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포장마차 구석에 놓인 낡은 가죽 장부의 표면이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첫 정산 실패 시 영원히 빛이 들지 않는 절대 고립의 허공 속에 조난당한다'던 붉은 경고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베아트리체가 남기고 간 진실한 치유의 눈물 한 방울이 장부의 마일리지를 가득 채운 덕분이었다. 마차의 연료창이 100%로 차오르며 든든한 초록빛을 발했다. 영원한 어둠 속으로 내팽개쳐질지 모른다는 숨 막히는 압박감이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보가 꺼진 장부 패널에 두 번째 적격 타깃 알림이 오렌지빛으로 선명하게 점멸하는 순간, 묵직한 가죽 장화를 신은 사내가 포차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문틈으로 스며든 황무지의 밤바람이 붉은 천막을 거세게 흔들었다. 들어온 이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진흙이 잔뜩 묻은 두꺼운 곰 가죽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털이 숭숭 난 방한모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죽 장화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포차 안으로 발을 디뎠다.

"흐아, 얼어 죽을 뻔했네! 이 황무지 한가운데에 진짜로 이런 온기가 도는 곳이 있을 줄이야."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두꺼운 모직 머플러가 아래로 스르륵 내려갔다. 그 뒤에 드러난 얼굴은 굵직한 사내가 아니었다. 뺨 주변에 주근깨가 아기자기하게 돋아나 있고,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이었다. 황무지를 드나들며 온갖 물건을 실어 나르는 보부상, 멜리사였다.

지원은 손에 쥐고 있던 마른 행주로 가볍게 나무 테이블을 닦아내며 여느 때처럼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슴속을 짓누르던 조난의 공포가 말끔히 가라앉은 덕분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한층 더 여유가 묻어났다.

"어서 오세요. 밖이 많이 춥죠? 뜨끈한 국물로 몸부터 녹이시겠습니까?"

멜리사는 대답 대신 둥근 코를 킁킁거리며 포차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천막 안을 가득 채운 구수하고 깊은 사골 육수 냄새가 그녀의 위장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굳어 있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화로 근처로 다가왔다.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하지만 음식은 나중에 먹도록 하지. 장사꾼에게는 끼니보다 더 급한 불이 있는 법이니까."

멜리사가 질질 끌고 온 작은 나무 손수레를 포차 문턱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수레 위에는 가마니 몇 개가 얹혀 있었는데, 그 틈새로 푸르스름한 이채가 흘러나왔다. 가마니를 들추자 어른 주먹만 한 감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이하게도 감자의 표면에는 서리 같은 하얀 결정이 서려 있었고,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것 좀 보게, 젊은이. 황무지 북쪽 안개 지대에서 겨우 캐낸 '서리 안개 감자'라네. 이 지역의 변칙적인 안개 마력을 듬뿍 빨아들여서 아주 귀한 식재료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멜리사가 감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파랗게 얼어붙는 것처럼 보였다.

"안개 마력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수확한 지 이틀만 지나면 마력이 썩어 문드러지면서 감자 전체가 독덩어리로 변해버려. 제국 도시의 귀족들에게 가져가면 비싸게 팔리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도중에 길은 다 막혔고 통행료는 기스바인 그 흡혈귀 같은 놈이 세 배나 올렸지. 이대로 가다간 내 전 재산이 들어간 이 감자들이 전부 쓰레기가 되게 생겼어."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상하기 직전의 귀한 식재료를 안고 발만 동동 구르는 장사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지원은 말없이 낡은 가죽 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반투명한 패널이 멜리사가 들고 있는 감자를 향해 보이지 않는 파동을 뻗었다.

[신비 식재료 감지: '서리 안개 감자' (마력 포화도 87%)] [상태: 부패 진행까지 남은 시간 14시간.] [특이사항: 장부 등록 시 차원 물류 교환 포인트로 즉시 치환 가능. 치환 가치: 1kg당 12포인트.]

지원의 입꼬리가 은근하게 올라갔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포착했을 때 나오는 특유의 쾌활한 미소였다.

"멜리사 씨, 그 감자들 전부 저에게 넘기시는 건 어떻습니까?"

"자네에게? 미쳤나? 이 감자는 까다로운 마법 처리를 하지 않으면 일반인은 먹지도 못해. 삶아 먹었다간 뱃속에서 마력이 폭발해서 장기가 다 뒤틀릴 걸세."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아주 특별한 조리법과... 도구가 있으니까요."

지원은 멜리사의 눈앞에서 감자 한 가마니를 번쩍 들어 올려 포차 주방 안쪽에 있는 청동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죽 장부의 모서리를 깃털펜 끝으로 가볍게 톡 두드렸다.

*스우우우우우—*

빛의 입자가 저울 위의 감자 가마니를 부드럽게 감쌌다. 멜리사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눈앞에 있던 거대한 감자 가마니가 아지랑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 어머나?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감자가 어디로 간 거지?"

멜리사는 텅 빈 저울 위를 손으로 허둥지둥 쓸어내리며 비명을 질렀다. 공간 마법 반지조차도 이토록 거대한 질량을 소리 소문 없이, 마력의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집어삼킬 수는 없었다.

지원은 태연하게 장부의 수치를 확인했다.

[물류 교환 포인트: +480 포인트 적립 완료.]

"제 고향의 창고로 안전하게 배송되었습니다. 유통기한은 영구 정지된 상태로 말이죠."

지원은 주방 아래에서 묵직한 단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붉은 진흙으로 빚은 듯한 옹기 단지의 뚜껑을 열자, 시큼하면서도 톡 쏘는 매콤하고 달콤한 향기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잘 숙성된 조선의 전통 고추장이었다.

이어서 그는 장부의 포인트를 소모해 무쇠로 주조된 커다란 가마솥 세트를 소환했다. 쿵, 하고 주방 한편에 자리 잡은 가마솥은 보기만 해도 든든한 무게감을 자랑했다. 깊고 짙은 검은색의 표면은 오랜 세월 불길을 견뎌낸 장인의 혼이 깃든 듯 매끄러운 윤기를 흘리고 있었다.

"이건 고추장이라는 양념입니다. 그리고 이 무쇠 가마솥은 열을 골고루 가두어 식재료의 독성을 짓누르고 온기를 뼛속까지 불어넣는 힘이 있죠. 안개 마력에 절어 있는 감자라도, 이 가솥에 고추장과 특별한 육수를 붓고 푹 조려내면 마력의 독성은 깨끗하게 정화되고 칼칼한 감칠맛만 남게 됩니다."

멜리사는 고추장 단지에서 풍겨 나오는 붉은 향과 압도적인 풍채의 가마솥을 멍하니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이성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 눈앞의 동양인 청년은 평범한 야시장 주인이 아니다. 차원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물류의 가치를 장난치듯 뒤바꾸는 괴물이다.

"말도 안 돼... 물류를 보관하는 비용도 들지 않고, 유통기한을 무시하며, 독성 식재료를 즉석에서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이라니. 이건 장사꾼들에게는 신의 권능이나 다름없어."

멜리사의 뺨이 흥분으로 붉게 가물거렸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며 지원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젊은이, 아니 점장님. 자네가 가진 그 유통망과 가공 능력을 나랑 공유할 생각은 없나? 내가 황무지 전역에서 이 상해 가는 마력 식재료들을 헐값에 긁어모아 오겠네. 자네가 그걸 받아서 처리해 준다면... 우린 이 더러운 황무지에서 제국 상단을 제치고 거부가 될 수 있어!"

지원은 턱을 괴고 생글생글 웃었다.

"시장 독점권이라.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네요. 하지만 저도 바보가 아닙니다. 멜리사 씨가 저를 배신하고 이 기술을 제국 귀족들에게 팔아넘기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멜리사는 잠시 숨을 들이켜더니, 자신의 두꺼운 가죽 코트 안주머니를 거칠게 뒤적였다. 그녀가 꺼내 놓은 것은 낡고 흐물흐물한 양가죽 종이 뭉치였다. 겉면에는 붉은 밀랍 봉인이 반쯤 부서진 채 붙어 있었다.

"이걸 보게. 내 신용의 증표야."

지원이 종이를 받아 펼쳤다. 빽빽하게 적힌 이름들과 알 수 없는 숫자들,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에 선명하게 찍힌 인장. 그것은 변방의 지배자이자 세금 징수 책임자인 기스바인의 인장이었다.

"이게 뭡니까?"

"기스바인 그 음흉한 대머리 늙은이가 황제 폐하 몰래 우리 같은 방랑 상인들에게 독점 조세를 징수해 온 '사설 이중 장부'의 사본이라네. 진짜 세금은 제국 국고로 찔금 보내고, 나머지는 전부 자기 비밀 금고로 처넣고 있었지. 이걸 세상에 폭로하면 기스바인은 반역죄로 단두대행이야. 내가 목숨을 걸고 빼돌린 일종의 보험이지."

멜리사의 황금빛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였다.

"이걸 자네에게 맡기겠네. 내가 배신하면 자네가 이걸 제국 기사단이나 감찰관에게 던져버리면 돼. 그럼 나와 기스바인은 동시에 파멸하겠지. 이 정도면 내 목숨을 담보로 건 셈인데, 동맹으로 받아줄 텐가?"

지원은 양가죽 장부의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장부의 숫자들은 기스바인이 저지른 불법 편취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멜리사라는 여자가 보통 배짱을 가진 장사꾼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좋습니다. 아주 훌륭한 담보물이네요."

지원은 장부를 서랍 깊숙한 곳에 소중히 밀어 넣었다. 그리고 가스 화구의 불을 제법 강하게 올렸다.

"자, 동업자끼리 극적인 타협을 보았으니 맛있는 음식으로 축하를 해야겠지요."

주방에서 서걱서걱 경쾌한 칼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원의 손끝에서 푸릇푸릇한 대파가 송송 썰려 나갔고, 가죽 장부의 신선 보관실에서 꺼낸 통통한 오징어와 바지락 조갯살이 도마 위에서 먹기 좋은 크기로 다듬어졌다.

넓적한 팬 위에 기름을 넉넉히 둘렀다. 달구어진 팬에서 미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지원은 밀가루와 쌀가루를 황금 비율로 섞은 반죽물을 얇게 펴 발랐다. 그 위에 길쭉한 쪽파를 가지런히 깔고, 다진 해물을 아낌없이 얹었다.

*쉬이이이이이익—!*

달콤하고 고소한 기름 타는 소리가 붉은 천막 안을 가득 메웠다. 마치 한여름 날 지붕을 때리는 시원한 소나기 소리 같았다. 해물이 익어가며 뿜어내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쪽파의 알싸하고 달콤한 향이 안개 낀 황무지의 퀴퀴한 냄새를 단숨에 몰아냈다.

지원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팬을 가볍게 휙 던졌다. 허공에서 한 바퀴 멋지게 회전한 해물파전이 뒤집혀 찰딱 소리를 내며 안착했다. 반대편 손으로는 놋쇠 그릇에 뽀얗고 걸쭉한 막걸리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미세한 탄산 기포가 표면에서 톡톡 터지며 달콤한 누룩 향을 풍겼다.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해물파전과 맑은 막걸리입니다. 뜨거울 때 드셔보세요."

멜리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젓가락을 들었다. 이세계에는 없는 기묘한 나무 막대기였지만, 본능적인 허기에 이끌려 파전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바삭!*

입안에 넣고 씹는 순간, 경쾌한 파열음이 천막 안을 울렸다.

"앗 뜨거...! 하지만... 세상에, 이 식감은 뭐지?"

겉은 유리창이 깨지듯 극도로 바삭한데, 안쪽의 반죽은 찹쌀떡처럼 쫄깃하고 부드러웠다. 달콤하게 익은 쪽파의 즙이 혀끝을 적시더니, 씹을 때마다 쫄깃하게 터지는 오징어와 바지락의 감칠맛이 폭발했다. 기름진 고소함이 입안을 가득 채울 때쯤, 그녀는 지원이 건넨 놋쇠 대접을 들이켰다.

*벌컥, 벌컥.*

달콤하고 부드러운 막걸리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입안에 남아 있던 미세한 기름기가 막걸리의 청량한 탄산과 산뜻한 신맛에 씻겨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부터 뜨끈한 열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멜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황무지의 칼바람을 맞으며 밤낮으로 마차를 몰아 굳어 있던 어깨가 흐물흐물하게 풀려나갔다. 뼛속 깊이 박혀 있던 지독한 한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따뜻한 봄날의 햇살 아래 누워 있는 듯한 평온함이 온몸을 감쌌다.

"맛있어... 정말이지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하고 맛있군. 평생 차가운 보존식량만 씹으며 길바닥에서 잤는데... 이런 대접을 받다니."

멜리사의 황금빛 눈가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그녀는 소매깃으로 눈가를 슥 닦아내며, 지원이 내민 마법 계약서 위에 거침없이 자신의 피가 섞인 서명을 눌러 찍었다.

"내 목숨을 걸지. 이 식당과 점장님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네. 이 따뜻한 안식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스바인의 목줄이라도 끊어 오겠어."

지원은 빙그레 웃으며 계약서를 수거해 장부 속으로 넘겼다.

[동맹 계약 체결 완료: 보부상 멜리사.] [포차 방어 성능 및 물류 한도가 확장됩니다.]

두 사람이 따뜻한 파전과 막걸리를 나누며 승리의 잔을 부딪치려던 찰나였다.

포장마차의 붉은 천막 너머, 고요하던 안개 자욱한 황무지의 어둠 속에서 불길한 소음이 들려왔다.

*철컥. 철컥. 철컥.*

묵직하고 차가운 강철 갑옷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불협화음이 한 걸음씩 포차를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거친 횃불의 불빛이 천막 천 위로 붉고 일그러진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윽고, 천막의 입구 가죽 커버가 날카로운 창끝에 의해 거칠게 젖혀졌다. 차가운 밤바람이 들이닥치며 포차 안의 온기를 순식간에 앗아갔다.

그 문틈으로 드러난 것은 붉은 제국 기사단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흉갑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서 은빛 투구를 쓴 장교가 비장한 표정으로 가죽 채찍을 털며 소리쳤다.

"이곳의 야간 영업은 불법이다! 황무지 정화령 및 불법 아인종 집결 금지법에 의거하여, 이 무허가 마차를 즉시 압수하고 운영자를 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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