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입꼬리를 유난히 높이 끌어올려 싱긋 미소를 짓는 것. 그것은 이지원에게 있어 세상이라는 모진 바람을 막아내는 가장 단단하고도 슬픈 방패였다.

어린 시절,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방구석에서 홀로 뚝뚝 떨어지는 싱크대 물소리를 들으며 배운 버릇이기도 했다.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슬픈 기색을 보이면 돌아오는 것은 오직 값싼 동정과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릴 관심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지원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때일수록 오히려 입안에 침을 모아 삼키며 더 활짝 웃어 보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원은 제 눈앞에 둥실 떠오른, 밤하늘의 은하수를 한 방울 떨어뜨려 비벼놓은 듯한 푸르스름한 가죽 책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책의 표지에는 금빛 마력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글씨가 빛나고 있었다.

[차원 유랑 장부]

지원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거칠면서도 따뜻한 가죽 표지를 어루만지자, 손끝을 타고 찌릿한 온기가 심장까지 흘러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려온 순한 길짐승이 콧등을 부벼오는 것만 같은 포근한 감각이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차원 유랑 포장마차의 정식 관리자로 등록되셨습니다. 본 장부는 손님이 흘린 영혼의 고통과 감동을 기록하며, 그 크기만큼 '영혼의 낙찰금'을 정산받아 마차를 가꾸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거참, 목소리 한번 나긋나긋하네. 이왕이면 내 집 마련 대출금도 대신 갚아 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지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쾌활한 혼잣말을 던졌다.

붉은 천막으로 둘러싸인 포장마차 내부는 좁지만 아늑했다. 반질반질하게 닦인 마호가니 재질의 바 테이블, 은은한 주황빛을 내뿜는 황동 가스등, 그리고 한구석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커다란 무쇠 가마솥까지. 세상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고 정처 없이 떠돌던 지원에게, 이 작은 마차야말로 난생처음으로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이라 부를 수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따사로운 감상도 잠시, 둥실 떠오른 장부의 첫 페이지가 스르륵 넘어가며 붉은빛의 경고 글귀가 허공을 채우기 시작했다.

[★ 생존 계약 조항 경고 ★] - 마차의 연료인 '차원 조각' 잔여량: 3.2% (한계선 도달, 깜빡임 발생) - 정산 기한: 72시간 00분 00초 (카운트다운 시작) - 제약 조건: 기한 내에 새로운 손님의 '진실한 영혼의 치유 기록(치유의 눈물)'을 장부에 올리지 못할 경우, 마차는 영원히 빛이 들지 않는 절대 고립의 허공 속에 조난당합니다.

붉게 점멸하는 숫자들을 보며 지원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조난이라니. 그것도 빛도 안 드는 허공에? 아무리 월세 없는 무허가 마차라지만, 연체 이자가 너무 살벌한 거 아냐?"

지원은 뒷목을 긁적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장부에 적힌 규칙은 정교하고도 무자비했다. 손님들에게 음식을 거저 퍼주는 다정한 자선사업가 놀이는 허용되지 않았다. 식재료의 남은 물량을 꼼꼼히 확인하고, 손님에게서 정산받은 감정의 크기를 실물 재화로 바꾸어 영지 통행료를 내거나 마차의 방어 성능을 올려야만 이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철저한 경영과 생존의 결합이었다.

지원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마차 옆면에 달린 커다란 나무 셔터를 힘껏 밀어 올렸다.

드르륵!

셔터가 열리자마자 뺨을 때리는 것은 매섭고 싸늘한 밤바람이었다. 지독한 안개 냄새와 함께 가슴을 턱 막히게 만드는 황량한 흙먼지가 천막 안으로 들이쳤다.

그곳은 제국의 가장 어두운 구석, 버림받은 아인종들과 빈민들이 숨죽여 살아가는 '안개의 황무지' 광장이었다.

저 멀리 거대하게 솟아오른 잿빛 성벽은 마치 괴물의 이빨처럼 날카로웠고, 광장 구석구석에는 허물어진 마차 바퀴와 썩어가는 가문비나무 판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회색 수채화 물감을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듯한 죽음의 땅이었다.

"풍경 한번 참 삭막하네. 겨울철 얼어붙은 골목길보다 더해."

지원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차가운 먼지를 털어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위기가 닥쳐올수록 손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생각에 잠겨 발을 동동 구르느니, 빗자루를 한 번 더 쓸고 그릇을 한 번 더 닦는 편이 마음의 평온을 지켜주었다.

지원은 바 테이블 밑에서 단단하게 잘 마른 참나무 장작을 꺼내 아궁이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러고는 부싯돌을 부딪쳐 타오르는 불씨를 던져 넣었다.

타닥, 타다닥.

마른 나무가 열기를 머금으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이 가마솥 밑바닥을 핥아 올리자, 얼어붙어 있던 포장마차 내부가 서서히 봄볕 같은 온기로 채워졌다.

지원은 가마솥에 맑은 우물물을 가득 채우고, 미리 핏물을 빼둔 큼직한 사골 뼈를 아낌없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 마차의 식료품 창고에서 가장 귀하게 보관되어 있던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이세계 엘프들이 아무리 잘나서 이슬만 먹고 산다 해도, 우리 한국인의 매운맛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걸."

지원이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은 희고 단단한 육쪽마늘과 푸른 생기가 넘쳐흐르는 조선 대파였다.

이 식재료들은 평범한 채소가 아니었다. 장부의 특별한 기운을 받고 자라나, 마력의 뒤틀림을 치료하고 몸속의 어두운 독기를 씻어내는 신비한 효능을 품고 있었다. 다만 너무 향이 강하고 자극적이어서, 마법을 쓰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번쩍 정신이 들게 만드는 독특한 처방전이었다.

탕! 탕!

지원이 칼등으로 육쪽마늘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마늘 고유의 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뒤이어 대파를 굵직하게 썰어내자, 알싸한 채즙이 허공에 흩어지며 황무지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단숨에 지워버렸다.

가마솥의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투명했던 물이, 사골 골수에서 배어 나온 깊은 진액과 어우러지며 점차 뽀얗고 걸쭉한 우윳빛으로 변해갔다. 구수하다 못해 코끝을 찡하게 울리는 진한 고기 육수의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타고 포장마차 밖으로 흘러넘쳤다.

그 향기는 실로 경이로웠다.

황무지의 차가운 밤안개를 가르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굶주린 이들의 코끝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함과는 결이 다른, 뼛속까지 시린 계절에 어머니가 끓여주던 아랫목의 온기 같은 냄새였다.

지원은 황동 가스등의 밸브를 조금 더 열었다.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포장마차의 붉은 천막 주위로 은은하고 따스한 노을빛 불빛이 부채꼴 모양으로 흩어졌다. 어둠과 안개로 가득 찬 황무지 한가운데에, 마치 따스한 등불을 켠 작은 섬 하나가 둥실 떠오른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자, 장사 시작해 볼까."

지원은 뚝배기 그릇들을 따뜻한 물에 행구며 입가에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장부의 카운트다운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고, 이 척박한 땅에서 누가 가장 먼저 이 온기를 찾아 문을 열어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스스스스─.

천막 밖의 짙은 밤안개 사이로 기이한 소리가 흘러들었다.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 그리고 무엇인가를 억지로 참아내려는 듯한 짐승 같은 신음이었다.

지원은 그릇을 닦던 손을 멈추고 천막 입구를 가만히 응시했다.

바람을 타고 다가오는 공기 속에는 쇠붙이의 서늘한 냄새와, 찌릿찌릿하게 살판을 자극하는 불안정한 마력의 파동이 섞여 있었다.

펄럭!

거센 바람과 함께 마차의 붉은 천막 한쪽이 거칠게 찢어질 듯 젖혀졌다.

"앗 차가워라."

지원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천막 틈새로 들이닥친 것은 차가운 밤바람만이 아니었다. 흙먼지와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인형(人形)의 존재감에, 포장마차 내부의 온도가 순식간에 급하강하는 듯했다.

은빛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채, 어깨를 거칠게 들썩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귀는 끝이 가늘고 뾰족하게 뻗어 있었으나, 그 귀한 하프엘프의 상징은 여기저기 긁히고 피딱지가 앉아 볼품없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지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눈동자였다.

맑은 호수 같아야 할 은빛 눈동자는 만성 마력 폭주로 인해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가에는 미처 마르지 못한 분노의 열기가 서려 있었다.

"인간 놈..."

그녀는 짐승처럼 쉭쉭거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이가 다 빠진 식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칼끝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 끝이 가리키는 방향은 정확히 지원의 목덜미였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당장 꺼져, 그렇지 않으면 이 칼로 네 목구멍을 뚫어버릴 테니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걸음걸이였으나, 그녀가 뿜어내는 살기만큼은 진짜배기였다.

지원은 자신을 향해 겨눠진 칼날을 바라보면서도, 특유의 방어기제인 싱글벙글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한층 더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이고, 손님. 개업 첫날부터 칼춤이라니, 제 포장마차가 그렇게 마음에 쏙 드셨나 봅니다?"

서슬 퍼런 칼날이 주황색 가스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일렁였다. 금방이라도 목줄기를 꿰뚫을 듯 기세등등한 위협이었지만, 그녀의 움켜쥔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얇은 천 옷 사이로 드러난 손목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손가락바닥에는 굳은살과 마찰로 생긴 붉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웃어...?"

베아트리체의 미간이 좁혀졌다. 칼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이가 빠진 쇳소리가 진동을 타고 작게 울렸다.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경비병을 부르며 발악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검은 머리 청년은 마치 봄날의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나른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기묘한 여유가 도리어 그녀의 경계심을 바짝 자극했다.

"수작 부리지 마라. 네놈들이 우리를 이 사막 구석에 처박아 두고도 모자라, 이제는 독약이라도 풀어서 씨를 말리려는 속셈이냐?"

"독약이라니요. 그렇게 단가가 비싼 건 저희 마차 재고 목록에 없습니다."

지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 너머,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으로 향했다.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뾰족한 귀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마력 폭주로 인해 온몸의 순환계가 뒤틀려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태였다. 마치 과부하가 걸려 곧 터져버릴 것 같은 마력로를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동시에 지원의 시야 한구석에서 푸르스름한 가죽 장부가 격렬하게 빛을 뿜었다.

[! 경고: 첫 번째 잠재적 단골손님 감지] - 대상: 하프엘프 '베아트리체' (중증 마력 무기력증 및 오염 상태) - 위험도: 매우 높음 (영혼의 붕괴율 87%) - 남은 정산 시간: 71시간 52분 14초 *주의: 손님의 생명력이 소진될 경우, 첫 정산 기회는 영원히 소실되며 차원 조난 절차가 즉시 개시됩니다.

'시간이 없어.'

지원의 입꼬리가 조금 더 높이 올라갔다. 속에서 땀이 차오르는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가마솥 앞으로 향했다.

"내 말이 안 들려?! 움직이지 마!"

베아트리체가 쇳소리를 내며 칼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지원은 개의치 않고 길쭉한 나무 국자를 들어 가마솥의 뽀얀 육수를 휘저었다. 가마솥 안에서 뼈와 살이 녹아내리며 만들어낸 묵직한 소용돌이가 가스등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그와 동시에, 국자로 들어 올린 뜨거운 사골 육수를 뚝배기에 담아내는 손길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탁.

지원은 미리 준비해 둔 도톰한 나무 받침대 위에 펄펄 끓는 뚝배기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칼등으로 으깬 육쪽마늘 한 큰술과 큼직하게 썬 조선 대파를 듬뿍 얹었다.

치이이익─!

뜨거운 고기 기름과 육수가 마늘, 대파의 차가운 수분과 만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포장마차 안은 알싸하면서도 고소하고, 또 뼛속까지 뜨끈하게 만들어줄 것 같은 진한 향으로 가득 찼다.

그 향기가 바람을 타고 베아트리체의 코끝으로 스며든 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건 무슨 마법인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내뿜는 인위적이고 차가운 마력의 향이 아니었다. 대지 깊은 곳에서 움튼 생명의 기운이 가득 담긴, 아주 낯설지만 본능적으로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자극적인 향기였다. 마늘과 대파가 지닌 특유의 해독 성분이 공기 중에 퍼지자, 그녀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지독한 두통이 아주 미세하게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지원은 뚝배기 옆에 놋쇠 숟가락과 젓가락을 정갈하게 놓아두며, 테이블 너머의 그녀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법이 아니라 국밥입니다. 뼈를 고아 만든 따뜻한 물에, 몸을 보해주는 뿌리채소를 넣었지요. 칼을 휘두르든 제 목을 베든 그건 손님 자유입니다만."

지원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이 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일단 배를 채우고 나서 생각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굶어 죽..."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베아트리체의 배꼽 밑에서 꼬르륵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막한 포장마차 내부에 너무도 선명하게 울린 소리였다. 그녀의 하얀 뺨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듯 붉게 물들었다. 수치심과 분노로 가득 찬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칼끝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서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원은 모르는 척 시선을 천장으로 올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원래 밤바람이 불면 배가 더 고픈 법이지요. 식기 전에 드셔보세요. 공짜는 아닙니다. 맛이 없다면 그 칼로 마차 천막을 다 찢으셔도 좋습니다."

베아트리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그녀의 뺨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황무지에서 오랜 시간 굶주림과 마력 오염에 시달려온 그녀의 몸은, 이미 이 향긋한 온기에 굴복하기 직전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칼을 쥔 손을 내리며, 뚝배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우웅─!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은빛 마력이 갑자기 기괴하게 뒤틀리며 불꽃처럼 타올랐다. 베아트리체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 한 줄기가 조용히 흘러내렸다.

"아... 윽...!"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식칼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뒤이어 그녀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지원의 눈앞에 둥실 떠오른 장부의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며, 날카로운 경고음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 경고: 손님의 마력 폭주가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 붕괴율 99% ─ 영혼 소실까지 남은 시간: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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