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사병들의 잔해 뒤편으로, 붉은색 외투를 걸치고 직접 마력 마차를 탄 영지 지배인 기스바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마력 봉인 수갑을 흔들며 등장했다.
그가 디디고 선 마차의 바퀴가 축축한 황무지의 진흙을 짓이기며 불길한 소리를 내었다. 매캐한 연기와 비명으로 가득 찬 광장에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기스바인은 이마에 흘러내린 흙먼지를 털어내지도 않은 채, 오직 포장마차 조리대 앞에 선 지원만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제법이구나, 쥐새끼 같은 이방인 놈."
기스바인의 목소리는 쇠사슬을 바닥에 쓸어내리는 것처럼 낮고 거칠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마력 봉인 수갑이 짤랑거리며 차가운 쇳소리를 냈다. 마차의 보호 장벽 너머로 지원의 얼굴에 걸린 특유의 나긋나긋한 미소가 기스바인의 신경을 사정없이 긁어놓은 모양이었다.
지원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행주를 들어 조리대 모서리를 훔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고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아이쿠, 지배인 대인께서 직접 이 비천한 곳까지 걸음을 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어쩌지요? 저희 마차는 오늘 재료가 거의 소진되어서, 대인께 대접할 만한 고급 요리는 남아 있지 않은데요."
"주둥이만 살아 숨 쉬는 천한 놈이 끝까지 광대를 자처하는군."
기스바인이 이빨을 사납게 드러내며 비웃었다.
"네놈의 그 기괴한 마법 장벽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제국의 정식 군대가 지닌 힘은 고작 이런 무허가 야시장 텐트 하나에 막힐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가 채찍처럼 붉은 외투 자락을 휘날리며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편에서 거대한 지면을 울리는 묵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반적인 마차가 아니었다. 두꺼운 주철 판막으로 사방을 겹겹이 둘러친, 마치 거대한 괴수의 우리처럼 생긴 수용 마차 세 대였다. 마차의 창살 틈새로는 차가운 냉기와 함께 죄수들을 묶는 굵은 쇠사슬들이 뱀처럼 엉켜 있었다.
"불법 영업에 가당치도 않은 세금 체납, 거기에 아인종들을 선동한 죄까지. 이 황무지의 쓰레기들을 모조리 수거해 북부의 마력 광산 수용소로 압송하겠다. 저 더러운 혼혈들이 광산 구덩이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갈 때도, 네놈이 그 알량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지 보마."
기스바인의 서슬 퍼런 선언에 광장에 모여 있던 하프엘프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북부 마력 광산. 그곳은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다는, 아인종들의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는 지옥이었다. 수용 마차의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아이를 품에 안은 하프엘프 여인들의 어깨가 사르르 떨렸다.
지원의 미소 뒤로 팽팽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는 슬그머니 조리대 아래에 손을 얹었다. 손끝에 닿는 낡은 가죽의 감촉. '차원 유랑 장부'였다. 지원의 머릿속으로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글자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마차 남은 연료(마력) 1.5% 돌입.] [남은 시간: 01시간 42분.] [정산 기한 내에 새로운 손님의 '진실한 영혼의 치유 기록'을 장부에 올리지 못할 경우, 마차는 영원히 빛이 들지 않는 절대 고립의 허공 속에 조난당합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늘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세상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던 자신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 이 포장마차. 만약 이 마차가 차원의 미궁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면, 자신은 또다시 차가운 어둠 속에 홀로 버려지게 될 터였다. 과거의 상실감이 불러온 깊은 방어기제가 지원의 얼굴에 억지스러운 활기를 덧씌웠다.
"수용소라니요, 대인. 제 손님들을 그렇게 험악한 곳으로 모셔 가시면 제 매상에 아주 큰 타격이 옵니다만?"
"닥쳐라! 더러운 잡종 놈들을 감싸는 네놈의 목숨 역시 오늘로 끝이다!"
기스바인이 사병들에게 손짓했다. 군둣발 소리가 광장을 메우며 하프엘프들을 포위해 들어갔다. 수용 마차의 문이 덜커덩거리며 열리고, 사병들이 거친 손길로 하프엘프들의 목덜미를 부여잡으려 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공기 중에 부유하던 냄새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포장마차 솥 정수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뽀얗고 뜨거운 김에서 비롯된 향이었다. 이른 향이 바람을 타고 광장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인간들에게는 그저 약간 알싸하고 구수한 음식 냄새에 불과했지만, 하프엘프들의 감각은 전혀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원이 끓여낸 국밥의 핵심 비책, '조선 대파와 육쪽마늘'의 해독 성분이었다.
정밀한 마력 제어력을 상실한 채 몸속에서 썩어가던 마력 찌꺼기들. 그 검고 끈적한 오염원들이, 허파 깊숙이 스며드는 마늘의 매콤한 불맛과 대파의 청량한 향을 들이마시자마자 기적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앗…… 아아……."
사병에게 팔을 붙잡혀 가던 한 하프엘프 청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가슴속에서 수년 동안 꽉 막혀 있던 마력의 통로가, 마치 봄날의 따스한 햇볕을 받은 얼음 강처럼 콰르릉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몸이…… 끓어올라. 이 뜨거운 기운은 대체……?"
베아트리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 끝자락에서부터 푸른빛 서리가 맺히기 시작하더니, 이내 광장 전체의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쉬는 숨결마다 하얀 김이 서렸다. 그저 매운 연기인 줄만 알았던 포차의 열기가 몸 안의 독소를 완벽하게 밀어내고, 잃어버렸던 자연의 정령 마법을 강제로 깨워내고 있었다.
"이방인의 요리가…… 내 안의 마력을 전부 정화했어."
베아트리체의 목소리에 서린 힘은 이전의 무기력하고 사나운 들고양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빛숲을 수호하던 고결한 마법사의 당당한 선언이었다.
"모두, 기운을 차려라! 우리를 묶고 있던 사슬은 이미 녹아내렸다!"
그녀의 외침을 시작으로, 광장 여기저기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무기력증에 신음하며 바닥을 기던 하프엘프들이 하나둘씩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들의 손끝에서 은은한 푸른 불꽃과 날카로운 바람의 궤적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아인종 놈들의 마력은 분명 오염되어 제어할 수 없을 텐데?!"
사병 하나가 경악하며 뒤로 넘어졌다. 그의 눈앞에서, 방금 전까지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숨을 헐떡이던 하프엘프 노인의 손끝에서 거대한 대지의 가시가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감히 누구를 끌고 가겠다는 거냐."
베아트리체가 차가운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녀가 손을 가볍게 내젓자, 수용 마차를 고정하고 있던 거대한 무쇠 쇠사슬들이 순식간에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였다.
*바스락, 콰직!*
마치 설탕 과자가 부서지듯, 두꺼운 쇠사슬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하프엘프들의 숨겨진 마법력이 일시에 도심 광장에 피어오른 순간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제국의 채찍 앞에 바르르 떠는 나약한 잡종들이 아니었다. 뜨끈한 국밥 한 그릇으로 온몸의 정령 마력을 완벽하게 복구해 낸,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정령 마법사 군대였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
기스바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제국 군대의 자랑이던 포격 대형과 수용 마차가 하프엘프들의 강력한 원소 마법 앞에서 장난감처럼 무력화되고 있었다.
바람의 칼날이 사병들의 무기를 정확하게 날려버렸고, 불꽃의 장벽이 그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얼어붙은 대지 위에 서서 사르르 이빨을 가는 하프엘프들의 기세에, 제국 사병들은 감히 무기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하프엘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지원의 포장마차 앞을 둥글게 에워싸며 호위하듯 섰다. 그들의 중심에 선 베아트리체가 차가운 눈빛으로 기스바인을 내려다보았다.
"이 포장마차와 이방인은 우리가 지킨다. 제국의 개들아, 더 이상 우리 영웅의 몸에 손을 대려 한다면 이 광장을 너희들의 무덤으로 만들어 주마."
완벽한 전투적 연대 전선이 구축되는 순간이었다. 지원은 조리대 뒤에서 이 경이로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슴 한편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타인에게 상처받기 싫어 언제나 안전거리를 두며 실실 웃기만 하던 자신을 위해, 이방인인 자신을 위해 이들이 스스로 방패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때, 지원의 뇌리에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스템: 기적적인 영혼의 치유와 연대가 확인되었습니다.] [하프엘프 군집의 '참된 감동과 감사의 눈물'이 장부에 기록됩니다.] [정산 완료! 영혼의 낙찰금 150,000 포인트 획득!] [마차 연료: 100% 충전 완료. '차원 조각' 유통 기한이 영구 연장됩니다.] [절대 고립 조난 경보가 해제되었습니다. 이제 마차는 차원의 안정적인 흐름 속에 안착합니다.]
장부의 붉은 경고등이 사라지고 따스한 금빛 서광이 가죽 표지를 감쌌다. 마차의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 한층 더 견고하고 단단해진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조난의 위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것이다. 지원의 입꼬리가 가느다랗게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기스바인은 쉽게 물러설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품바지 속을 뒤적였다. 하프엘프들의 마법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탐욕과 독기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하…… 하하하! 미천한 반역자 무리들이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기스바인이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품속에서 황금빛 문양이 새겨진 두꺼운 법률 조항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황제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공식 제국 법령 서류였다.
"베아트리체, 그리고 더러운 혼혈들아! 너희가 이 이방인을 수호하겠다고? 좋다! 하지만 제국의 법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가 문서를 들이밀며 지원을 가리켰다.
"제국 상법 제4조 12항! 공간 전이 장치를 이용해 황실의 허가 없이 물자를 유통하고, 영지 통행료 및 관세를 납부하지 않은 자는 '1급 차원 밀수 중범죄자'로 규정한다! 이 법령은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공포된 절대적인 법이다!"
기스바인의 목소리가 광장에 찢어지듯 울려 퍼졌다.
"이방인 이지원! 네놈이 아무리 대단한 요리를 만들고 마법 장벽을 치더라도, 제국의 정식 법령에 의거한 체포령을 거부하는 순간 너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아인종 년놈들 모두가 제국을 향한 무장 반역자로 낙인찍혀 토벌당할 것이다! 어디 시험해 보아라! 네놈을 구하겠다고 온 영지의 하프엘프들을 몰살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셈이냐!"
그 비열하고도 치밀한 협박에, 방패를 자처하던 하프엘프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굳어졌다. 그들이 제아무리 마력을 회복했다 한들, 제국 전체의 군대와 맞서는 것은 곧 종족의 전멸을 의미했다. 하프엘프들의 눈동자에 다시금 무거운 갈등과 두려움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기스바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마력 봉인 수갑을 허공으로 던졌다.
수갑은 기스바인의 손을 떠나자마자 붉은색 제국의 추적 마법 진을 그리며, 포차의 방어막—물리적 타격만 막아내는 장벽—을 가볍게 통과하여 지원의 양 손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은빛 수갑이 지원의 양팔에 단단히 채워졌다.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지원의 온몸을 흐르던 미세한 마차가 주는 온기가 순식간에 차단되며 육체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방인 이지원, 네놈은 제국 령의 중범죄 밀수 혐의자다. 순순히 압송에 응해라. 저항한다면, 저 아인종들은 반역죄로 즉시 처형될 것이다."
기스바인이 승리를 확신하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수갑의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지원의 몸이 조리대 앞으로 힘없이 쏠렸다. 베아트리체가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지원은 오히려 그녀를 향해 보이지 않게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의 양팔은 묶였으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장부의 숨겨진 물류 기록이, 그리고 멜리사에게서 전해 들었던 기스바인의 은밀한 이중장부의 사본 족보가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내며 칼날 같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