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천박한 길거리 출신 유모 주제에 감히 내 고귀한 옷자락을!”
엘가 남작부인의 앙칼진 비명이 아기방의 정적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그녀의 얼굴은 붉다 못해 흙빛으로 거칠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든 레이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꼴이 마치 그물에 걸린 살진 물고기 같았다.
하지만 레이나는 남작부인의 비단 소맷자락을 쥔 손가락 끝에 더욱 팽팽하게 힘을 주었다. 사르르 피어오르는 정령의 온기가 그녀의 손끝을 타고 흘러 가느다란 손가락을 단단한 쇠사슬처럼 묶고 있었다.
레이나는 살구빛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서도, 눈동자만큼은 얼음골짜기처럼 차갑게 빛내며 생긋 웃었다.
“고귀한 옷자락통에 가문의 귀중한 보물까지 함께 쑤셔 넣으시느라 참 무거우셨겠습니다, 남작부인. 주머니 깊은 곳에 몰래 숨겨 도망치려던 가문의 비보 ‘겨울의 숨결’을 이 자리에서 직접 꺼내 볼까요?”
“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전하! 저 미친 유모가 저를 모함하고 있습니다! 감히 대공가의 친척인 저를 도둑 취급하다니요!”
엘가 남작부인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칼리스를 바라보았다.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찔끔 흘리며 가슴을 쥐어짜는 연기는 가히 일품이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그 가련한 모습에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매달리는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무정하고 냉혹한 ‘괴물 대공’ 칼리스였다.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은 엘가의 눈물이 아니라, 레이나의 왼쪽 눈가에서 찬란하게 명멸하는 붉은 불꽃 나비 문양에 닿아 있었다. 타오르는 나비의 날갯짓이 그의 심장을 기묘하게 두드리는 와중에도, 그의 이성은 차갑고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멈춰라, 엘가 남작부인.”
칼리스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아기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전, 전하……?”
“유모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지. 내 눈앞에서 떳떳하게 소맷자락을 털어 보이면 될 일 아닌가.”
칼리스가 턱짓을 하자,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대공가의 철갑 기사 둘이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차가운 철제 갑옷이 스치는 소리가 엘가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아, 안 됩니다! 무례하게 감히 제 몸에 손을 대려 하시다니요! 전하, 이건 모욕입니다! 으악! 이거 놓으란 말이다, 이 무지몽매한 기사 놈들아!”
기사들은 대공의 명령만을 따르는 기계와도 같았다. 그들은 엘가의 히스테릭한 비명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그녀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아 고정했다. 그리고 다른 기사 한 명이 그녀의 넓고 화려한 소맷자락 안쪽을 거침없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년! 레이나! 네년이 감히 나를 이딴 식으로 모함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천한 정령사 주제에……!”
독설을 내뿜던 엘가의 입이 순간 쩍 벌어졌다.
스르릉, 툭.
기사의 손끝에 걸려 엘가의 넓은 소맷자락 안감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쨍그랑―!
얼음이 맑게 깨지는 듯한 청아하고 고결한 소리가 아기방의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것은 은은한 파스텔톤의 연하늘빛 광채를 내뿜는 눈꽃 모양의 보석 펜던트였다. 그것이 닿은 바닥 주위로 순식간에 하얀 성에가 끼며 공기 중의 습기가 얼어붙어 반짝이는 얼음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대공가의 역사와 함께해 온 봉인의 아티펙트, ‘겨울의 숨결’이었다.
“……!”
아기방 안의 모든 공기가 동결된 듯 가라앉았다. 엘가 남작부인의 얼굴은 마치 빳빳하게 말린 종이처럼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레이나는 바닥에 떨어진 연하늘빛 보석을 빤히 내려다보며, 품 안에서 웅냥냥 소리를 내며 제 품에 얼굴을 묻는 아기 용 리온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포시 쓰다듬었다. 리온은 레이나의 따뜻한 정령 마력에 푹 취해 세상 모르게 단잠에 빠져 있었다.
“어머나, 남작부인. 소맷자락에 눈꽃이 피었네요? 북부의 추위가 아무리 매섭다지만, 대공가의 비보까지 품에 안고 따뜻하게 데워주시려 했다니 그 충성심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레이나의 솜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뼈가 가득 찬 목소리가 엘가의 고막을 찔렀다.
“이, 이것은…… 음모다! 누군가 내 소매에 몰래 집어넣은 것이 분명해! 저 유모 년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추하다, 엘가.”
칼리스의 목소리에는 이제 한 줌의 자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바닥의 얼음 마정석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대공저의 규율을 어기고 가문의 비보를 절도하려 한 죄, 그리고 내 유일한 후계자인 리온을 해치려 음모를 꾸민 죄. 이 모든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전, 전하! 제발 자비를……! 저는 전하의 친족입니다!”
“친족이라 하여 가문의 반역자를 살려둔 전례는 윈터할에 없다. 즉각 엘가 남작부인의 작위를 박탈하고, 대공저의 모든 권한을 회수한다. 아울러 평생 북부 영지 변방의 얼음 광산 인근 가옥에 유폐하며, 기사단의 삼엄한 감시 아래 평생 추방 보호 관찰형에 처하겠다.”
칼리스의 단호한 선언에 엘가는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기사들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 나갔다.
“레이나! 네년이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가만두지 않겠다! 내 손으로 네년의 목을……!”
멀어지는 표독스러운 비명에도 레이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앞에는 아주 반가운 반짝임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스텔 핑크빛의 화사한 시스템 창이 레이나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뾰로롱 하는 경쾌한 효과음을 냈다.
[정령 치유 관리 수첩 연동 완료!] [★ 돌발 퀘스트: '가증스러운 모함꾼의 음모를 분쇄하라!' 성공!] [정산 내역:] - 아기 용 리온의 스트레스 지수 급감: 마력 포화도 안정화 80% 달성! - 대공저 내 유모의 신뢰도 및 평판 점수 대폭 상승! - 가문의 비보 '겨울의 숨결' 조기 회수 기여도 반영!
[누적 평판 점수를 생명력 포인트로 환산합니다…… 정산 중……] [딩동! 생명력 +15일 획득 완료!] [현재 남은 수명: 28일 12시간]
‘살았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긴장감 끝에 찾아온 달콤한 생명력 연장의 맛! 레이나는 터져 나오려는 콧노래를 꾹 참으며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단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한부 선고를 받고 길거리를 떠돌던 처지였는데, 이제는 어엿하게 목숨줄을 쥐고 대공가에서 갑(甲)의 위치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비즈니스의 성공인가.
그때, 아기방 구석에서 내내 마른침을 삼키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재무관 줄리어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레, 레이나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남작부인의 그 흉계들을 단숨에 꿰뚫어 보시고 가문의 보물까지 지켜내시다니, 제 평생 이런 명쾌한 해결은 처음 봅니다.”
줄리어스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안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레이나를 단순한 길거리 정령사로 의심하던 이전의 차가운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거의 비즈니스 롤모델을 바라보는 듯 존경 어린 눈빛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줄리어스 님. 저는 그저 우리 도련님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계약직 유모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걸요.”
레이나는 생긋 웃으며 줄리어스의 품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는 아까부터 삐져나와 있던 낡고 두툼한 종이 뭉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레이나의 예리한 정령사의 눈이 그 종이에 적힌 거친 활자들을 포착했다.
[북부 봉인 영지 석탄 수입 영수증 - 총액 45,000 골드]
‘석탄 수입 과다 영수증……?’
레이나의 머릿속에 기민한 경고등이 켜졌다. 일 년 내내 세찬 눈보라가 치는 북부라지만, 최근 몇 달간 대공가로 청구된 석탄 수입량은 영지의 규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비대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한 기이한 지출이었다.
레이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연스럽게 수첩의 '복사 및 기록' 기능을 활성화했다.
[수첩 기능: '장부 복사'를 실행합니다. 대상 문서의 수치 정밀 스캔 완료.]
눈 깜짝할 사이에 줄리어스의 품에 있던 영수증의 모든 수치와 내역이 레이나의 머리치유 수첩 기밀 페이지에 고스란히 복사되어 기록되었다.
줄리어스는 레이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황급히 영수증 뭉치를 품속 깊숙이 쑤셔 넣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검토하던 영지 재무 장부의 일부입니다. 신경 쓰실 것 전혀 없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줄리어스 님께서 영지 재정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레이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영악하게 꼬리를 내렸다. 이미 자료는 내 손안에 들어왔으니까. 나중에 이 기형적인 수치들을 분석해 보면, 이 차가운 대공저의 숨은 구멍을 또 하나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레이나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시급하고 중대한 생존의 문제가 닥쳐오고 있었다.
두근. 두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경고! 정화 작업의 대가로 체내 마력 역류 발생!] [현재 체온: 38.5도…… 38.9도…… 급격히 상승 중!] [경고! 영혼 연소 위험 방지를 위해 즉시 차가운 얼음 마력과의 접촉(스킨십)을 시도하십시오!]
‘아으, 또 시작이네…….’
뼈마디가 찌르르하게 저려오며 몸 안에서 화염 장벽이 무너지는 듯한 극심한 열병이 몰려왔다. 레이나의 하얀 이마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왼쪽 눈가 피부 밑에서 다시금 붉은 불꽃 나비 문양이 화려하고 치명적인 빛을 발하며 떠올랐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리온을 안아 들려던 칼리스였다.
“유모, 얼굴이 붉군. 몸 상태가…….”
“전하.”
레이나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애써 똑부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해진 냉각 시간이 되었습니다. 약속대로 전하의 집무실로 가 있겠습니다. 도련님을 침대에 뉘어두고 올 테니, 곧장 오시지요.”
그녀는 칼리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곤히 잠든 리온을 아기 침대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아기방을 빠져나와 대공의 집무실로 향했다.
* * *
은은한 연보랏빛 마법 램프가 켜진 대공의 집무실은 늘 서늘한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춥다고 몸을 떨었을 공간이지만, 지금 온몸이 화로처럼 달아오른 레이나에게는 이곳이야말로 천국과 다름없었다.
“하아, 하아…….”
쇼파에 기대어 뜨거운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 집무실 문이 열리며 칼리스가 걸어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혹한의 얼음 마력이 방 안의 열기를 단숨에 가라앉혔다.
칼리스는 책상 뒤에 서서 레이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고, 레이나의 눈가에서 붉게 타오르는 나비 문양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는 소리가 이 고요한 집무실 안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유모, 매번 이런 식으로 내 몸을 해독제로 쓰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건가?”
칼리스의 목소리에 묘한 긴장감과 억눌린 갈망이 섞여 있었다. 그는 레이나가 자신을 단순한 '인간 냉각기'가 아닌, 한 명의 남자로 봐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거리 고아 출신에 처절한 애정결핍을 계약으로 무장한 레이나에게 그런 낭만적인 감상이 통할 리 없었다.
“대공 전하.”
레이나는 자리에 일어나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양손을 감싸고 있던 하얀 레이스 장갑을 거침없이 벗어던졌다.
툭, 바닥으로 떨어진 장갑 너머로 드러난 가느다랗고 하얀 레이나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이건 비즈니스입니다. 저는 도련님을 살리고, 전하는 저를 살리는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 계약관계죠. 사적인 감정은 배제해 주십시오.”
레이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칼리스의 창백하고 커다란 손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석!
차가운 얼음 서리를 듬뿍 머금은 그의 단단한 손등골이 레이나의 뜨거운 손바닥에 닿았다.
“읏…….”
전신을 관통하는 찌릿하고 황홀한 시원함에 레이나의 입에서 얇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화염에 타들어가던 뼈마디가 얼음물에 담긴 듯 급격하게 식어내리는 극상의 쾌감이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순간, 지지직하는 마력 스파크와 함께 투명한 얼음 마력과 붉은 화염 마력이 서로 엉키며 방 안 가득 은은한 마력 순환 결계를 형성했다.
칼리스의 창백한 얼굴이 난생처음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귀 끝은 이미 잘 익은 앵두처럼 붉어져 있었고, 시선을 피하면서도 레이나의 손을 놓지 못해 은근히 힘을 주어 맞잡아왔다.
“유모의 손은…… 정말 뜨겁군. 매번 이 정도로 몸이 타들어 가면서도 나를 찾아오는 건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하는 제게 가장 훌륭하고 성능 좋은 냉장고이십니다. 자, 냉각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금 더 강하게 잡겠습니다.”
레이나는 뻔뻔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매어 꽉 쥐었다. 손가락 뼈마디가 맞물리며 전해지는 그의 강인한 체온이 몸속의 열병을 완벽하게 다스려주고 있었다.
그 달콤하고도 아슬아슬한 정적의 순간.
두 사람의 숨결이 엉키며 집무실 안의 온도가 기묘하게 상승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달칵.
적막을 깨고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급히 결재하셔야 할 영지 재무 보고서가……!”
문 밖에서 헐떡이며 들어온 사람은 재무관 줄리어스였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와 대공가의 기밀 장부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줄리어스는 집무실 내부의 풍경을 마주한 순간, 돌처럼 굳어버렸다.
두 손을 깍지 낀 채 서로를 뜨겁게 바라보고 있는(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대공 전하와 유모 레이나. 그리고 책상 한구석, 레이나가 열병에 정신이 팔려 잠시 올려놓았던 흰 종이 한 장.
그 종이에는 줄리어스가 방금 전 품속에 숨겼던, 그리고 오직 재무관과 대공만이 공유해야 할 ‘대공가의 비밀 석탄 수입 장부’의 세부 수치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복사되어 적혀 있었다.
줄리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리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가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리키며, 경악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대, 대공저의 비밀 비자금 장부가…… 왜 유모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