈니스의 기본이랍니다.”

레이나는 연분홍빛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생긋 웃었다. 사락사락, 바닥에 흩어진 장부 종이들을 가벼운 손놀림으로 모아 테이블 위에 착 올려놓는 그녀의 태도에는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당황함도 없었다.

줄리어스는 턱을 덜덜 떨며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켰다.

“대, 대공 전하……! 지금 유모와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게다가 그 손에 들린 것은 분명 대공가의 극비 비자금 장부……!”

“줄리어스, 목소리가 크군.”

칼리스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집무실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의 귀 끝은 아직 잘 익은 앵두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줄리어스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만큼은 매서운 북부의 눈보라처럼 차가웠다.

레이나는 테이블 위의 장부를 톡톡 두드리며 줄리어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오해하셨나 본데, 이건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 지불 과정입니다. 저는 조금 전 리온 도련님의 폭주하는 마력을 정화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체내 열병을 대공 전하의 얼음 마력으로 식히는 중이었죠.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 즉 비즈니스 계약의 일환입니다.”

“기, 기브 앤 테이크라고요? 대공 전하의 옥체를 냉각 장치 취급하시는 겁니까? 게다가 저 장부는……!”

“그리고 이 장부는 제가 훔친 게 아닙니다. 어제 서재를 정리하던 중, 바닥 타일 틈새에 삐져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죠. 유모로서 대공저의 안전과 효율을 위협하는 비효율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것 또한 제 업무 범위에 포함됩니다.”

레이나의 당당한 태도에 줄리어스는 말문이 막힌 듯 헉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레이나가 칼리스의 손을 완전히 놓아버리자마자 그녀의 체온이 다시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정화가 완벽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손을 뗀 탓이었다.

“윽…….”

레이나의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뺨 위로 순식간에 붉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녀의 왼쪽 눈가 피부 위로 신비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치직, 소리 없이 타오르는 라벤더 빛과 살구색이 섞인 미묘한 불꽃이 일더니,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운 붉은 나비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것이다. 그것은 체내 마력 역류가 정점에 달했을 때 나타나는 전조 증상이었다.

칼리스의 푸른 눈동자가 그 나비 문양을 마주한 순간 크게 흔들렸다.

그는 레이나가 물러서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차가운 얼음 마력이 서린 그의 커다란 손이 레이나의 뜨거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아직 정화가 덜 끝났군.”

칼리스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초조함과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레이나의 눈가에 새겨진 붉은 나비 문양을 아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은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레이나는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벗어나려 했다.

“전하, 줄리어스 경이 보고 있습니다. 업무 중에 과도한 스킨십은 곤란해요.”

“가만히 있어.”

칼리스는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제 얼음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레이나가 자신을 ‘성능 좋은 냉장고’라 부르며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진짜 이유를.

그녀는 제 영혼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홀로 견디며 리온을 치료해 왔던 것이다. 제 목숨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아기 용을 지키고, 그 대가를 구걸하는 대신 정당한 ‘계약’의 형태로 칼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빙하 아래 갇혀 있던 칼리스의 심장이 쿵, 쿵, 무겁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안쓰러움과 미안함, 그리고 정체 모를 설렘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채워갔다.

“매번 이 정도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던 건가.”

칼리스의 낮게 가라앉은 눈빛이 레이나의 붉은 눈가를 집요하게 쫓았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하는 제 생명줄이자 가장 효율적인 냉각제라고요. 그러니 얼른 열이나 식혀 주세요.”

레이나는 애써 덤덤한 척 대꾸했지만, 칼리스의 품에서 전해지는 시원하고 맑은 기운에 젖어드는 눈동자만큼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핑크빛 기류를 지켜보던 줄리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 전하가 여인을 이토록 소중하고 애틋하게 품에 안은 모습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줄리어스는 재무관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두 분의…… 정당한 비즈니스 관계는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유모 님, 그렇다고 해서 재무 장부를 무단으로 분석한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레이나는 칼리스의 품에 기댄 채, 슬그머니 제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의 정산 페이지가 허공에 반짝이는 민트빛 홀로그램 도해를 띄웠다.

“줄리어스 경, 제가 장부를 본 건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대공가의 재정 구조를 비즈니스적으로 ‘개선’해 드리기 위함이죠. 이 도해를 보시겠어요?”

줄리어스의 시선이 허공에 떠오른 복잡한 마력 그래프와 수치들로 향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헤일로 북부 대공가가 매년 수입하는 석탄과 마정석의 양입니다. 제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죠.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이 막대한 연로의 40%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 보셨습니까?”

레이나의 손가락이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이는 그래프의 한 지점을 콕 짚었다.

“북부 봉인 결계를 유지하는 마도 난로입니다. 결계의 마력 순환 경로가 미세하게 왜곡되어 있어서, 열기가 결계를 데우는 게 아니라 주변의 빙하를 무의미하게 녹이는 데 낭비되고 있어요. 한마디로, 밑 빠진 독에 계속 뜨거운 물을 붓고 있는 꼴이죠.”

줄리어스의 안경알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황급히 바닥에서 주워 올린 비밀 장부의 수치와 레이나가 제시한 그래프를 대조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결계 유지 비용이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이유가, 결계 자체의 마력 누수 때문이었다고?”

“맞습니다. 제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결계의 마력 순환 배열을 3도만 비틀고, 마도 난로의 연소 방식을 정령식 순환 구조로 변경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연간 석탄 수입 비용의 최소 30%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레이나는 미리 작성해 둔 깔끔한 기획서 한 장을 줄리어스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상큼한 민트색 잉크로 보기 좋게 정리된, 완벽한 구조조정 제안서였다.

“이 제안서대로 실행하신다면, 대공가는 매년 수만 골드의 불필요한 지출을 막을 수 있습니다. 어때요, 줄리어스 경? 이래도 제가 무단으로 장부를 훔쳐 본 스파이로 보이십니까?”

줄리어스는 제안서를 받아 들고 바르르 떨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계산식과 완벽한 행정적 대안. 재무관으로서 평생을 바쳐온 자신조차 찾아내지 못한 영지의 고질적인 재정 낭비를, 이 뽀짝한 유모가 단숨에 해결해 버린 것이다.

줄리어스의 의심은 순식간에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토록 완벽한 행정 정산이라니! 마력 전도율과 열역학적 손실을 이렇게 정교하게 계산해 내다니요! 유모 님, 아니 레이나 님! 당신은 진정한 비즈니스의 천재이십니다!”

줄리어스는 조금 전의 무례함도 잊은 채 레이나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꺾어 넙죽 절을 올렸다.

“제가 눈이 멀어 영지의 구원자를 몰라보았습니다! 이 제안서는 당장 행정처로 가져가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제 제안서에 대한 컨설팅 수수료는 나중에 정식으로 청구하겠습니다.”

“기꺼이 지불해 드리고말고요! 대공가의 금고를 열어서라도 드리겠습니다!”

줄리어스는 제안서를 보물처럼 품에 꼭 껴안고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쪼르르 뛰어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요란했던 소동이 가라앉고, 집무실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의 고요가 찾아왔다.

창밖으로 북부의 은은한 라벤더 빛 Twilight(황혼)이 번져오며, 집무실 내부를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레이나는 제 뺨에 닿아 있는 칼리스의 손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전하, 이제 열이 거의 다 식은 것 같습니다. 손을 놓아주셔도……”

그러나 칼리스는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타래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깊고 은밀한 갈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다 식지 않았는데.”

“예?”

칼리스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의 차가운 숨결이 레이나의 입술 끝에 닿을 듯 가깝게 흐트러졌다. 그는 레이나의 귓가로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비즈니스 체온 정화라는 것 말이지.”

“…….”

“손을 맞잡는 것 말고…… 팔짱이나, 입술을 맞대는 것도 유효한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노골적인 질문에 레이나의 사고 회로가 일순간 정지해 버렸다.

두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가슴속에서 심장이 제멋대로 방방 뛰어대며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이, 이 냉장고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냉각 효율을 높이랬더니 왜 가열을 하고 난리람?!’

레이나는 마른침을 꿀컥 삼키며, 최대한 동요를 감추기 위해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칼리스의 단단한 가슴팍에 밀착되어 있어, 그의 규칙적이고 묵직한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 전하. 비즈니스 파트너 간의 과도한 신체 접촉은 계약서 위반 소지가 있습니다만.”

“계약서라면 새로 쓰면 되지. 네가 원하는 조건은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칼리스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레이나의 턱끝을 조심스레 치켜올렸다. 매혹적인 푸른 눈동자가 오직 그녀만을 담기 위해 깊어지고 있었다.

“내 영지의 절반, 아니 내 심장이라도 원한다면 기꺼이 계약서에 서명하겠다. 그러니…….”

그가 조금 더 고개를 숙여 거리를 좁혀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쿠구구구구-!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맷돌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불길한 진동이 대공저 전체를 거세게 흔들었다.

“앗!”

바닥이 휘청하는 바람에 레이나가 칼리스의 품으로 완전히 안겨버렸다. 칼리스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중심을 잡았다.

창가에 장식되어 있던 파스텔 블루빛 마정석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동시에 아기방이 있는 서쪽 탑 방향에서 붉은빛 마력 스파크가 하늘을 향해 슈우우욱- 하고 거세게 쏘아 올려졌다. 눈이 멀 것 같이 강렬한 붉은 광포가 창문을 넘어 집무실 안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으아아아아앙-!”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은 명백히 리온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였다. 평소의 심술궂은 잠투정과는 궤를 달리하는, 공포와 고통에 질린 듯한 비명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리온……!”

레이나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칼리스의 품에서 번개처럼 벗어나 문가를 향해 달렸다.

“가야 해요! 리온에게 이상이 생겼어요!”

칼리스 역시 붉은 광포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전신에서 차가운 얼음 마력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도를 달려 리온의 방으로 향했다.

문이 벌컥 열리자, 아기방 내부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도련님! 제발 진정하세요!”

보모 메이드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구석에 웅크려 있었고, 방 안은 이미 폭주한 리온의 화염 마력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분홍빛 레이스 커튼은 검게 그을려 재가 되어 날렸고, 아기용 목마와 장난감들이 마력의 파동에 휩쓸려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아기 용 리온이 자그마한 꼬리를 바르르 떨며 침대 위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리온의 몸 주변으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은 평소보다 훨씬 어둡고 무거웠으며, 불쾌한 흑색 마력이 실핏줄처럼 엉켜 있었다.

“리온! 유모 여기 있어!”

레이나가 망설임 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이 그녀의 옷깃을 스쳤지만, 레이나는 품에서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을 꺼내 들며 정령 마력을 개방했다.

파스스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몽글몽글하고 따스한 민트빛 정령 마력이 방 안의 흉포한 화염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식혀갔다. 수첩의 정산 페이지가 붉은색 경고등을 요란하게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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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온, 착하지? 유모 품에 안기렴. 다 괜찮아질 거야.”

레이나가 리온을 품에 껴안고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정령 마력이 아이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가자, 요동치던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들며 리온의 울음소리가 “끄윽, 흐으우…….” 하는 꼬물거리는 웅얼거림으로 변해갔다.

겨우 안정을 찾은 리온이 레이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훌쩍였다.

“레이나아…… 이마가아, 이마가 아포오…….”

“이마가 아파요? 어디 봐요, 우리 도련님.”

레이나는 리온을 조심스레 눕히고, 땀과 눈물로 젖은 아이의 앞머리를 살며시 걷어 올렸다.

지난번 단순한 피부 트러블이나 땀띠인 줄 알고 연고를 발라주었던 이마 한구석이 유독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가려웠는지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선명했다.

레이나가 붉게 부어오른 자리를 조심스레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어라?’

단순한 부종이 아니었다. 살갗 바로 아래에서, 손톱만 한 크기의 아주 미세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마치 흙 속에서 갓 돋아나는 새싹처럼, 아주 기괴하고도 불길한 검은색 뿔의 형태를 띤 몽우리였다.

그 단단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찌릿-!

레이나의 뇌리를 관통하는 강력한 고대 마력의 공명이 일어났다.

동시에, 아기방 바닥에 그려져 있던 방어 마법진이 쩍쩍 갈라지며, 대공저 지하 깊은 곳—봉인된 고대 유적이 있는 방향에서 웅장하고 무거운 쇠사슬이 풀리는 듯한 파열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쿠라라랑-!

칼리스의 얼굴이 난생처음 보는 공포와 경악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가 허리춤의 대검 손잡이를 움켜쥐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건…… 유적의 봉인이 깨지는 소리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시선이 레이나의 손끝, 그리고 리온의 이마에 돋아난 미세한 검은 몽우리로 향했다.

그 찰나, 레이나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 용 리온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검은 심연처럼 짙은 흑색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리온은 무언가에 홀린 듯 허공을 응시하며 웅얼거렸다.

“……문이, 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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