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걸로 끝인가."

서른 살. 만년 백업 세터 백승우에게 남겨진 것은 땀에 젖은 무릎 보호대와 세 번의 수술로 걸레짝이 된 왼쪽 어깨뿐이었다.

실패했다. 세계 최정상의 무대에서 코트를 지배하겠다던 청춘의 오만한 다짐은,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마취 가스와 함께 기화되어 사라졌다. 구단 사무실에서 내밀어 준 은퇴 합의서의 종이 질감은 유독 바스락거렸고, 펜을 쥔 손가락끝은 보잘것없이 떨렸다. 어깨 관절막이 완전히 파열되어 뼈와 뼈가 직접 맞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던 그 마지막 순간, 승우는 눈을 감았다. 더는 배구공의 차가운 가죽 감촉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아주 잠깐, 비참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웅웅거리는 이명.

기분 나쁘게 고막을 긁어대는 웅웅거림 뒤로, 찌르는 듯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끼이익, 끽!

체육관 마룻바닥에 고무 밑창바닥이 사정없이 긁히는 소리였다. 찌든 땀 냄새와 오래된 왁스 향이 한꺼번에 콧구멍을 찔렀다. 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는 수은등 불빛 아래, 승우는 들이마신 숨을 컥 하고 토해냈다.

"야! 백승우! 넋 놓고 안 서 있어? 공 온다고!"

칼칼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등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승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아 빠진 붉은색 유니폼. 가슴팍에 조잡하게 새겨진 글자는 '태성고등학교'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 걸린 사내, 넓은 어깨를 건들거리며 땀을 훔치고 있는 녀석은 고교 시절 태성고의 날개 공격수, 천다원이었다.

'천다원?'

그는 이미 대학교 진학 후 무릎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조그만 체육관을 차렸을 텐데. 왜 이 녀석이 고등학교 시절의 앳된 얼굴을 하고 제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거지?

"어이, 백승우. 듣고 있어? 서브 들어온다니까!"

천다원의 눈빛에는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었다. 입꼬리를 비틀어 쥐며 짓는 그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 그것은 승우가 가장 혐오하던 과거 태성고 배구부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지는 것이 당연하고, 이기려는 노력조차 성가셔하는 낙오자들의 눈빛.

탁!

네트 너머에서 둔탁한 타구음이 들렸다. 노란색과 청색이 뒤섞인 배구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태성고의 코트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공의 회전축이 비뚤어진 구질구질한 플로터 서브였다.

"리시브!"

후방에 서 있던 리베로 이지한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공은 그의 손목 안쪽에 빗맞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튄 공은 세터가 언더핸드로 간신히 걷어 올려야 할 정도로 네트에서 한참 떨어진 어중간한 위치, 즉 어택 라인 뒤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 진짜 리시브 꼬락서니 하고는."

천다원이 발을 떼며 낮게 읊조렸다. 그는 이미 공격할 의지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대충 팔만 뻗어 넘기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 불성실한 가속 러닝. 도약 동작으로 들어가는 그의 무릎 각도는 고작 120도에 불과했다. 상체를 제대로 젖히지도 않은 채 껑충 뛰려는 시늉만 하려는 짓거리였다.

그 게으른 움직임을 목도한 순간, 승우의 뇌리에서 무언가가 찌르르하고 불꽃을 튀겼다.

[시스템 동기화 완료.] ['코트의 지배자' 시스템을 각성합니다.]

쩌적, 하는 환청과 함께 승우의 시야가 기이할 정도로 투명해졌다.

시간의 흐름이 0.1초 단위로 쪼개지며 극도로 느려졌다. 공중에 떠 있는 배구공의 공기 마찰 계수와 낙하 궤적이 푸른색 실선으로 안구에 매핑되기 시작했다. 네트 너머 상대 블로커들의 도약 최고점과 이동 반경이 반투명한 3차원 그리드로 코트 바닥을 채웠다.

그리고 승우의 망막 위에 붉은색 수치들이 둥둥 떠올랐다.

[대상: 천다원 (WS)] [현재 도약 출력: 68%] [예상 도약 최고점 타점: 302cm (최대 한계치: 325cm)] [상태: 의지 저하, 집중력 분산, 불성실한 오프더볼 움직임]

승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서른 살의 백승우가 가지지 못했던 완벽한 신체와, 0.1초의 틈새까지 시각화하는 초자연적인 예측력. 이 두 가지가 결합하는 순간,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독선적인 갈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대충 때리겠다고?'

배구는 세터의 손끝에서 시작해 세터의 손끝에서 끝나는 스포츠다. 공격수는 단지 세터가 설계한 궤적을 실행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승우는 아군을 위로하고 조율하는 다정한 사령관 따위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도구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쥐어짜 내서라도 부려 먹으면 그만이었다.

"천다원."

승우의 목소리는 체육관의 소음을 뚫고 갈라질 듯 차갑게 내리꽂혔다.

"죽어라 뛰어."

"뭐?"

천다원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승우는 뒤로 흐르는 공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

보통의 세터라면 이 상황에서 공의 아래로 들어가 높은 루프 토스를 올려 공격수에게 시간을 벌어다 주었을 것이다. 안전하게, 공격수가 처리하기 편하게 만드는 타협적인 패스. 하지만 승우는 타협을 거부했다.

그는 어깨를 집어넣으며 공의 낙하 지점보다 한 발자국 앞서 도약했다. 공중에서 몸을 비트는 서스펜디드 셋업(Suspended Setup) 자세. 몸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자세였지만, 안구에 매핑된 푸른색 궤적선은 승우에게 완벽한 손목 각도를 제시하고 있었다.

[전술 선택: 옥죄는 배급 (C퀵 속공)] [목표 타점: 322cm (천다원의 신체적 한계점에 도달하는 좌표)] [오차 범위: 0.05초 이내]

"미친…!"

천다원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승우가 쏘아 올리려는 토스의 궤적은 천다원이 예상한 '느리고 높은' 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네트 상단을 스치듯 칼날처럼 빠르게 깔려 나가는 초고속 백토스였다. 천다원이 지금처럼 게으르게 60%의 힘만으로 뛰었다가는 손끝조차 닿지 못하고 허공을 가른 채 바닥에 처박힐, 극도로 가혹하고 무자비한 패스였다.

뛰지 않으면 무조건 범실이다. 그리고 그 범실의 책임은 완벽하게 도약을 멈춘 천다원에게 돌아간다.

승우는 천다원의 선택지를 완전히 박탈했다. 도망칠 구멍을 막아버리고, 오직 자신의 손끝이 가리키는 파멸적인 타점을 향해 온몸의 근육을 태워 도약하게 만드는 가학적인 볼 배급. 그것이 바로 승우가 정립한 '옥죄는 배급'이었다.

천다원의 발목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이 씨발…!"

천다원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공을 치지 못하면, 자신은 코트 위에서 완벽한 낙오자로 낙인찍힌다는 것을. 그의 짐승 같은 신체 조건이 생존을 위해 강제로 각성했다. 마룻바닥을 박차고 솟구치는 그의 도약 높이가 순식간에 시스템의 예측선인 322센티미터를 향해 치솟았다.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승우의 왼쪽 어깨 깊숙한 곳에서, 전생의 마지막 기억을 지배했던 끔찍한 통증이 재현되었다.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었다. 관절막이 찢어지고 뼈가 살을 파고드는 듯한, 생생하고 날카로운 화상통이었다. 승우의 안구에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듯이 점멸했다.

[경고: 코트의 지배자 시스템 과부하 발생.] [투구 어깨 신경 자극율 급증.] [어깨 마모율 1% 상승!] [※ 주의: 한도 초과 시 투구 어깨 영구 마비 리스크가 존재합니다.]

"윽…!"

승우는 이를 악물었다.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어깨 보호대조차 차지 않은 날것의 맨 어깨가 불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단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생의 실패와 무명 시절의 열등감이 빚어낸 독기는, 육체의 고통 따위보다 훨씬 더 깊고 질겼다.

'이 정도로… 내 토스를 멈출 수 있을 것 같냐.'

승우의 손끝을 떠난 공이 공기를 가를 듯한 마찰음을 내며 한 줄기 빛처럼 뻗어 나갔다.

네트 안테나 안쪽, 정확히 상대 블로커의 손끝이 닿지 않는 데드존(Dead Zone). 그리고 천다원의 거대한 오른손 바닥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우측 어깨 앞 15센티미터 공간.

그 좁고 가혹한 바늘구멍 같은 좌표에, 공이 정확하게 멈추어 서듯 내려앉았다.

천다원의 눈앞에 기적이 펼쳐졌다.

자신이 죽어라 뛰어오른 최고점, 숨이 턱 막히는 공중의 정점에서 공이 거짓말처럼 손바닥에 와서 감겼다. 공과 손바닥이 완벽하게 밀착되는 찰나의 촉감. 그것은 배구를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극한의 쾌감이었다.

"하아아앗!"

천다원이 허리를 활처럼 꺾으며 오른팔을 휘둘렀다.

타구음은 체육관 전체를 찢어발길 듯이 울려 퍼졌다.

파아앙!

빨려 들어가듯 날아간 공은 상대 블로커들의 손끝을 스치지도 않은 채, 그들의 머리통 바로 옆을 무섭게 비껴 지나갔다. 극단적인 앵글 샷(Angle Shot)이었다. 코트의 왼쪽 사이드라인 안쪽 깊숙한 곳에 찍힌 공은, 마룻바닥에 맞고 튀어 올라 체육관 벽면의 관중석 난간을 강타했다.

쾅!

정적.

체육관 안의 모든 움직임이 얼어붙었다.

네트 너머의 상대 팀 선수들은 물론이고, 멍하니 리시브를 지켜보던 태성고의 동료들조차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태성고의 흔들린 리시브 상황에서 이런 파괴적인 C퀵 속공이 나올 수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언제나 적당히 공을 띄우던 만년 유망주 백승우의 손끝에서 말이다.

"…어?"

공을 때린 천다원 본인조차 공중에 착지한 뒤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올라 터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방금 전의 스파이크는 자신의 의지로 때린 것이 아니었다. 백승우가 강제로 자신의 몸을 끌어올려, 그 위치에 손을 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강제 복종'의 산물이었다.

천다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승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경외심과 함께, 자신을 도구처럼 지배하려 든 세터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너… 방금 대체 뭘 올린 거야?"

승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천다원을 응시했다. 땀방울이 승우의 턱단을 타고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어깨의 신경통은 여전히 붉은 신경 스파크처럼 뇌리를 찌르고 있었지만, 승우의 입꼬리는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이것이 시스템의 힘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이 구축할 독재의 시작이었다.

승우가 오른쪽 손가락을 가볍게 털어내며 차갑게 읊조렸다.

"공이 네 최고 타점보다 3센티미터 아래로 떨어졌는데 왜 도약 속도를 줄였지? 다음에는 0.1초 더 빨리 뛰어. 내 토스는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뭐라고? 이 새끼가 진짜…!"

천다원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성큼 다가오려던 그 순간.

화아악!

승우의 왼쪽 어깨 뒤편, 살갗 아래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붉은 낙인 같은 타점이 소름 끼치는 불꽃을 튀기며 다시 한번 깜빡였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붉은색 경고 창과 함께, 고막을 찢을 듯한 기계음이 고요한 체육관 안에서 승우의 뇌리에만 울려 퍼졌다.

[경고: 어깨 잔존 신경 마찰 한계 도달.] [부상 방지 보호 장비 미착용 상태에서의 다음 세트 진행 시, 마모율 가속도가 3배로 증가합니다.]

승우의 눈동자가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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