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차가운 철제 의자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뼈마디를 시리게 파고들었다. 손목을 옥죄는 마력 봉인 수갑은 붉은색 제국 마법 진을 흘리며 지원의 체온을 사정없이 뺏어갔다.

"이방인 이지원, 네놈은 제국 령의 중범죄 밀수 혐의자다. 순순히 죄를 자백하고 장부의 비밀을 넘겨라."

지하 심문실의 눅눅한 공기를 가르며 기스바인의 오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방이 거친 돌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는 오직 단 하나의 촛불만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릴 뿐이었다. 벽 틈새로 스며드는 밤안개는 광장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훨씬 더 비정하고 차가웠다.

지원은 손목의 수갑을 가볍게 흔들었다. 쇳소리가 요란하게 돌방을 울렸다. 육체가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마차가 전해주던 온기로운 마력이 차단되었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촛불보다 더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과거 가정이 산산조각 나던 그 추운 겨울날, 홀로 남겨진 방 한구석에서 쓸쓸히 무릎을 안고 있던 소년은 온기를 잃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법을 배웠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두른 단단한 미소의 가면이, 지금 이 어두운 심문실에서도 지원의 얼굴 위에 자연스럽게 얹어졌다.

"밀수라니요, 수금관 나리. 저는 그저 배고픈 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했을 뿐입니다. 제 장부에는 그저 맛있게 드신 손님들의 외상값만 적혀 있는걸요."

지원은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기스바인의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그 순간, 지원의 귓가에 차가운 기계음이 울렸다.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붉은색 반점의 경고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경고: '차원 조각' 유통 기한 만료 임박 (02시간 45분 남음)] [경고: 기한 내에 새로운 손님의 '진실한 영혼의 치유 기록(치유의 눈물)'을 장부에 올리지 못할 경우, 마차는 영원히 빛이 들지 않는 절대 고립의 허공 속에 조난당합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장부에 적힌 가혹한 대가는 타협이 없었다. 포장마차가 허공 속으로 조난당하는 순간, 자신이 꿈꾸던 '그 누구도 외롭지 않은 영원의 안식처'는 영원히 신기루처럼 사라질 터였다. 가슴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워졌지만, 지원은 오히려 더 깊게 미소 지었다. 위기 상황일수록 쾌활한 가면을 두껍게 쓰는 방어기제가 본능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닥쳐라! 비천한 이방인 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놀리느냐!"

기스바인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먼지가 풀썩 일었고,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네놈이 들고 다니는 그 기괴한 마차와 장부의 힘을 모를 줄 알았더냐? 제국의 허가 없이 차원을 넘나들며 물자를 밀수하는 행위는 황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이다. 네놈 배후에 어떤 거대한 밀수 조직이 있는지, 그리고 그 하프엘프 짐승놈들을 어떻게 선동했는지 낱낱이 불어라!"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기스바인의 성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적.

심문실 안을 채운 것은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기스바인의 거친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지원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음에 답하지 않는 무거운 침묵이야말로 상대를 가장 초조하게 만드는 무기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왜 말이 없느냐? 겁이 나는 모양이군, 호색한처럼 웃어대더니 막상 제국의 채찍 앞에서는 혀가 굳었나 보지?"

여전히 침묵. 지원은 그저 눈을 반쯤 감은 채, 머릿속으로 포장마차의 식재료 창고를 정리하듯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뽀얀 사골 육수. 뚝배기 가장자리에서 탁탁 튀며 매콤한 향을 뿜어내던 다진 양념. 도마 위에서 경쾌하게 썰려 나가던 아삭한 대파의 감각. 그 따사로운 기억들이 차가운 심문실의 한기를 밀어내고 지원의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기스바인의 얼굴이 점차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자신이 던진 고압적인 질문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는 무거운 침묵의 벽에 부딪쳐 무력하게 바스러지자, 그의 페이스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 무례한 놈이! 내가 묻지 않느냐! 네놈의 그 장부는 어디서 난 것이냐! 배후는 누구냔 말이다!"

기스바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원의 멱살을 움켜쥐려 다가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순간, 기스바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거칠게 킁킁거렸다.

"윽, 이 천박하고 지독한 냄새는 대체 뭐지? 썩은 잡초인가? 아니, 미천한 아인종 놈들이나 풍길 법한 지독한 악취가 네놈 몸에서 진동하는구나!"

지원은 기스바인의 혐오 섞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조선 대파와 육쪽마늘 냄새입니다."

"뭐라?"

"당신들이 '더러운 혼혈'이라 부르며 황무지로 내쫓았던 하프엘프들 말입니다. 그들의 온몸을 갉아먹던 마력 찌꺼기를 용해하고 독을 풀어준 비책이 바로 이 냄새 속에 들어있지요. 칼칼하고 알싸한 불맛의 국밥 한 그릇이 막혀있던 순환계를 강제로 뚫어버린 겁니다. 당신이 무시하던 그 하프엘프들이 왜 갑자기 마력을 완전히 회복해서 당신네 사병들을 불벼락으로 쓸어버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십니까?"

기스바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벌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력 오염은 제국의 대마법사들도 고치지 못한 불치병이다! 겨우 그따위 천박한 식재료로..."

"세상에는 제국의 법령보다 더 고결하고 정직한 법칙들이 많답니다. 정성 어린 온기는 얼어붙은 영혼도 녹이는 법이니까요."

지원은 소맷자락 깊은 곳에서 가느다랗게 느껴지는 금속의 감촉을 의식했다. 가슴속 주머니에는 기사 엘릭이 국밥을 먹고 남겨두었던, 금이 간 낡은 은빛 기사 펜던트가 들어있었다. 제국의 불의에 신음하던 고결한 기사의 영혼이 담긴 징표. 그 차가운 금속이 지금은 든든한 아군처럼 지원의 가슴을 지켜주고 있었다.

"이 건방진 놈이 끝까지 유희를 즐기려 드는구나! 좋다, 네놈의 그 거만한 주둥이가 채찍 아래에서도 그렇게 잘 놀려지는지 보자꾸나!"

이성을 잃은 기스바인이 벽에 걸려 있던 가죽 채찍을 거칠게 낚아챘다. 굵고 무거운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가학적인 소리를 냈다. 기스바인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채찍이 지원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히려는 찰나였다.

"기스바인 경."

지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돌방의 사방 벽을 울릴 만큼 단단하고 묵직했다. 채찍을 치켜든 기스바인의 팔이 멈칫했다.

"당신이 그렇게 제국의 법을 수호하는 척 정의로운 척 연기를 하시는 모습, 제법 볼만하군요. 하지만..."

지원은 수갑에 묶인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소매 안쪽에서 접혀 있던 얇고 낡은 양피지 한 장을 탁자 위에 툭 떨어뜨렸다.

그것은 보부상 멜리사가 목숨을 걸고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빼돌려 준, 기스바인의 가장 은밀하고 더러운 비밀이었다.

"이게... 무엇이냐?"

기스바인의 시선이 탁자 위의 양피지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종이에 적힌 첫 줄을 읽는 순간,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스바인이 황제 몰래 황무지를 드나드는 상인들에게 독점적으로 징수해 온 '불법 사설 통행료 이중 장부'의 사본 족보였다. 관세라는 명목 하에 제국 국고로 들어가야 할 막대한 금화들이, 어떻게 기스바인의 개인 비밀 금고로 흘러 들어갔는지 날짜와 금액, 그리고 뇌물을 바친 상인들의 서명까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 이것이 어떻게 네놈 손에..."

기스바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갈라졌다. 채찍을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빳빳하게 세워져 있던 그의 어깨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상인 멜리사 아시지요? 동전 한 푼에도 벌벌 떠는 억척스러운 동맹입니다만, 맛있는 제육볶음 앞에서는 아주 정직해지는 분이랍니다."

지원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안히 기대며, 마치 자신의 안방인 양 나직하고 차분한 어조로 역공을 이어갔다.

"이 이중 장부의 원본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십니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시간에도 마차를 타고 제국 수도의 감사원 기사단 손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겁니다. 제가 만약 정해진 시간 내에 무사히 포장마차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 원본은 감사원장의 책상 위에 그대로 펼쳐지겠지요."

심문실의 차가운 정적 속에서 기스바인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비리로 점철됐던 그의 얼굴은 촛불빛 아래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셔 해골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 몇 마디의 대사와 무거운 침묵의 엇박자 속에서, 철창에 갇힌 죄수와 칼자루를 쥔 취조관의 권력 구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네, 네놈이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이건 위조된 문서다! 아무런 효력도 없는 허무맹랑한 낙서에 불과해!"

기스바인은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아무런 힘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다리가 풀린 듯 비틀거리며 탁자를 짚는 그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위조인지 아닌지는 수도에서 내려올 감사관들이 판단하겠지요. 수금관 나리, 당신이 쌓아 올린 그 찬란한 귀족으로서의 미래가, 황무지의 비천한 이방인 하나를 잡으려다 통째로 불타 사라지게 생겼는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지원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더 이상 심약한 방어의 가면이 아니었다. 상대를 완벽하게 옭아맨 포식자의 여유로운 미소였다.

기스바인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굴러갔다. 이중 장부가 수도에 전해지는 날에는 단순히 관직을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황실의 재산을 가로챈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혀 평생 지하 감옥에서 썩거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터였다.

"원... 원하는 게 무엇이냐? 금화인가? 아니면 영지 내에서의 자유로운 상업권인가? 무엇이든 주마. 그러니 그 원본을..."

기스바인의 목소리는 이제 구걸에 가까웠다. 조금 전까지 아인종을 짐승이라 부르며 채찍을 휘두르려던 오만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슬이 철렁이며 무거운 소리를 냈지만, 그의 기세는 기스바인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안개의 황무지 광장에 있는 제 포장마차를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곳을 찾는 손님들이 평화롭게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안전을 보장하는 것."

"그... 그것뿐이냐? 좋다! 내 당장 약속하마! 네놈의 마차를 제국 공식 허가 상점으로 등록해 주지! 그러니까..."

기스바인의 얼굴에 비열한 안도의 빛이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지원은 그의 얄팍한 타협안을 받아들일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당신의 그 더러운 손으로 직접 작성한 영구 거주 보증서가 필요합니다. 제국의 인장이 찍힌 공식 문서로 말이죠."

기스바인의 눈이 다시금 절망으로 물들었다. 영구 거주 보증서는 황무지 영지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방인은 자신의 목줄을 너무나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으... 으으..."

기스바인의 이빨이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분노와 굴욕감, 그리고 파멸에 대한 공포가 그의 이성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밑바닥까지 짓밟힌 순간,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공포는 서서히 기괴한 광기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하하하!"

기스바인이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촛불이 그의 광기 어린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었다.

"영구 거주 보증서? 감사원? 이방인 놈아, 네놈이 아주 묘한 수를 썼구나. 하지만 네놈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

그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벽에 걸린 비상용 나팔을 움켜쥐었다.

"원본이 수도로 가고 있다고? 그렇다면... 그 원본이 도착하기 전에, 그리고 그 문서가 공식적으로 발효되기 전에 이곳의 모든 증거를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네놈도, 그 잘난 포장마차도, 그리고 그 이중 장부의 존재를 아는 더러운 아인종 놈들까지 전부 다!"

기스바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이성을 잃은 자의 광포한 집착이 심문실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수비대장! 당장 수비대 전원을 소집하라!"

그가 심문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밖을 향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증거를 인멸해야 한다! 지금 즉시 황무지 광장으로 진격해 저 불법 포장마차를 완전히 불태워 부수고, 그곳에 모여 있는 하프엘프 놈들과 슬럼의 주민들을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하라! 제국의 반역자들을 토벌하는 것이다!"

기스바인의 광기 어린 친위 명령이 차가운 수비대의 복도를 타고 무섭게 울려 퍼졌다.

지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수갑에 묶인 그의 손끝이 차갑게 굳어갔다. 머릿속의 붉은 장부 경고창은 여전히 무정하게 남은 시간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에는,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베아트리체와 상처 입은 하프엘프들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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