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끝이 닿는 목덜미 위로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레이나의 입꼬리는 흐트러짐 없이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다치지 않을 만큼 아주 미세한 힘을 주어,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칼날 끝을 검지손가락으로 툭 밀어냈다. 서슬 푸른 칼날이 스스륵 옆으로 비껴갔다.
창밖으로 스며든 레몬 빛의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아기 침대의 연분홍빛 캐노피 위로 몽글몽글 내려앉아 있었다. 이 평화롭고 달콤한 파스텔톤의 방 안에서, 오직 칼리스 대공의 붉은 눈동자만이 지옥의 심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칼리스의 목소리는 벼랑 끝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처럼 낮고 차가웠다.
"비즈니스 계약을 제안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공 전하."
레이나는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며 생긋 웃었다. 길거리 고아 출신으로 굴러먹던 시절, 그녀가 뼈저리게 배운 생존 법칙이 있었다. 강자 앞일수록 꼬리를 내리는 대신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
"미쳤군. 가짜 정령사 년이 마침내 머리까지 돌아버린 모양이지. 네까짓 게 감히 나와 거래를 논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방금 전하께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셨을 텐데요."
레이나가 턱끝으로 아기 침대를 가리켰다.
침대 안에서는 조금 전까지 대공저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기세로 폭주하던 아기 용, 리온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새근새근 단잠에 빠져 있었다. 몽실몽실한 뺨을 웅냥냥 실룩거리며, 꼬리 끝을 살랑거리는 모습은 천사 그 자체였다.
칼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북부의 대마법사들과 고위 사제들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진정시키지 못했던 폭주였다. 그런데 이 신원 미상의 유모가 손을 얹자마자 단 몇 분 만에 마력이 완벽하게 정화되었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 우연이 앞으로도 계속될지, 아니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는 제 손에 달려 있죠."
레이나는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자신만의 특별한 아티펙트, '정령 치유 관리 수첩'을 꺼내 들었다. 칼리스의 눈에는 그저 낡고 평범한 가죽 수첩으로 보이겠지만, 레이나의 시야에는 수첩 위로 투명하고 푸르스름한 홀로그램 상태창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대상: 리온 (아기 용)] [마력 포화도: 12% (안정)] [스트레스 지수: 15% (매우 양호)] [특이 사항: 이마 중앙에 미세한 마력 응집 및 가려움증 발생]
레이나는 아기 침대맡으로 다가가 이불을 살포시 걷어 올렸다. 그리고 리온의 보들보들한 앞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도련님의 이마를 보십시오."
칼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리온의 새하얗고 말랑한 이마 한가운데, 아주 미세하고 까만 점 같은 뿔이 돋아나 있었다. 크기는 좁쌀만 했지만, 그 주변으로 검푸른 마력의 잔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부스럼이 아니군."
"맞습니다. 고대 흑룡의 마력이 정체되면서 발생한 일시적 응집 현상이에요. 아주 가렵고 따가울 겁니다. 아기들은 몸이 불편하면 마력을 폭주시켜 표현하죠. 전하께서 아무리 대단한 얼음 마법으로 억누른들, 근본적인 불꽃을 꺼뜨리지 못하면 도련님의 심장은 머지않아 안쪽에서부터 타들어 갈 겁니다."
레이나는 수첩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칼리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제 정령 치유 지침을 따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수치화된 정량적 마력 제어를 통해, 리온 도련님의 폭주 주기와 스트레스를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어요. 단언컨대, 제가 유모로 있는 한 윈터할 가문의 후계자 생존율은 기존보다 300% 이상 늘어날 겁니다."
"300%라니. 허풍이 과하군."
"허풍인지 아닌지는 계약서를 작성해 보면 알 일이죠."
칼리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세상을 벌벌 떨게 만드는 괴물 대공인 자신을 앞에 두고, 이토록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목조목 이득을 따지는 여자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보통은 제 얼굴만 봐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목숨을 구걸하기 마련이거늘.
"재미있군. 그렇다면 그 대단한 계약의 조건이 뭔지 들어나 보지. 네가 원하는 게 돈인가? 신분 상승?"
"아뇨. 아주 소박하고 물리적인 겁니다."
레이나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칼리스의 단단한 체구를 훑었다.
정확히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뼈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얼음 마력을 탐색하고 있었다.
방금 전 리온의 마력을 정화한 대가로, 레이나의 체내에서는 이미 뜨거운 열병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서서히 끓어오르는 감각. 이 상태로 몇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말 그대로 안에서부터 타 죽고 말 터였다.
살기 위해서는 이 눈앞의 걸어 다니는 초고성능 냉장고가 반드시 필요했다.
"계약 조항 첫 번째."
레이나가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저는 하루에 최소 세 번, 전하와의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필요합니다."
"……뭐?"
칼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 번 접촉할 때마다 최소 30초 이상, 손을 맞잡거나 포옹을 하는 등의 피부 접촉을 요구합니다. 장소는 구애받지 않으나, 제 체온이 위험 수치에 도달했을 때는 전하께서 만사를 제쳐두고 제 곁으로 오셔야 합니다."
"지금 나를 상대로 희롱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희롱이라니요.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체온 정화' 작업입니다."
레이나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온 도련님의 마력을 흡수해 정화할 때마다, 제 몸에는 그 대가로 치명적인 마력 역류 열병이 쌓입니다. 이걸 식힐 수 있는 유일한 극약 처방이 바로 전하의 빙한 마력뿐이에요. 즉, 전하와의 스킨십은 제 생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정산 절차인 셈입니다."
그녀의 눈빛에는 그 어떤 사사로운 흑심도, 수줍음도 없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듯 철저하게 계산된 비즈니스적 요구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칼리스는 기가 막혔다. 자신의 파괴적인 빙한 마력은 닿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살을 얼려 터뜨리는 극독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황홀한 표정으로 제 손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예 하루 세 번 정기적으로 자신을 '냉각기' 삼아 쓰겠단다.
"내가 거절한다면?"
"그럼 저도 파업입니다. 도련님이 다시 마력을 폭주시켜 대공저를 홀랑 태워 먹든 말든, 저는 제 몸 하나 보전하기 위해 이 성을 나갈 수밖에요."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 호의도,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 오직 서로의 필요에 의한 계약만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관계를 만든다. 길바닥에서 배운 방어 기제가 그녀를 당당하게 만들고 있었다.
칼리스는 한참 동안 레이나를 쏘아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계산과 의구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그가 차디찬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좋다. 계약을 수락하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대공 전하."
레이나가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서 미리 작성해 둔 계약서 양식을 꺼내 들었다. 깃펜을 건네받은 칼리스가 거침없는 필체로 서명을 남겼고, 레이나 역시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어 넣었다.
두 사람의 서명이 완료된 순간.
파아앗!
레이나의 시야에 화려한 민트색 빛무리가 은하수처럼 방 안을 가득 수놓으며 하얀 팝업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띵동! 계약이 정식 체결되었습니다!] [업적 달성: '괴물 대공가의 계약직 유모' 타이틀 획득!] [보상: 생명력 포인트 +10점 정산 완료!] [시스템 알림: 계약 효과로 인해 레이나 헤이즐의 최대 마력 총량이 1.5배 확장됩니다. 열병 저항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머릿속이 쨍하게 맑아지며 전신을 감돌던 묵직한 피로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살았다……! 무려 10포인트라니, 이걸로 수명이 한 달은 더 늘어났어!'
레이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성취감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세상을 지배하는 대공을 상대로 완벽한 갑(甲)의 계약을 따낸 순간이었다.
그녀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며 계약서를 소중하게 품에 안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아기 침실의 두꺼운 참나무 문이 부서질 듯한 굉음과 함께 거칠게 열렸다.
"대공 전하!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입니까!"
사납고 음험한 눈빛을 번뜩이며, 화려한 벨벳 드레스 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는 여인—엘가 남작부인이 하인들을 등 뒤에 거느린 채 기세등등하게 방 안으로 난입했다.
"대공 전하!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입니까!"
사납고 음험한 눈빛을 번뜩이며, 화려한 벨벳 드레스 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는 여인—엘가 남작부인이 하인들을 등 뒤에 거느린 채 기세등등하게 방 안으로 난입했다.
그녀의 등 뒤로 우르르 몰려온 시종들의 손에는 차가운 쇠사슬과 포박용 밧줄이 들려 있었다. 레이나를 당장이라도 지하 감옥에 쳐넣겠다는 노골적인 적의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엘가 남작부인. 허락도 없이 내 후계자의 방에 무단 침입한 무례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칼리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의 주위로 파르스름한 얼음 성에가 바닥을 타고 순식간에 뻗어 나갔다.
하지만 엘가 남작부인은 기가 죽기는커녕, 제 품에 안고 온 화려한 양장본 서류를 과시하듯 내밀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전하! 저 사기꾼 년의 감언이설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길바닥 출신의 비천한 평민 년이 감히 대공가의 유모 자리를 꿰차다니요! 가문 대대로 정령사를 공급해 온 저희 엘가 가문을 모욕하시는 처사입니다!"
남작부인의 뾰족한 손가락이 레이나를 정확히 겨냥했다.
"게다가 방금 전, 저 천한 것이 전하의 손목을 잡고 해괴한 주술을 부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감히 대공 전하의 옥체에 손을 대다니, 이는 명백한 불경죄이자 대공가를 무너뜨리려는 제국 첩자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쿵, 쿵, 쇠사슬이 바닥에 부딪히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남작부인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방 안의 다른 시종들도 마른침을 삼키며 레이나를 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위기. 보통의 평민 여자라면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리라.
하지만 레이나는 오히려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릴 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첩의 비즈니스 계산기가 째깍째깍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음, 어쩐지 굴러들어 온 돌 취급을 하더라니. 밥그릇 싸움이었네?'
가문 대대로 대공가에 정령사를 독점 납품하며 막대한 이권을 챙겨왔을 엘가 남작부인이다. 그런데 웬 굴러들어 온 뼈다귀 같은 평민 유모가 아기 용의 폭주를 완벽하게 잠재웠으니, 밥줄이 끊길까 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레이나는 슬그머니 수첩의 화면을 '마력 투시 모드'로 전환했다.
[위잉— 대상: 엘가 남작부인] [마력 반응: 미세한 정령 마력 보유 (정화율 5% 미만)] [특이 사항: 품 안의 은밀한 주머니에서 정체불명의 고대 유물 마력이 감지됨. (마력 파장: '겨울의 숨결'과 일치율 89%)]
'어라? 저 여자가 왜 대공가의 보물창고에 있어야 할 아티팩트 마력을 풍기고 있지?'
수첩에 뜬 붉은색 경고등을 본 레이나의 입가에 솜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살벌한 미소가 걸렸다. 꼬투리를 잡아도 아주 제대로 잡은 셈이었다.
"남작부인. 제가 사기꾼인지 아닌지는, 그쪽이 데려온 어중이떠중이 사제들의 말보다 리온 도련님의 상태가 더 잘 증명해 줄 텐데요?"
레이나는 아기 침대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가, 곤히 자고 있는 리온을 품에 폭 안아 올렸다.
살구색 실크 이불에 싸인 아기 용은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레이나의 따뜻한 품에 뺨을 비벼댔다. 웅냥냥,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며 레이나의 목덜미를 꼭 껴안는 모습은 한 폭의 파스텔톤 그림 같았다.
"보시다시피, 도련님은 제 품에서 가장 안정적이십니다. 남작부인께서 데려오신 정령사들이 관리할 때는 매일같이 불바다가 되었던 방이, 지금은 참 조용하지 않나요?"
"그, 그건 주술이다! 사악한 미약이라도 먹여 도련님의 정신을 흐려놓은 게 분명해!"
엘가 남작부인이 펄펄 뛰며 소리쳤다.
"전하! 당장 저 요망한 년을 끌어내어 고문해야 합니다! 감히 윈터할의 핏줄을 인질로 잡고 장난질을 치다니요!"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칼리스의 목소리가 방 안의 온도를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뜨렸다. 서슬 퍼런 살기에 남작부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칼리스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남작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나 헤이즐은 방금 전 나와 정식 유모 계약을 맺었다. 그녀의 신분과 안전은 이 칼리스 윈터할이 보증한다."
"전하! 어찌 저런 근본 없는 평민 년을 믿으십니까!"
"내 눈으로 직접 정화 능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네가 추천한 자들이 리온의 폭주를 막지 못해 성벽이 무너질 뻔했을 때, 너희 엘가 가문은 무엇을 했지? 변명만 늘어놓지 않았나?"
칼리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남작부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칼리스의 시선이 남작부인의 풍성한 드레스 품 안으로 향했다. 순간, 남작부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남작부인. 네 품 안에 숨겨둔 그것은 무엇이지?"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서류일 뿐……."
"거짓말 마십시오."
레이나가 쐐기를 박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수첩의 정령 감지 센서가 똑똑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남작부인의 드레스 안쪽 주머니, 대공가의 보물창고에서만 흘러나올 수 있는 고대 아티팩트 '겨울의 숨결' 마력이 아주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거든요."
"무, 무슨 미친 소리를! 내가 왜 그런 짓을……!"
남작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품을 움켜쥐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확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칼리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살기등등하게 변했다.
"기사단장을 불러라. 엘가 남작부인의 몸수색을 실시하고, 만약 단 한 방울의 가문 아티팩트라도 발견된다면 즉시 반역죄로 다스리겠다."
"전하! 오해이십니다! 전하—!"
남작부인은 비명을 지르며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레이나를 향해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이빨을 갈았다.
"두고 보자, 이 교활한 년……! 네가 감히 내 앞길을 막아서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남작부인은 기사들이 들이닥치기 전, 쫓기듯 방을 빠져나갔다. 성가신 파리가 꺼지자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레이나는 품에 안긴 리온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벽해. 방해꾼도 치웠고, 계약서도 무사히 받아냈으니 이제 내 목숨줄은 당분간 안전하네.'
"후우, 드디어 조용해졌군요."
레이나가 긴장이 풀린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를 정리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단단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손길이 레이나의 가느다란 손목을 덥석 낚아챘다.
"앗……!"
놀란 레이나가 고개를 들자, 코앞까지 다가온 칼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체온이 닿는 순간, 전신을 감돌던 미세한 열기가 다시 한번 찌릿하게 정화되는 감각이 일었다.
"전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칼리스는 레이나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계약 조항 첫 번째를 잊지 않았겠지, 유모."
"예?"
"하루 세 번, 직접적인 신체 접촉. 장소는 구애받지 않는다."
그의 긴 손가락이 레이나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단단히 맞잡았다. 완벽한 깍지였다.
칼리스의 얼굴이 붉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숨결이 레이나의 입술 끝에 닿을 듯 흩날렸다.
"방금 전 일로 내 손을 놓쳤으니, 지금부터 첫 번째 접촉을 시작하지. 30초 동안 꼼짝 말고 서 있어라."
예상치 못한 대공의 저돌적인 계약 이행에, 철저한 비즈니스주의자였던 레이나의 심장이 난생처음으로 쿵, 하고 크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