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김 시중이 직접 정벌군의 총수가 되겠다고 나섰단 말이지."

개경 군기감 내부의 밀실. 가죽 끈으로 묶인 서신을 내려놓는 민선우의 손끝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서늘한 새벽바람이 격자창을 흔들며 들어와 등잔불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편전에서 김부식이 인종 황제 앞에 붓을 꺾어 던지며 서경 정벌의 장계를 올린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문벌의 수장이 필설 대신 무력을 쥐겠다는 것은, 조정의 법리 싸움으로 제어할 수 없는 영역으로 판을 끌고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예, 나으리. 지금 대궐 안팎이 온통 뒤집어졌습니다. 호부와 형부의 서리들마저 김 시중의 눈치를 보느라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정보를 물어온 민수연이 그림자 속에서 담담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으나, 굳게 쥔 주먹 틈으로 미세한 긴장이 배어 나왔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에 펼쳐진 고려의 행정 지도, 그중에서도 개경과 남경(한양)을 잇는 가도의 보급로에 멈춰 있었다.

"김부식이 군대를 움직이려면 명분이 필요하고, 그 명분을 지탱할 자금이 필요하다. 사대부의 기강을 운운하며 칼을 뽑았으나, 정작 그 칼을 벼릴 쇠와 군량은 어디서 나오겠느냐."

선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결국 서경파 군장들과 결탁한 남경의 이권이다."

선우는 소매 안에서 묵직한 가죽 첩보 조서를 꺼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서경 천도파 군벌들이 남경 일대의 토지와 보급로를 불법으로 장악하고 사유화한 내역이 정량적으로 기록된 보고서였다.

건조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선우는 먹을 갈았다. 검은 먹물이 벼루 위에서 소리 없이 번져 나갔다.

"수연아."

"예."

"이 조서를 내시부의 황실 제단으로 직접 전송해라. 황제의 침전 바로 앞까지 가야 한다. 김부식이 정벌군 편성을 위한 어새를 받기 전에, 황제의 눈에 이 탐욕스러운 장부들이 먼저 밟혀야 할 것이다."

"즉시 움직이겠습니다."

수연이 조서를 받아 품에 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선우는 붓을 내려놓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명치끝에서부터 타오르는 듯한 열감이 치밀어 올랐다. 머릿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사물서사 영안의 대가, 역사의 흐름을 억지로 비틀 때마다 찾아오는 지독한 역풍이 전신을 옥죄기 시작했다.

"컥……!"

입안 가득 비릿한 혈향이 퍼졌다. 선우는 소매로 입가에 흐르는 붉은 피를 훔쳐냈다. 그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흐려졌다가, 이내 더 선명하게 푸른빛의 텍스트를 띄우며 돌아왔다.

**[사서 조회: 고려사 병지(兵志) - 주현군 병장기 수급 명세서]** * **대상**: 서경 출신 주현군 사령관 조진(趙珍) 및 이단(李端)의 비밀 병기 대장. * **은폐된 이권**: 개경 무기 암시장에서 군기감 소유의 정철(精鐵) 3,400근을 뇌물로 수령하여 사병용 사갑(私甲)으로 개조. * **배후 세력**: 어사대 장령 소정과 민씨 가문 안주인의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

선우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첫 번째 복선의 고리가 마침내 그의 손안에서 완전히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1화에서 영안으로 밀교 제기에 새겨진 문장을 통해 간파했던 어사대 장령 소정과 가문 안주인 간의 밀약. 그리고 이번 가택 재판에서 어사대의 압박을 무력화했던 상속 문서의 불법 압관인 흔적. 그 모든 카르텔의 뿌리가 결국 서경 군벌들과 개경 무기 암시장의 밀거래로 이어져 있었다.

"결국 한 통속이었군."

선우는 차가운 침묵 속에서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

같은 시각, 군기감 지하 야철장.

화덕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열기가 어두운 지하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쇠망치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가운데, 한길이 땀에 젖은 얼굴로 흙투성이가 된 가죽 자루를 선우 앞에 내려놓았다.

"나으리, 가져왔습니다. 흥국사와 개경 인근 사찰 다섯 곳의 뒷마당에서 긁어모은 흙입니다."

자루를 열자 쾨쾨하고 짠 내가 진동하는 흰색 결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사찰 화장터에서 나온 초석(질산칼륨)이옵니다. 4화에서 소인이 말씀드렸던 퇴적 농축 수집법으로 정제한 것입니다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길의 목소리에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사찰의 승려 놈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절의 사리탑 무단 중수권과 절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불법(佛法)에 따라 사찰의 재산이라며, 예부의 승록사(僧錄司)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협박 중입니다. 이대로라면 화약 양산은커녕 군기감 역부들이 역모죄로 몰릴 판입니다."

승려들의 반발과 그 뒤에 버티고 선 개경 문벌의 법적 농간. 4화에서 심어두었던 소유권 제한 규정의 올가미가 그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선우는 흙을 한 줌 쥐어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거친 모래알 사이로 하얀 초석 가루가 묻어났다.

"고공 한길."

"예, 나으리."

"고려율 제32조 '사원전 몰수령'과 군기감의 '비상 군수품 비축령'을 대조해 본 적이 있느냐?"

한길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을 모르는 기술자에게 율법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선우는 건조한 음성으로 법리를 읊조렸다.

"사찰의 소유권은 황실이 하사한 공음전과 사패지에 한한다. 허나 화장터와 상여를 두는 묘역은 황실의 사패지 구역 외곽에 위치한 유휴지다. 더욱이 전쟁을 대비한 군기감의 초석 수집은 천자의 대권에 속하는 국방의 의무에 해당한다. 사리탑 중수를 명목으로 황실의 군수 자원을 점유하려는 행위는 고려율 제104조 '군정 방해죄'로 다스려 삼족을 적몰할 수 있다."

선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

"내 이미 예부와 승록사에 이 법리적 해석과 함께, 흥국사 주지가 개경 문벌들과 결탁하여 사리탑 밑바닥에 은닉해 둔 밀무역 금괴 400냥의 위치가 적힌 고발장을 발송했다. 그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순간, 흥국사의 종소리는 영원히 멈추게 될 것이다."

한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선우가 제시한 정량적 수치와 철저한 법리적 차도살인 앞에, 불교계가 구축한 수백 년의 특권 장벽이 단 한 장의 상소문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연간 초석 수집량 5,000근 확보. 정제 비율 8할 이상 유지. 이것이 우리가 이번 달 안에 달성해야 할 정량적 목표다. 사찰의 반발 따위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

선우의 서슬 퍼런 명령에 한길은 깊이 숙여 절했다.

"나으리의 혜안에 소인, 그저 감복할 뿐입니다. 이 한길, 목숨을 바쳐 화약을 쏟아내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지하 야철장의 두꺼운 나무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열렸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쇳소리 나는 갑옷을 입은 무장 세 명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고려 정규군의 패도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놈이 감히 서경 주현군의 군수품에 손을 대는가!"

선두에 선 거구의 무장, 서경파 사령관 조진의 충복이자 천호(千戶)인 배극렴(裵克廉)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뒤로 서경 무장들이 사나운 기세로 무기를 뽑아 들었다.

"네놈이 군기감을 장악하고 서경으로 갈 병장기를 가로챈 민씨 가문의 비천한 서자 놈이냐?"

배극렴이 칼끝을 선우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칼날의 서늘한 기운이 선우의 뺨을 스쳤다. 한길이 경악하며 선우의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선우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선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의 눈앞에 다시 한번 푸른빛의 글자가 명멸했다.

**[사물서사 영안: 배극렴(裵克廉)]** * **삼대조 비리**: 조부 배만춘이 예종 조에 서경의 황무지 개간을 빙자하여 군량미 2,000석을 횡령하고 가짜 전공을 보고함. * **현재 약점**: 정지상의 밀지를 받고 군기감의 화약 도면을 탈취하려 함. 소지품 중 서경파의 불법 병계(兵契) 문서 존재.

선우는 칼날을 응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으나, 그 안에 담긴 안개의 무게는 공간을 압도했다.

"배극렴. 서경 천호."

"뭐라? 이 서자 놈이 감히 내 이름을……!"

"조부 배만춘은 예종 8년, 서경 동부 벌판의 군량미 2,000석을 사유화하여 가문의 사병을 기르는 데 썼지. 부친 배식은 인종 즉위년에 서경의 토착 군벌들과 결탁하여 황실의 정철 500근을 빼돌렸고."

배극렴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칼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놈이…… 그걸 어찌……!"

"그리고 지금 네 품속에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 정지상이 서경의 무장들에게 내린 비밀 병계 문서가 들어 있겠지. 개경의 무기 암시장에서 빼돌린 병장기들의 일련번호와 뇌물 액수가 적힌 장부 말이다."

선우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칼끝이 그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선우의 기세에 질린 배극렴은 오히려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고려율 제7조,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군기 유출 및 사리 사욕죄는 삼족을 멸하는 참형이다. 또한 황실의 허가 없이 사적으로 군세를 모으는 자는 즉시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걸게 되어 있다."

선우가 손을 뻗어 배극렴의 칼날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붉은 피가 그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선우의 표정에는 고통의 기색조차 없었다. 오직 잔인한 지배력만이 그의 눈에 머물러 있었다.

"네놈들의 삼대조 조상 비리부터 지금 품고 있는 역모의 증거까지, 모두 황실 어사대에 접수되었다. 이제 누가 비천한 죄인인지 말해 보아라."

"으, 으윽……."

배극렴의 무릎이 꺾였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쥐고 있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무장들 역시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정지상의 권세만을 믿고 날뛰던 서경의 맹수들이, 선우가 펼쳐놓은 법리와 정보의 그물망 앞에서 순식간에 이빨 빠진 개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군기감 관원들은 들어라."

선우가 상처 입은 손을 소매로 감싸며 차갑게 명령했다.

"이 역적 무리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그들이 소지한 모든 병장기와 군마를 군기감의 소유로 몰수한다. 저항하는 자는 즉시 처단하라."

"예, 나으리!"

군기감의 야철군들이 일제히 무기를 쥐고 서경 무장들을 압송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신분 반전이자, 서경파의 군사적 도발을 법리적으로 짓밟아버린 쾌거였다.

***

그날 깊은 밤.

군기감의 폭풍이 지나간 후, 선우의 개인 집무실은 기묘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촛불이 방 안의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고 있는 가운데,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명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으리, 손님들이 당도하셨습니다."

한길의 목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거친 가죽 옷과 낡은 경갑을 입은 무장 세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변방의 찬 바람과 거친 전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들은 김부식의 개경 문벌에도, 묘청의 서경 파벌에도 속하지 못한 채 조정에서 소외당하던 무소속 신진 무장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장수, 조원(趙源)이 선우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민 부사 나으리. 낮에 군기감에서 서경의 천호들을 무릎 꿇리신 위세를 들었습니다. 또한 나으리와 고공 한길이 개량하신 화포의 위력 역시 우리 무장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조원의 눈빛에 뜨거운 열망이 서려 있었다.

"저희는 문벌의 가신도, 서경의 광신도 아닙니다. 오직 고려의 국경을 지키고자 하는 무관들일 뿐입니다. 허나 조정은 당파 싸움에 미쳐 우리에게 녹봉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있습니다. 나으리께서 만일 이 화포를 앞세운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신다면, 저희는 기꺼이 나으리의 칼과 방패가 되겠습니다."

선우는 그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극단적인 인간 불신을 가진 그였으나, 이들이 가진 물리적 힘과 화포의 결합이 가져올 시너지는 철저한 계산기 위에서 완벽한 답을 도출해 내고 있었다.

"좋다."

선우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문벌의 사병이 아니다. 황제의 직속 화력, '중앙집권 화포군'을 결성한다. 너희에게는 고려 최고의 화포와 마르지 않는 군량을 지원할 것이다. 그 대가로 너희는 오직 나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철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무소속 무장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드디어 선우의 손아귀에 고려를 개조할 강력한 군사적 기반이 움트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동맹의 기쁨은 그리 길지 않았다.

콰창!

집무실의 창문이 거칠게 열리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파발마의 전령이 방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등에는 서경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나, 나으리……! 비보입니다!"

전령은 피를 토하며 선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서경에서…… 묘청 무리가 마침내 황제를 참칭하고 대위국(大爲國)을 선포했습니다! 지금 대위국의 기마 전령들이 개경 성문을 향해 무단으로 말을 달리며 격문을 뿌리고 있사옵니다! 개경 성문이…… 곧 닫힐 것입니다!"

편전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이 방 안을 휩쓸었다. 묘청의 반란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선우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리며, 그의 시야에 다시 한번 붉은 경고의 텍스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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