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은빛 마력 폭주로 눈이 핏빛으로 물든 하프엘프 베아트리체가 시퍼런 식칼을 겨누며 마차 천막을 찢고 들이닥쳤던 것은 불과 수십 초 전의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서슬 퍼런 칼날을 겨누며 으르렁거리던 그녀는, 이제 차가운 나무 바닥으로 무너지며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가 거칠게 들썩일 때마다 살을 에는 듯한 은빛 불꽃이 그녀의 등 뒤에서 날카롭게 튀었다.
우웅, 우웅!
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차원 유랑 장부’가 붉은빛을 뿜어내며 경고음을 울려댔다.
[! 경고: 손님의 마력 폭주가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 붕괴율 99% ─ 영혼 소실까지 남은 시간: 4분 30초]
장부의 붉은 경고등이 지원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이대로 가다간 첫 정산은커녕, 마차의 연료가 바닥나 이 황량한 차원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원히 조난당할 판이었다. 지원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과거의 깊은 상실감이 만들어낸 방어기제였다. 위기에 직면할수록 그의 가면은 더욱 단단하고 쾌활해졌다.
"이야, 우리 가게 첫 손님치고는 등장인물이 아주 정열적이시네. 웰컴 드링크 대신 뜨끈한 국물이 급하게 필요해 보입니다만?"
지원은 넉살 좋게 중얼거리며 주방 안쪽으로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의 손놀림은 조금 전보다 배는 빨라져 있었다. 커다란 무쇠 가마솥의 뚜껑을 열자, 이틀 동안 밤낮없이 우려낸 뽀얀 사골 육수가 펄펄 끓으며 구수한 수증기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그는 선반에서 묵직한 뚝배기를 꺼내 들었다.
가마솥 안에서 푹 삶아져 야들야들해진 소머리 고기를 솜씨 좋게 썰어 뚝배기 바닥에 넉넉히 깔았다. 그 위로 뽀얀 육수를 국자로 푹 퍼서 담자, 뚝배기가 불 위에서 다시 한번 거칠게 요동치며 끓어올랐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귀를 자극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진한 고기 향이 붉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프엘프의 체내를 막고 있는 뒤틀린 마력 찌꺼기를 녹여내려면, 비장의 무기가 필요했다.
지원은 조리대 한 구석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조선 대파와 육쪽마늘을 집어 들었다. 도마 위에서 칼날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탁, 탁, 탁, 탁!
순식간에 다져진 마늘과 송송 썰린 대파가 펄펄 끓는 뚝배기 속으로 아낌없이 투하되었다. 마늘의 알싸하고 매콤한 향이 사골의 묵직한 구수함과 섞이더니, 이내 코끝을 짜릿하게 찌르는 강력한 해독의 향으로 탈바꿈했다. 지원은 거기에 칼칼한 고춧가루 양념장까지 한 숟가락 크게 풀어 넣었다. 붉은 양념이 퍼지며 국물은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빛으로 변했다.
"자, 한국인의 소울 푸드이자 마력 해독제 들어갑니다."
지원은 뜨거운 뚝배기를 나무 받침대에 받쳐 베아트리체의 코앞에 단숨에 내려놓았다.
탁!
그릇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붉은 국물이 뚝배기 가장자리에서 보글거리며 튀었다. 알싸한 마늘과 칼칼한 대파, 그리고 불향을 머금은 고춧가루 냄새가 베아트리체의 콧망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으... 윽..."
베아트리체는 바닥에 쓰러진 채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에 붉게 끓어오르는 소머리국밥이 담겼다. 은빛 마력이 폭주하며 그녀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본능은 울부짖고 있었다. 이 그릇 안에 담긴 무언가가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약... 이냐...?"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다시 쥐려 손가락을 까닥였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약보다 훨씬 좋은 겁니다. 일단 살고 봐야 칼을 휘두르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자, 숟가락 잡으시죠."
지원은 그녀의 떨리는 손에 강제로 놋쇠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자, 아 해보세요. 안 먹으면 제가 억지로라도 떠먹여 드릴 겁니다. 영업 방해로 고소하기 전에."
베아트리체는 이를 악물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천한 인간이 만든, 정체 모를 붉은 국물 따위를 구걸하듯 받아먹어야 한다니. 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구수하고 칼칼한 향기는 대뇌를 마비시킬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지독한 마력 체증으로 인해 몇 주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했던 위장이 비명을 질렀다.
결국, 그녀는 욕설 대신 숟가락을 뚝배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붉은 양념장이 잘 풀린 국물과 함께 푹 익은 대파가 숟가락 위로 올라왔다. 베아트리체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입가로 가져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확장되었다.
"앗...!"
뜨겁고 칼칼한 국물이 입안에 닿는 순간, 혀끝에서부터 강렬한 불꽃이 터지는 것 같았다. 묵직하고 구수한 소머리 육수가 입안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가 싶더니, 이내 뒤따라온 육쪽마늘의 알싸한 매운맛과 조선 대파의 단맛이 식도를 타고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화끈한 기운이 식도를 지나 위장에 닿자마자, 얼어붙어 있던 장기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흐읍...!"
베아트리체의 입에서 깊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뜨거운 국물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용의 숨결처럼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뭉쳐 있던 차가운 마력 찌꺼기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막혀 있던 마력 순환계가 뚫리며, 전신에 엄청난 열기가 돌았다.
"이, 이게 무슨...!"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존심이고 품위고 모두 날아갔다. 베아트리체는 놋쇠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꽉 쥐고는, 뚝배기 속으로 머리를 처박다시피 하며 국밥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후루룩! 쩝, 후루루룩!
"커헉! 흐으..."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그녀의 이마와 콧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매콤한 양념이 입술을 붉게 자극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야들야들하게 삶아진 머리 고기는 씹을 것도 없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고, 고기 사이사이에 스며든 칼칼한 국물이 씹을 때마다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만성 무기력증이,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속으로 증발하는 것만 같았다.
"씁, 하아─!"
베아트리체가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은은한 마늘과 대파 향이 섞인 은빛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그녀의 체내에 쌓여 있던 마력 오염 물질이 조선 대파와 육쪽마늘의 해독 성분에 녹아내려 배출되는 '마늘 디톡스' 현상이었다.
지원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식칼을 들이대며 위협하던 도도한 하프엘프 전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국밥 한 그릇에 영혼을 빼앗긴 채 땀을 뻘뻘 흘리는 굶주린 단골손님 후보일 뿐이었다.
클랙, 클랙!
놋쇠 숟가락이 뚝배기 바닥을 긁는 경쾌한 소리가 조용한 포장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베아트리체는 그릇을 아예 양손으로 들고 남은 국물 한 방울까지 들이켰다. 붉은 국물이 그녀의 하얀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이 그녀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둥실 떠 있던 차원 유랑 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밝은 빛을 발했다.
잉─!
지원의 눈앞에 선명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손님 관리 탭 업데이트] [대상: 베아트리체 (하프엘프)] [상태: 마력 체증 45% 완화] [영혼의 치유 감응도 상승으로 인해 포장마차 내부 온도가 1°C 상승합니다. 냉기 저항이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후끈한 온기가 천막 내부로 퍼져나갔다. 밤바람에 펄럭이던 천막 틈새로 스며들던 황무지의 차가운 안개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느낌이 들었다.
베아트리체는 텅 빈 뚝배기를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은 뜨거운 열기와 매운맛으로 인해 발갛게 상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의 창백하고 날카롭던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은 영락없이 무장 해제된 소녀의 그것이었다.
"어떻습니까, 손님? 제 칼칼한 소머리국밥이 그쪽 몸속에 꽉 막혀 있던 시커먼 먼지들을 좀 쓸어내 준 것 같은데요."
지원이 젖은 행주로 조리대를 닦으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얼음처럼 차갑고 떨리던 손끝에 따뜻한 혈색이 돌고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 같은 무기력증이 가벼워졌고, 제멋대로 폭주하던 은빛 마력이 이지러진 달빛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흐르고 있었다. 기적이었다. 제국의 그 어떤 고명한 신관도, 값비싼 엘릭서도 고치지 못했던 마력 폭주가 단 한 그릇의 요리로 진정되다니.
그녀는 수치심과 경외감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너... 정체가 뭐냐? 이 음식에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마법은 무슨요. 그냥 정성껏 끓인 국밥이라니까요. 아, 아직 계산이 남았습니다만?"
지원이 장부를 톡톡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베아트리체의 안색이 갑자기 다시 한번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잔잔하게 흐르던 은빛 마력이, 갑자기 기괴할 정도로 팽창하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공이 은빛 빛무리로 가득 차오르며,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윽...! 끄으윽...!"
베아트리체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번 마차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번에는 단순한 폭주가 아니었다. 체내에 남아 있던 거대한 마력의 응어리가 국밥의 온기와 충돌하며 일으키는 격렬한 명현 반응이었다. 너무 급격하게 마력이 회복되면서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 손님? 여기서 쓰러지시면 곤란한데요!"
지원의 장부에서 다시 한번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포장마차 내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니, 맛있게 드셔놓고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손님!"
지원은 반사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행주를 조리대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능청스럽게 유지하려던 그의 목소리 끝자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베아트리체에게 꽂혔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은빛 마력이 마치 성난 파도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지원은 가마솥 밑바닥에 눌어붙은 구수한 누룽지를 향해 국자를 뻗었다.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부어 노랗게 우려낸 숭늉을 대접에 급히 담았다. 달콤하고 고소한, 시골 할머니의 품속처럼 아늑한 냄새가 붉은 천막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 뚝배기의 뜨거운 불맛을 달래주고, 급격하게 요동치는 체내의 기운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줄 흙의 온기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베아트리체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그녀의 어깨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거 마시고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아직 외상값도 안 치르셨잖습니까."
지원은 떨리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숭늉을 조심스레 흘려 넣었다. 구수한 숭늉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날뛰던 은빛 마력의 불길을 포근한 흙담처럼 감싸 안았다.
"흐... 으응..."
베아트리체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거칠던 호흡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고, 머릿속에서 울리던 장부의 붉은 경고등도 깜빡임의 간격을 늦추기 시작했다.
[! 경고: 손님의 마력 폭주가 일시적으로 억제되었습니다.] [! 상태: 마력 과부하 안정기 (남은 시간: 10분)]
지원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포장마차 환기구 너머로 빠져나간 공기가 묘한 기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선 대파와 육쪽마늘이 하프엘프의 마력 찌꺼기를 용해하며 뿜어낸, 이 세계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독특하고 알싸한 향취가 밤안개 가득한 황무지 광장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낯선 소음이 흘러들었다.
자갈밭을 거칠게 짓밟는 묵직한 가죽 장화 소리. 그리고 철갑옷이 부딪히며 내는 날카롭고 불길한 쇳소리였다.
"멈춰라. 이 방향이다."
낮고 위압적인 사내의 목소리가 붉은 천막 바로 바깥에서 들려왔다.
"황무지 한복판에서 이토록 순도 높은 마력 반응이 감지되다니. 게다가 코를 찌르는 이 기괴하고 매캐한 향은 도대체 뭐지? 아인종 놈들의 불법 밀수품인가?"
천막 천을 투과해 들어오는 차가운 횃불의 그림자가 포장마차 입구를 검게 드리웠다.
지원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세차게 요동쳤다. 바닥에 쓰러진 채 정신을 잃은 하프엘프, 그리고 제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차원 마차.
서슬 퍼런 제국 순찰대의 발소리가 포장마차 문턱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