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된 계약서를 정리하던 순간, 리온의 방 문을 거칠게 걷어차며 가문 대대로 정령사를 공급해 온 세력의 수장 엘가 남작부인이 칼리스의 침묵을 방패 막이 삼아 하인들을 등 뒤에 거느린 채 기세등등하게 들이닥쳤다.
쿠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파스텔 핑크빛 벽지와 은은한 레몬 옐로색 커튼이 드리워진 아늑한 아기방에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발걸음이 불쑥 들이쳐 가차 없이 바닥을 짓밟았다.
“당장 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할까!”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비명이 방 안의 평화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엘가 남작부인은 음험하고 사나운 눈빛으로 레이나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며 멸시와 혐오를 가득 담아냈다. 등 뒤에 거느린 대공저의 하인들은 남작부인의 기세에 눌린 채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레이나의 품에 안겨 꼬물꼬물 잠들려던 아기 용 리온이 갑작스러운 소음에 깜짝 놀라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동글동글한 볼을 실룩거리며 금방이라도 우렁찬 울음을 터뜨릴 듯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우웅…… 앙아……!”
“어이쿠, 우리 아기 도련님. 놀라셨쪄요? 착하지, 둥기둥기.”
레이나는 익숙하게 리온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품에 꼭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무례한 불청객의 입에 젖병이라도 물려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직업정신을 발휘해 아기의 안정부터 챙겼다.
그 꼴을 본 엘가 남작부인의 콧바람이 팽 하고 뿜어져 나왔다.
“전하!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출신도 모르는 길거리 고아년이 감히 대공가의 고귀한 직계 마수에게 손을 대다니요! 저 요망한 년이 마력 정화를 빌미로 전하를 해치고 가문을 통째로 몰살하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당장 저 사기꾼 년을 끌어내어 지하 감옥에 처넣으셔야 합니다!”
남작부인은 칼리스 대공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제멋대로 자신을 향한 무언의 동조라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턱을 높이 쳐들고 기세등등하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오자마자 침을 튀기며 악을 쓰시네. 목청도 참 좋으셔라.’
레이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저토록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대니 아기 용의 스트레스 수치가 안 올라가고 배기겠는가.
레이나는 은밀하게 마음속으로 시스템을 호출했다.
‘정령 치유 관리 수첩, 기동.’
*띠링!*
오직 레이나의 눈에만 보이는 투명하고 맑은 민트빛 홀로그램 창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시스템: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대상: 아기 용 리온 (스트레스 수치: 65% ↑)] [기능: 건강 상태 투시 필터 작동!]
수첩의 투시 필터가 작동하자, 리온의 몸 주위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흐름이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변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리온의 몸에서 뻗어 나간 마력의 실타래가 방 안의 특정 방향을 향해 기이하게 뒤틀리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레이나의 영리한 눈동자가 마력의 실타래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실타래의 끝이 도달한 곳은 다름 아닌 엘가 남작부인의 손에 쥐인 화려한 레이스 손수건이었다.
[경고! 반경 5m 내에 고대 아티팩트 ‘겨울의 숨결’의 파편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경고! 해당 아티팩트가 방출하는 미세 가루에 장기 노출될 경우, 소아 용의 정서불안을 극대화하고 피부염 및 마력 역류를 유발합니다.]
‘심증은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증거를 흘리고 다니시다니.’
레이나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게 싹 올라갔다. 남작부인이 들고 있는 손수건 모서리에 아주 미세하게 반짝이는 은빛 가루가 묻어 있었다. 바로 대공가의 보물창고에 깊숙이 봉인되어 있어야 할 고대 아티팩트 ‘겨울의 숨결’에서 떨어져 나온 마력 가루였다.
그때, 곁에서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칼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변으로 시린 서리가 내려앉듯 차가운 안개가 피어올랐다.
“남작부인. 내 저택에서 이토록 소란을 피우는 것은—”
칼리스가 차갑게 굳어버린 목소리로 엘가의 말을 자르고 그녀를 쫓아내려던 찰나였다.
슥.
레이나가 품에 안은 리온을 한 손으로 조심조심 고쳐 안으며, 다른 한 손으로 칼리스의 단단한 손등을 살포시 덮어쥐었다.
“……!”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차가운 얼음 마력을 가득 품은 그의 손등 위로, 레이나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동시에 레이나의 전신을 지독하게 갉아먹던 타오르는 화염의 마력 역류—열병이, 칼리스의 서늘한 체온과 맞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맑아지고 찌릿찌릿한 카타르시스가 전신을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레이나의 하얀 눈가 주위로 일시적으로 붉게 타오르는 화려한 불꽃 나비 문양이 스르륵 나타났다.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난 붉은 꽃잎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나비 문양을, 칼리스는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 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 깊은 곳이 쿵, 하고 거세게 요동쳤다.
레이나는 칼리스에게만 보일 정도로 아주 작게 눈짓을 해 보였다.
‘전하, 잠시만요. 이 불청객은 제가 직접 쫓아낼 테니 잠시만 가만히 구경해 주세요.’
그녀의 눈빛은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아주 명확하고 당당한 요구를 담고 있었다.
칼리스는 제 손등을 덮은 레이나의 따뜻한 감각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비틀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레이나가 판을 깔아두었으니 기꺼이 방관자가 되어 주겠다는 묵직한 신뢰의 표시였다. 대공의 묵인 아래, 묘한 공조 수사 관계가 형성된 순간이었다.
레이나는 칼리스의 손을 아쉽게 놓아주고는, 남작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세상에서 가장 가식적이고 우아한 미소가 장착되어 있었다.
“남작부인님. 대대로 대공가에 훌륭한 정령사들을 공급해 오신 명문가의 수장이시니, 아기 용의 생리적 특성에 대해서는 저 같은 길바닥 출신보다 훨씬 더 해박하시겠지요?”
“흥! 당연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애송이 정령사 년이 감히 내 지식을 시험하려 드느냐?”
남작부인은 턱을 더 치켜들며 콧방귀를 뀌었다.
레이나는 품 안의 리온을 아기 침대에 아주 조심스럽게 눕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을 꺼내 들었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가죽 수첩으로 보였지만, 레이나의 손끝이 수첩 표지를 톡톡 두드릴 때마다 미세한 마력의 파동이 방 안을 훑었다.
“그럼 아주 당연한 질문을 하나 드리죠. 리온 전하께서 최근 앓고 계시던 미세한 피부염의 원인을 남작부인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피, 피부염? 그야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한 마수의 고질적인 질환일 뿐이다! 온갖 영초를 달여 먹여도 낫지 않는 것을 어찌 나에게 묻느냐!”
“틀렸습니다.”
레이나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수첩의 페이지를 펄럭 넘기며, 수치화된 통계 자료를 읽어 내려가듯 또박또박 읊조렸다.
“이 수첩에 기록된 전하의 마력 포화도 분산 차트에 따르면, 전하의 피부 트러블은 단순한 체질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남작부인께서 처방하신 ‘영초의 과다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이지요. 게다가 그 부작용을 극대화하고, 전하의 체내 냉기 마력을 강제로 빨아들이는 특정 고대 아티팩트가 반경 5m 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릴……!”
남작부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참 신기하지 않나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리온 전하를 둘러싼 마력 흐름이 아주 안정적이었는데, 남작부인께서 이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자마자 대공저의 냉기 마정석 결계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기 시작했거든요.”
레이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남작부인이 쥐고 있는 레이스 손수건과 그녀의 화려한 벨벳 드레스 주머니 쪽을 빤히 응시하며 낮게 속삭였다.
“그 유해한 골동품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모양이에요. 전하의 마력을 갉아먹으며 제 배를 불리는 아주 탐욕스러운 도둑 말입니다.”
“이, 이 사기꾼 년이 감히 누구더러 도둑이라는 게냐! 전하! 당장 저 미친년의 목을 베어 버리십시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저를 음해하고 있습니다!”
남작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그녀는 칼리스를 바라보며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지만, 칼리스는 싸늘한 아우라를 풍기며 그저 팔짱을 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레이나의 정연한 논리에 감탄한 듯한 이채가 서려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하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정말 남작부인님이……?” “쉿, 조용히 해. 큰일 날라구.”
주변의 의심 어린 눈초리가 자신에게 쏠리자, 남작부인은 다급하게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더는 이따위 모욕을 견딜 수 없으니 나는 물러가겠소! 전하, 부디 저 요물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십시오!”
그녀가 쫓기듯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스윽.
레이나의 손이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작부인의 화려한 벨벳 소맷자락을 단단하게 낚아챘다.
탁!
“앗……! 무슨 짓이냐, 이 천한 것이!”
남작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팔을 흔들었지만, 레이나의 손아귀 힘은 정령사의 힘을 실어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레이나는 남작부인의 귓가에 닿을 듯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장난기 가득하지만 뼛속까지 시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작부인님. 주머니 깊은 곳에 몰래 숨겨 도망치려던 대공가의 비보, ‘겨울의 숨결’을 이 자리에서 직접 꺼내 볼까요? 아니면 제 손으로 꺼내 드릴까요?”
남작부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시며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 이것 놓지 못해! 감히 대공가의 귀한 손님 몸에 손을 대다니, 무엄하다!”
남작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바동거렸다. 표독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레이나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남작부인의 손목을 쥔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었다.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짬밥이 몇 년인데, 이까짓 앙탈에 밀릴 리가 없었다.
“무엄한 건 제가 아니라 남작부인님이시죠. 대공가의 보물을 품에 훔쳐 가려 하셨으니 말이에요.”
“헛소리 마라! 증거도 없이 나를 모함하는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증거요? 여기 있잖아요.”
레이나는 남작부인이 옷자락을 빼내려 허둥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작부인의 실크 코트 안쪽 주머니를 향해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스르륵, 스르릉.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레이나의 손끝에 단단하고 지독하게 차가운 감촉이 걸려들었다. 레이나가 손을 밖으로 쑥 빼내자, 방 안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으로 쏠렸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영롱한 파스텔블루와 은은한 라벤더빛 냉기를 가득 머금은 정교한 크리스탈 병이었다. 병 안에는 마치 얼어붙은 눈꽃송이들이 살아 움직이듯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결정들이 뿜어내는 차가운 빛깔은 아늑한 아기방을 순식간에 몽환적인 겨울 정원처럼 바꾸어 놓았다.
“어머나, 참 예쁘기도 해라. 이게 바로 대공가의 비보이자 보물창고 깊숙이 봉인되어 있어야 할 고대 아티팩트, ‘겨울의 숨결’이군요?”
레이나가 크리스탈 병을 가볍게 흔들며 생긋 웃었다. 찰랑거리는 은빛 가루가 병벽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남작부인님. 이 귀한 보물이 왜 부인님의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까요? 설마 보물창고가 너무 추울까 봐 부인님의 따뜻한 품으로 녹여주고 계셨던 건 아니겠죠?”
“……!”
남작부인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은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이내 흙빛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등 뒤에 서 있던 하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하며 뒤로 웅성웅성 물러섰다. 대공가의 아티팩트를 훔치는 것은 단순한 절도가 아니라, 가문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자 선전포고였다.
지독한 침묵 속에서, 칼리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주변으로 살기등등한 빙한의 마력이 뿜어져 나와 바닥을 서서히 얼려 나갔다.
“남작부인.”
낮게 가라앉은 칼리스의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무겁게 울렸다.
“그것이 왜 그대의 품에서 나오는지, 내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보아라.”
“전, 전하! 이것은 모함입니다! 저 요사스러운 유모 년이 제 주머니에 몰래 집어넣은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결단코—!”
“기사단장.”
칼리스는 남작부인의 비굴한 변명을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철갑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엘가 남작부인을 즉시 지하 감옥에 투옥하라. 가문의 비보를 약탈하고 후계자를 위해해 가문을 전복하려 한 죄를 엄중히 물을 것이다. 아울러 남작부인의 가문 전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도록.”
“전하! 전하—! 대공가에 정령사를 공급해 온 우리 가문을 이렇게 대접하시면 안 됩니다! 전하—!”
남작부인은 기사들의 억센 손길에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핏대를 세우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칼리스의 시선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쾅! 하고 문이 닫히며 시끄러운 소음이 마침내 멀어지자, 방 안은 비로소 고요를 되찾았다.
“후우…….”
상황이 정리되자 레이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해꾼을 멋지게 한 방 먹여 쫓아낸 기쁨도 잠시, 갑자기 심장 부근에서부터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앗, 이 느낌은……!’
[경고! 아기 용의 마력 정화 부작용으로 체내 마력 역류가 시작됩니다.] [경고! 현재 체온 39.8도. 마력 폭주 및 영혼 연소 위험도: 경고 단계!] [생존을 위해 즉시 차가운 얼음 마력과의 접촉(스킨십)을 시도하십시오!]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시스템의 붉은 경고음과 함께, 레이나의 하얀 이마 위로 땀방울이 배어 나왔다. 숨결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뺨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은 살구빛 홍조로 물들었다. 몸 안의 뼈마디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열병이었다.
동시에, 레이나의 왼쪽 눈가 주위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피부 밑에서부터 스르륵 피어오른 붉은 마력이 정교하고 화려한 불꽃 나비 문양을 그리며 일시적으로 떠올랐다. 마치 어둠 속에서 붉은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듯, 찬란하고도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문양이었다.
“……유모?”
칼리스가 그녀의 급격한 변화를 눈치채고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레이나의 눈가에 새겨진 붉은 불꽃 나비 문양을 포착한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내려앉았다. 평생 차가운 얼음 성벽 뒤에 갇혀 살던 그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리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레이나에게는 지금 남주의 심쿵 모먼트를 감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당장 타 죽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살아야 해……! 내 소중한 목숨줄……!’
레이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하고 듬직한 ‘인간 냉장고’를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석.
그녀의 뜨거운 손가락이 칼리스의 탄탄한 가슴팍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북부의 서리를 가득 머금은 그의 코트가 닿자마자, 타오르던 열기가 찌릿하게 식어가는 극상의 쾌감이 전신을 관통했다.
“하아…….”
황홀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레이나는 칼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눈가의 붉은 나비 문양이 그녀의 거친 숨결에 맞춰 더욱 찬란하게 명멸했다.
“전하…… 계약 조항 첫 번째, 기억하시죠?”
“……뭐?”
칼리스가 당황한 듯 낮게 신음했지만, 레이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손바닥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에 닿자, 전율 같은 시원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지금 당장 급속 냉각이 필요합니다. 1분간 이대로 꼼짝 말고 계셔 주셔야겠습니다. 이건 엄연한 비즈니스 계약 이행이니까요.”
당당하고도 뻔뻔하게 자신을 ‘냉각기’ 취급하는 유모의 눈빛을 마주하며, 대공 칼리스의 얼굴이 난생처음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