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강! 쨍강! 쨍강!
귀를 찢는 철제 징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군기감 지하 야철장의 흙벽이 진동에 부르르 떨렸다. 환기구 사이로 매캐한 화약의 질산염 냄새 대신, 마른 목조가 타들어 가며 내뿜는 검붉은 연기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도령! 불이…… 불이 서고 쪽에서 난 모양입니다!"
한길이 들고 있던 무쇠 주걱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화덕의 열기보다 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성껏 정제해 둔 초석 가루가 든 항아리를 감싸 안는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침착해라."
민선우는 손바닥에 남은 하얀 초석 결정을 털어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동요도 없었다. 도리어 서늘한 안광이 화재의 붉은 그림자 사이로 번뜩였다.
"화약고가 아니다. 불길의 중심은 동편 서고다. 저들의 목적은 화약을 태우는 것이 아니야."
"예? 그게 무슨……."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사술(邪術)이다. 진짜 사냥감은 다른 곳에 있지."
선우의 머릿속 사서(史書) 데이터베이스가 기민하게 작동했다. 개경의 문벌귀족들이 군기감의 기술 독점권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를 무력으로 파괴하기보다 자신들의 수하로 예속시키려 획책해 왔던 역사의 궤적들. 그들이 노릴 것은 단 하나였다. 토법 초석 정제법의 상세 도면, 그리고 그것을 쥐고 있는 민수연이었다.
"한길, 네가 거느린 야철군(冶鐵匠)들을 즉시 서고의 배후 대피로인 북문 협문으로 이동시켜라. 이미 일주일 전에 일러둔 대로, 쇠사슬과 장작용 도끼를 지참하고 대기하라 했을 텐데."
"예, 예! 놈들은 이미 세작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북동쪽 숲에 숨어 있습니다!"
"가자. 쥐새끼들이 덫에 걸릴 시간이다."
선우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어두운 지하 통로를 빠져나갔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자로 잰 듯 정확했다.
***
군기감 동편 서고 뒷길, 울창한 대나무 숲이 바람에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화재의 소란을 틈타 검은 옷을 입은 괴한 셋이 한 여인의 팔을 결박한 채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인의 입은 거친 삼베천으로 막혀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꺾이지 않은 채 납치범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민수연이었다. 그녀의 품에는 가죽으로 감싼 궤짝이 단단히 들려 있었다. 군기감의 비기가 담긴 도면 궤였다.
"속도를 내라. 어사대에서 순라군을 보내기 전에 서경방(西京坊)의 한옥으로 들어가야 한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이 대나무 숲의 좁은 입구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어딜 바삐 가시나, 양반댁 똥개들아."
달궈진 집게와 무거운 쇠망치를 든 한길의 야철군들이었다. 거친 가죽 앞치마를 두른 장인들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치워라, 천한 대장장이 놈들이!"
세작 하나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휘둘렀다. 쇠붙이가 허공을 가르는 찰나, 야철군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들고 있던 시뻘건 석탄 집게를 그대로 그의 손목에 내리쳤다.
퍽!
"아아악!"
뼈가 부러지는 비명과 함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진 것은 무자비한 난전이었다. 정교한 무술은 없었으나, 평생 쇠를 두들기며 다져진 장인들의 완력은 살수들의 그것을 압도했다. 쇠사슬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놈들의 발목을 낚아챘고, 묵직한 도끼날이 세작들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단 반 다각(茶角)도 되지 않아, 세작들은 바닥에 진흙처럼 짓눌려 신음하고 있었다.
"수연아!"
선우가 대나무 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평소 부하들을 부속품처럼 대하던 그의 냉혹한 얼굴에, 찰나였지만 격렬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수연의 입에 물린 천을 풀어내고 밧줄을 단숨에 끊어냈다.
"도련님…… 아니, 오라버니."
수연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선우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평소 차분하고 비밀스럽던 그녀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가문의 모진 천대 속에서도 울지 않던 여인이었다. 선우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부서질 듯 꽉 쥐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이것은 단순한 도구의 훼손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이 가혹한 난세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믿고 따르던 혈육을 잃을 뻔했다는 본능적인 공포였다.
"다치지 않았다. 그것으로 되었다."
선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수연은 그의 품에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에 안고 있던 가죽 궤를 건넸다.
"도면은…… 지켜냈습니다. 놈들이 제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이것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대가를 치르게 할 시간이다."
선우는 수연을 한길에게 맡긴 뒤, 바닥에 엎어져 피를 토하고 있는 세작 두목에게 다가갔다. 그의 품에서 흘러나온 은제 호패와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종이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선우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 작동]` `- 대상: 은도금 청강석 호패 및 인장` `- 인맥 및 가문 관계: 고려 어사대 장령 '소정'의 사승(師承)이자, 개경 문벌의 거두 김부식의 문하 2인자인 어사대 지평 '이영간(李永幹)'의 밀령인.` `- 은닉된 역사적 사실: 1133년 겨울, 이영간은 흥국사 사리탑 중수 비용 명목으로 호부(戶部)의 공금을 편취하여 서경파의 사보타주 공작 자금으로 세탁함. 민씨 가문의 불법 상속 문서에 압 날인된 어사대 장령의 인장과 동일한 카르텔의 인장임.`
"하윽!"
순간, 선우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울컥 솟구쳤다. 입술 틈새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일시적으로 왼쪽 눈의 시야가 암전(暗轉)되었다. 역사를 비틀고 대상을 파헤친 대가, '역풍(歷史回歸)'의 징벌이었다.
선우는 소매로 피를 닦아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수명 몇 달이 깎여 나가는 고통 따위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놈들의 목줄을 완전히 끊어놓을 수만 있다면.
"민씨 가문의 상속 문서를 위조해 가문의 재산을 강탈하려던 어사대의 불법 사승 카르텔 흔적…… 그리고 흥국사 화장터의 초석 독점권을 가로채기 위해 횡령한 호부의 예산 장부까지. 결국 한통속이었군."
선우는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또 다른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길이 제시했던 '사찰 화장터 초석 농축 수집법'의 법적 소유권 제한 규정 초안이자, 동시에 개경 문벌들이 불법으로 예산을 유용한 명세서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선우가 세작 두목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이것은 너희 상전인 어사대 지평 이영간이 흥국사 승려들과 결탁하여 사리탑 무단 중수를 명목으로 조정 예산을 편취한 명세서다. 그리고 여기에 찍힌 인장은…… 방금 네 품에서 나온 이 호패의 문양과 정확히 일치하지."
"이, 이 무슨…… 네놈이 그걸 어떻게……!"
세작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조정의 최고위층만 접근할 수 있는 호부의 극비 장부가 이 서출 놈의 손에 들려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대나무 숲 너머에서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횃불 무리가 밀려들기 있었다.
"어사대 관원들이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어사대의 순라군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다름 아닌 어사대 지평 이영간과 그의 하수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쓰러진 세작들을 보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군기감에 화재가 발생했다 하여 출동했거늘, 웬 천한 장인들이 사대부의 사가(私家)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단 말이냐!"
이영간이 말 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는 즉시 생포된 세작들을 회수하여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
"지평 어른, 타이밍이 아주 절묘하십니다."
선우가 피 묻은 입술을 쓸어내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한쪽 눈은 여전히 실명 상태였으나, 남은 한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이영간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사악한 무리들은 군기감의 화약 기밀을 훔치고, 관원을 납치하려 한 대역죄인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품에서 아주 흥미로운 물건이 나왔지요."
"흥! 필시 서경의 세작들이거나 무뢰배들일 터! 이들을 어사대로 압송하여 치죄할 것이니 비켜서라!"
이영간이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증거를 없애고 입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고려율(高麗律) 제14조, '국경 및 안보에 위해를 가한 세작의 현장 검거 시, 군기감의 도조(導調) 권한을 지닌 관원은 예부와 형부의 승인 없이 즉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구례에 따르면, 이들은 어사대가 아닌 군기감 야철장의 군법에 따라 처분되어야 합니다."
"무슨 해괴한 소리냐! 서출 놈이 감히 조정의 법도를 논해?"
이영간이 분노로 안면을 찌푸렸다. 그러나 선우는 품에서 왕의 서명이 아닌, 어사대 자체의 '예산 감사 필(畢)' 압인이 찍힌 문서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영간 지평. 당신이 서명한 이 '흥국사 사리탑 중수 예산 공문' 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예산은 군기감이 초석을 수급하기 위해 편성된 국가 방위 예산이었습니다. 당신은 사승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불교계와 결탁하여 이를 사리탑 무단 중수 비용으로 전용했고, 그 과정에서 흥국사의 초석 수집권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맞습니까?"
"이, 이놈이 미쳤구나! 감히 조정의 중신을 무고하다니!"
"무고인지 아닌지는 이 문서에 찍힌 당신의 관인과, 방금 체포된 세작들의 호패에 새겨진 비밀 문양을 대조해 보면 알 일입니다."
선우의 목소리가 숲속에 둥둥 울려 퍼졌다. 주위의 순라군들과 야철군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고려율에 명시된 '사승 카르텔 처벌조'에 의거, 학벌과 인척 관계로 묶여 국가 예산을 횡령하고 기밀을 누출한 자는 그 신분을 불문하고 즉시 파직하며, 가산을 몰수한다 하였습니다. 지평 어른, 당신이 가문의 상속 문서를 위조할 때 썼던 그 더러운 인장이, 오늘 밤 당신의 목을 치는 단두대가 될 것입니다."
이영간은 말 위에서 부르르 떨었다. 선우가 제시한 문서는 완벽했다. 법리적 허점은커녕, 자신들이 그동안 어사대의 권력으로 덮어왔던 온갖 독직 사건의 연결 고리가 단 하나의 문서에 정밀하게 엮여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감히 김부식 대감의 문하를 건드리고도 살아남을 줄 아느냐!"
"김부식 대감이라 하셨습니까."
선우가 차갑게 웃었다.
"그분 역시 이 율법의 그물에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선우는 손을 들어 순라군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개경 부윤의 관원들을 불러들였다. 이미 선우가 사전에 손을 써둔 법적 절차에 따라, 이영간의 공조 혐의를 입증할 호부의 진짜 영수증들이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사대 지평 이영간을 국가 예산 횡령 및 세작 공조 혐의로 즉시 체포하십시오. 거부할 시, 고려 구례에 따라 현장에서 즉결 처분될 것입니다."
부윤의 관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영간은 더는 저항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의 하수인들 역시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철저한 법리적 압살이자, 단 한 치의 틈도 주지 않은 완벽한 차도살인(借刀殺人)이었다.
***
다음 날 아침, 개경 황궁 편전.
서늘한 새벽바람이 궁궐의 기와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인종 황제 앞에 두꺼운 상소문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부러진 붓 한 자루가 뒹굴고 있었다.
김부식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노쇠한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자신의 수하이자 어사대의 브레인이었던 이영간을 비롯해, 개경 문벌의 핵심 실무 관료 수십 명이 단 하룻밤 사이에 예산 횡령과 세작 공조 혐의로 파직 및 유배 처분을 받았다.
"폐하."
김부식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단순한 상소가 아니었다. 맹수의 마지막 포효에 가까웠다.
"조정에 사악한 무리가 법률의 자구를 교묘히 비틀어 사대부의 기강을 흔들고 있나이다. 군기감의 서출 놈이 황실의 권위를 빌려 조정을 도륙하고 있으니, 이는 나라의 근간을 해치는 일입니다."
인종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김부식을 바라보았다. 민선우가 올린 상소와 물증이 너무도 완벽하여, 황제로서도 개경 문벌을 옹호해 줄 명분이 없었던 탓이다.
"김 시중, 허나 이영간이 저지른 죄상이 명백하고 호부의 예산 누수가 확인되었거늘……."
"신, 더는 이 개경의 썩어빠진 필설과 법리 싸움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나이다."
바스락.
김부식이 소매 안에서 거친 가죽으로 감싼 장계를 꺼내 황제의 발치 아래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에는 광기와도 같은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서경의 묘청 무리가 천도를 빙자하여 군세를 모으고 천자국을 참칭하려 하나이다. 저 가당치 않은 반역의 무리를 토벌하지 않고서는 고려의 안정을 논할 수 없습니다. 신, 직접 군부의 정예를 이끌고 서경의 벌판으로 나아가겠나이다. 폐하, 신에게 정벌군의 총수 권한을 하사해 주시옵소서!"
붓을 꺾은 문벌의 수장이 마침내 펜 대신 칼을 쥐겠노라 선언한 순간이었다.
편전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경의 대위국 참칭 조짐과 개경 문벌의 군사적 움직임이 맞물리며, 고려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전란의 서막이 마침내 그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