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화르륵!

사방이 온통 오렌지빛 불꽃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민트색과 연분홍색이 아기자기하게 칠해져 있던 사방의 벽지는 이미 까맣게 그을려 재가 되어 내리는 중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뺨을 훅 스치고 지나갔다. 매캐한 연기가 허파 깊숙이 밀려들자 숨이 턱 막혔다.

콜록, 콜록!

"이게 대체 무슨……."

목구멍을 찢는 듯한 기침을 뱉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나는 허름한 단칸방에서 지독한 한기에 떨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스물네 살, 정령 힐러로서의 삶이 시한부 판정으로 허망하게 끝나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뜨겁고, 또 화려한 방에 누워 있는 걸까.

"갸아아앙!"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우렁찬 울음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날개를 파닥이는 아기 용이 있었다. 꼬리에 앙증맞은 파스텔 핑크빛 리본을 매단 녀석은, 꼬리를 흔들 때마다 사방으로 불꽃 똥을 흩뿌리고 있었다. 녀석의 콧구멍에서 시뻘건 화염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방 안의 가구들이 처참하게 불타올랐다.

그제야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레이나 헤이즐.’

제국의 북부를 지배하는 괴물 대공가, 윈터할 가문에 갓 입사한 말단 유모. 그리고 눈앞에서 앙칼지게 날뛰는 저 아기 용은 대공의 조카이자 고대 용의 후예인 리온이었다.

문제는 이 소설 속에서 레이나 헤이즐이라는 인물이 리온의 첫 폭주를 막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타 죽는 비참한 단역이라는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 겨우 빙의했는데 시작하자마자 통구이가 될 순 없어!’

살아야 했다. 길바닥에서 썩어 가던 목숨을 기적적으로 다시 얻었는데, 이대로 허무하게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리온이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녀석의 통통한 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다음 순간 뿜어져 나올 화염은 이 방뿐만 아니라 나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전생에서 지겹도록 다루었던, 그러나 한계가 명확했던 정령 치유 마력을 쥐어짜 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순간이었다.

띠링!

머릿속에서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눈앞의 허공에 반짝이는 파스텔블루 빛의 홀로그램 책자가 스르륵 펼쳐졌다.

[‘정령 치유 관리 수첩’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환수 정보 파악 중…….] - 대상: 아기 용 리온 (성장기) - 스트레스 지수: 95% (폭주 위험!) - 마력 포화도: 98% (임계점 도달) - 정서 상태: 극도의 불안, 분노, 가려움증

[※ 경고: 3분 이내에 대상을 정화하지 못할 경우, 방 내부의 생명체는 전원 소멸합니다.] [치유 성공 시, 정산 기준에 따라 ‘생명력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수첩의 투명한 페이지 위로 실시간으로 요동치는 붉은색 그래프가 그려졌다.

"치유 관리 수첩……? 정산?"

황당한 안내였지만 머리는 차갑게 굴러갔다. 길거리 고아로 자라나며 뼈에 새긴 생존 공식이 있었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고, 세상은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로 돌아간다는 것.

눈앞의 이 기묘한 수첩은 나에게 제안을 건네고 있었다. 아기 용을 치료하면 생명력을 주겠다는, 아주 공평하고 매력적인 비즈니스 계약을.

"좋아, 거래 성립이야."

레이나는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손끝을 가볍게 튕기자, 손가락 사이로 봄날의 새싹을 닮은 연두색 정령 마력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달콤한 솜사탕 향기가 사방의 매캐한 탄내를 덮어 가기 시작했다.

"도련님, 이리 오세요."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리온에게 다가갔다. 리온은 갑자기 다가오는 낯선 마력에 경계하듯 갸르릉거리며 짧은 앞발을 휘둘렀다.

피하면 끝장이다. 레이나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굴러 리온의 바로 앞까지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녀석의 작고 말랑한 머리 위로 연두색 마력이 깃든 손을 살포시 얹었다.

"아구, 힘들었지? 뜨거운 마력이 몸속에서 부딪치니까 아파서 그랬구나."

따스한 치유의 힘이 리온의 정수리를 타고 흘러 들어갔다. 폭주하던 붉은 마력이 정령의 싱그러운 온기에 부딪혀 하얀 김을 내뿜으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실시간 정산 진행 중…….] [리온의 스트레스 지수: 95% → 80%] [마력 포화도: 98% → 75%]

효과가 있었다. 리온의 콧구멍에서 흘러나오던 불씨가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다. 녀석의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에 서려 있던 광기가 걷히고, 몽롱한 빛이 감돌았다.

"뀽……?"

"착하지, 우리 아기. 조금만 더 참자."

레이나는 손끝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온몸의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붓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완벽한 결과물이야말로 협상 테이블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법이니까.

화르륵 타오르던 방 안의 불길들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은 어느새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분홍빛 연기가 되어 창문 밖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마침내, 리온의 황금빛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뀨우……."

자그마한 울음소리와 함께 리온이 레이나의 품 안으로 툭 쓰러졌다.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아기 용의 무게가 가슴팍에 기분 좋게 얹혔다.

동시에 눈앞의 수첩에 초록빛 체크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정화 성공!] [리온의 스트레스 지수: 40% (안정)] [마력 포화도: 35% (정상)]

[★ 첫 정화 퀘스트 완료 보상 정산 ★] - 기본 생명력 지급: +3일 - 현재 잔여 수명: 3일 12시간 30분

"살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늘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목숨줄에 드디어 유통기한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기쁨을 만끽할 시간은 지독하리만치 짧았다.

"윽!"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통이 찾아왔다. 들이쉬는 숨결마다 허파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 경고: 용의 마력을 정화한 대가로 체내에 ‘마력 역류(열병)’가 발생합니다.] [현재 체온: 39.8℃ (지속 상승 중)] [해독하지 않을 경우, 1시간 이내에 장기 손상으로 사망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미친……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제약이 너무 세잖아!"

비틀거리며 방 한구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전신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레이나의 안색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왼쪽 눈가 주변의 살결 위로 화려하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불꽃 나비 문양이 선명하게 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뜨거운 인장을 새겨 넣은 것처럼 붉은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일렁였다.

"하아, 하아……."

체온이 40도를 넘어선 것이 분명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대로라면 정화고 뭐고 열에 뇌가 녹아 죽을 판이었다.

쿵!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방 문이 거칠게 부서져 내렸다.

매서운 얼음바람이 방 안으로 거세게 몰아쳤다. 콜록이며 고개를 들자, 문가에 우뚝 선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칼리스 von 윈터할 대공.

일 년 내내 눈보라가 치는 북부 영지의 지배자이자, 세계관 최강의 얼음 마법 검사.

그의 주위로 서슬 퍼런 푸르스름한 얼음 마력이 칼날처럼 윙윙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을린 바닥 위로 새하얀 서리가 쩍쩍 갈라지며 얼어붙었다.

칼리스의 무감하고 차가운 벽안이 방 안을 쓸어내렸다. 품에 잠든 리온과, 붉게 달아오른 채 숨을 헐떡이는 레이나를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스릉.

그가 허리춤에서 푸른 마정석이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지독한 한기가 검신을 타고 흘러나왔다.

"리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려 버릴 듯 내리눌렀다.

"침입자인가. 아니면 쥐새끼처럼 스파이라도 보낸 건가."

칼리스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날카로운 검끝이 레이나의 가느다란 목덜미 바로 앞에 닿았다. 닿지도 않았는데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릿발 같은 냉기에 목줄기가 아릿하게 저려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 숨 막히는 살기와 공포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나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계산을 끝마친 상태였다.

‘얼음…… 극강의 얼음 마력.’

칼리스가 다가올수록, 그의 주위로 휘몰아치는 지독한 냉기가 느껴질수록, 이상하게도 타들어 가던 가슴속 열기가 조금씩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 뜨거운 열병을 식혀줄 우주 유일의 냉각제.

바로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오만하고 잘생긴 대공 전하가 바로 그 완벽한 ‘얼음 냉장고’였다.

"하아……."

레이나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오히려 칼리스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목에 닿기 직전인 검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뭐 하는 짓이지?"

칼리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레이나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끝이, 칼리스가 검을 쥐지 않은 반대편 손목을 향해 날아갔다.

텁!

"……!"

칼리스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손목을 비틀어 피하려던 칼리스였지만, 살고자 하는 레이나의 악력은 초인적이었다. 레이나는 그의 단단하고 차가운 손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치이이익!

마치 뜨거운 달궈진 철판에 얼음을 들이부은 듯한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닿는 순간, 찌릿찌릿한 급속 냉각 마력이 레이나의 손끝을 타고 온몸의 혈관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전신을 좀먹던 타오르는 열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머리가 맑아지고, 타들어 가던 가슴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시원하게 정화되었다.

"하아…… 살았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황홀한 탄성을 내뱉으며 칼리스의 손목을 조금 더 깊숙이 움켜잡았다. 차갑고 단단한 그의 피부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느껴졌다.

반면, 칼리스는 난생처음 겪는 기묘한 감각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파괴적인 빙한 마력은 보통의 인간이 닿으면 살점이 얼어 터지는 치명적인 극독이었다. 그런데 이 가녀린 여자는 제 마력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히려 안도 섞인 미소를 지으며 제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왼쪽 눈가에 일렁이는 저 붉은 나비 문양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칼리스는 혼란을 감추기 위해 더욱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칼날 끝을 레이나의 목구멍 바로 한가운데에 들이밀었다. 조금만 밀어 넣어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거리였다.

"손 치워라. 불경죄로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다면."

살을 에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레이나는 이미 열병이 완벽하게 가라앉아 이성을 완전히 되찾은 상태였다.

그녀는 칼리스의 단단한 손목을 쥔 채, 반대쪽 손의 검지손가락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겨누고 있는 서슬 퍼런 검날 끝을 팅, 하고 당돌하게 옆으로 밀어냈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레이나는 붉은 기운이 가신 맑은 눈동자로 칼리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입가에 비즈니스맨 특유의 야무지고 매혹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공 전하. 가문에 단 하나뿐인 후계자를 살려둔 은인에게 칼부터 들이미는 건 일류 가문의 교양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만."

"뭐라? 은인?"

"예. 그리고 저는 공짜로 일하는 취미가 없어서 말이죠."

레이나는 칼리스의 손목을 잡은 손에 슬며시 힘을 주며, 그 얼굴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살인보다 훨씬 더 서로에게 이득이 될 만한 화끈한 계약을 제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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