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바짓가랑이를 움켜쥔 전령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와 민선우의 가죽신을 적셨다. 사정없이 떨리는 전령의 눈동자에는 서경에서부터 불어닥친 광풍의 공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서경에서…… 금빛 용을 그리고 스스로 천자라 칭했사옵니다. 묘청 무리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사를 일으켰사옵니다!"

전령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갈라졌다. 집무실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충성에 찬 맹세를 바치던 조원과 무소속 무장들의 손이 일제히 허리의 칼자루로 향했다. 쇠붙이가 부딪쳐 내는 날카로운 파음이 사방을 뒤흔들었으나, 선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전령이 바닥에 떨어뜨린 서경의 격문으로 향했다.

'올 것이 왔군.'

삼국사기의 행간에 숨겨져 있던 역사의 소용돌이가 마침내 현실의 장벽을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 선우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핏방울이 튄 격문을 집어 들었다. 거친 닥종이 위에 쓰인 글귀들은 단순한 반란의 선언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개경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뿌리 뽑겠다는 서경 토착 군벌과 사찰 세력의 피비린내 나는 이권 선언서였다.

밖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개경 성문이 닫히고 있음을 알리는 비상종이었다. 도성 전체가 거대한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드는 소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밀려들었다. 귀족들의 수레가 가산을 싣고 남쪽으로 도망치기 위해 자갈길을 짓밟는 비명, 군사들의 다급한 군화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나으리, 이대로 두면 도성 안의 서경 첩자들이 먼저 움직일 것입니다."

조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했다. 무관의 직관이 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선우는 격문을 구겨 쥐며 차가운 어조로 명령했다.

"조 장군. 지금 즉시 그대의 병력을 이끌고 황궁의 외곽을 포위하라. 허가받지 않은 모든 종친과 문벌의 사병들이 어도(御道)에 발을 들이는 순간, 반역으로 간주해 참한다."

"황명이 없어도 괜찮겠습니까? 김부식의 개경파들이 당장 탄핵 상소를 올릴 것입니다."

"황명은 내가 받아온다. 그대들은 내 명령만 따르면 된다."

선우의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인간을 도구로 취급하는 그의 냉혹한 이성이 가장 효율적인 방어 대형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선우는 곧바로 집무실을 나와 어사대로 향했다. 도망칠 준비로 아수라장이 된 관청들 사이에서, 그는 품 안의 가죽 주머니를 꽉 쥐었다. 그 안에는 민씨 가문의 종손들이 대대로 보관해 온 상속 문서가 들어 있었다.

어사대 장령의 집무실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가자, 짐을 싸던 장령 소정(蘇靖)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류더미를 떨어뜨렸다.

"민 부사! 이 무슨 무례인가! 지금 서경의 도적들이 들이닥치는데 어찌 도성을 지킬 방책은 세우지 않고 여기로 온단 말인가!"

소정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선우는 대답 대신 상속 문서를 소정의 책상 위에 거칠게 던졌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장령 어른."

소정이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펼쳤다. 문서의 하단, 붉은 주사로 찍힌 어사대의 압관인(押官印)을 본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것은……."

"어사대의 압관인은 황실의 공무에만 쓰이게 되어 있는 법. 허나 이 문서에 찍힌 인장에는 미세한 칼자국이 나 있군요. 십오 년 전, 장령 어른의 스승이자 문벌의 거두였던 이자겸의 가신들이 사사로이 위조해 쓰던 바로 그 가인(假印)입니다. 민씨 가문의 안주인과 장령 어른이 나눈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의 흔적이 이 문서 하나에 고스란히 박혀 있단 뜻이지요."

선우의 목소리는 낮고 집요하게 소정의 목을 죄어갔다.

"이 사실이 형부에 알려지면, 장령 어른뿐만 아니라 그대 가문 전체가 재산 몰수와 유배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고려 율법 제삼십이 조, '위조된 어인을 사용해 사가(私家)의 재산을 증식한 자는 참형에 처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민, 민 부사…… 제발……."

소정이 무릎을 꿇었다. 권력의 단맛에 취해 살던 문벌 귀족의 민낯은 위기 앞에서 이토록 나약했다.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어사대의 이름으로 두 가지 칙령을 초안하여 날인하십시오."

선우는 미리 준비해 온 서찰을 내밀었다.

"첫째, 개경 내의 모든 사찰이 보유한 화장터와 그 부속 토지를 군기감의 군수 물자 징발 구역으로 임시 지정한다. 둘째, 한길이 제시한 '사찰 화장터 초석 퇴적 농축 수집법'의 특허와 독점권을 군기감에 귀속시키며, 이에 불응하는 승려들은 반역죄로 다스린다."

이는 지난 겨울부터 한길과 함께 준비해 온 화약 양산의 마지막 걸림돌을 치우는 작업이었다. 그동안 개경의 사찰들은 자신들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한다며 초석 채굴을 격렬히 반대해 왔고, 문벌 귀족들은 그들의 배후에서 사리탑 중수 비리를 저지르며 이를 묵인해 왔다.

소정은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어 선우가 요구한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불법 사승 카르텔의 족쇄에 묶인 그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이것으로…… 된 것인가?"

선우는 식은 도장을 거두어 품에 넣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덕분에 고려의 화약이 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장령 어른의 공은 황상께 잘 보고드리지요."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황제의 편전으로 향했다. 문벌의 치부를 율법의 칼날로 도려낸 통쾌한 행정전의 승리였다.

***

편전 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인종은 옥좌 위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고,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문벌의 원로들은 황제를 에워싸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폐하! 서경의 역적들이 대위국을 선포하고 진격해 오고 있사옵니다! 이는 필시 황실 내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급진적인 무리들이 조정을 어지럽혀 하늘이 노하신 것이옵니다! 당장 서경파와 내통한 자들을 색출하고,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셔야 하옵니다!"

김부식의 주장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사대주의의 극치였다.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금나라의 처분만을 바라는 늙은 관료들의 비명이었다.

"금나라가 어찌 우리를 돕겠소! 그들이 도성에 들어오는 순간, 고려는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힐 것이오!"

인종이 머리를 감싸 쥐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눈동자는 극도의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편전의 무거운 문이 열리며 민선우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무장을 갖춘 조원이 버티고 서 있었다.

"부사 민선우, 폐하를 뵙옵니다."

"민 부사! 네가 어찌 이 엄중한 자리에 무장을 대동하고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이냐!"

김부식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선우는 김부식을 철저히 무시한 채, 인종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흔들리는 황제의 마음을 꿰뚫었다.

"폐하. 문벌들의 나약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옵소서. 저들은 지금 나라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문과 공음전을 지키기 위해 폐하를 금나라의 속국으로 바치려 하는 것입니다."

"뭐라? 이 서출 놈이 감히 조정의 영수들을 모함하는구나!"

김부식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황제를 압도하는 기도가 실려 있었다.

"서경의 묘청은 간사한 술수로 백성을 현혹한 역적일 뿐입니다. 그들이 내세운 대위국은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철저한 법리와 화력만이 이 난국을 수습할 수 있사옵니다. 폐하, 지금 당장 도성 방위의 전권을 저에게 위임해 주시옵소서. 만일 사흘 안에 도성을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인종은 선우의 확신에 찬 태도에서 기묘한 구원의 밧줄을 보았다. 나약한 황제에게는 지금 자신을 대신해 칼을 휘둘러줄 냉혹한 도구가 필요했다.

"민 부사…… 그대에게 도성 방위의 전권을 부여하노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역적들을 막아내라!"

"황공무지하옵니다, 폐하."

선우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늙은 문벌들의 탄식 소리가 편전을 가득 채웠지만, 이미 주도권은 선우의 손으로 넘어온 뒤였다.

***

황궁을 나온 선우는 조원과 함께 도성 방비 도면(都城防備圖)이 펼쳐진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

선우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자, 그의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거친 양 가죽에 그려진 도성 방비 도면 위로, 붉은색 글씨들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히며 떠올랐다.

[도성 방비 도면 - 세부 이권 및 배신 경로] - 우측 하단 여좌문(女左門) 위수관: 어사대 분사 이영식. - 이권 관계: 서경의 반란군 장수 조광으로부터 황금 오백 냥과 서경 천도 후 예부 시랑 관직을 약조 받음. - 음모: 금일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 야음을 틈타 여좌문의 빗장을 풀고 서경의 별동대 300인을 도성 내부로 잠입시킬 계획임.

"윽……!"

순간, 머리가 깨질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선우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울컥 솟구쳤다.

"쿨럭! 쿨럭!"

그는 급히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하얀 비단 소매가 순식간에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역사를 바꾸려는 시도에 따른 세계의 복원력, '역풍(歷史回歸)'의 대가였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일순간 왼쪽 귀의 청력이 완전히 소실되어 웅웅거리는 이명만이 귓전을 때렸다.

"나으리! 괜찮으십니까?"

조원이 놀라 다가오려 하자, 선우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피 묻은 소매를 거칠게 닦아낸 선우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먼지가 목에 걸렸을 뿐이다."

그는 이명을 견뎌내며 도면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강하게 찔렀다. 여좌문이었다.

"조 장군. 오늘 밤 해시, 여좌문으로 향한다."

"여좌문 말입니까? 거기는 동쪽 외곽의 한적한 문이라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곳입니다만……."

"그렇기에 쥐새끼들이 드나들기 가장 좋은 곳이지. 한길을 불러라. 군기감에서 개량한 최신형 '토법 화포'와 화약병들을 여좌문 옹성 뒤편에 배치한다."

선우의 목소리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조원은 그의 귀신같은 통찰력에 소름이 돋았으나, 이내 군례를 올리며 물러갔다.

***

해가 저물고, 개경 도성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안개가 여좌문 주위를 자욱하게 감싸 안았다.

성벽 위, 위수관 이영식은 초조한 듯 연신 손을 비벼댔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을 헤치며 성문 밖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스스슥.

성문 밖 갈대숲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신호였다.

이영식은 침을 꿀꺽 삼키며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빗장을 풀어라. 서경에서 오시는 귀한 손님들이시다."

"하지 마라, 이 늙은 쥐새끼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이영식이 경악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횃불이 일제히 밝혀지며, 민선우와 조원, 그리고 무장한 군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영식의 얼굴이 순식간에 수포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민, 민 부사…… 네놈이 어찌 여기에……."

"고려 율법 제사십이 조, '적과 내통하여 도성의 문을 열어준 자는 능지처참에 처하고, 그 가솔은 노비로 삼는다.' 이영식, 네놈의 탐욕이 네 가문의 대를 끊는구나."

선우의 차가운 음성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원의 군사들이 달려들어 이영식과 그의 수하들을 제압했다. 단 한 마디의 항변도 허용되지 않는 완벽한 진압이었다.

그때, 성문 밖에서 철갑 옷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서경의 별동대 300여 명이 열린 문틈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장수가 칼을 치켜들며 외쳤다.

"성문이 열렸다! 들어가서 개경의 늙은이들을 도륙하라!"

그러나 그들이 성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마주한 것은 텅 빈 가도가 아니었다.

둥글게 늘어선 옹성벽 위로 일제히 횃불이 밝혀졌고, 그 중심에는 검은 무쇠 통들이 그들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한길과 그의 화약병들이 화포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준비를 마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사격하라."

선우의 나직한 명령이 떨어졌다.

치이익!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어둠을 가른 뒤, 이내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콰앙!

야철장에서 한길과 장인들이 찰흙과 숯가루의 황금 비율을 찾아내 주조한 최신형 토법 화포가 불을 뿜었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화포의 포구에서 뿜어져 나온 수천 개의 쇠구슬과 쇳조각들이 여좌문 통로를 가득 메운 서경의 별동대를 덮쳤다.

"아아악!"

"이, 이게 무슨 번개란 말이냐!"

서경의 군사들은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화약의 매캐한 연기와 피비린내가 옹성 안을 가득 채웠다. 미처 진입하지 못한 후방의 군사들은 난생처음 보는 화력의 공포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원의 군사들이 도망치는 자들을 추격해 완벽하게 숨통을 끊어 놓았다. 야음을 틈탄 서경의 기습 작전은 선우의 철저한 행정적 통제와 압도적인 화력 앞에 단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궤멸당했다.

한길이 연기 나는 화포를 어루만지며 선우에게 다가왔다. 그의 거친 얼굴에는 흥분과 경외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나으리, 보셨습니까? 사찰에서 거두어들인 초석으로 만든 화약의 위력이 이 정도입니다. 법으로 놈들의 뒷배를 끊어놓으신 덕에, 이제 화약 걱정은 접어도 되겠습니다."

"수고했다, 한길. 허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선우는 피로 얼룩진 여좌문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성은 이미 다음 단계를 계산하고 있었다.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도성을 지켜냈으나, 서경의 본대는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터였다.

그때였다.

도성 북방을 수호하는 삼각산 정상에서 붉은 봉화가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두 개, 세 개, 네 개의 봉화가 연달아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원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나으리…… 봉화가 네 개입니다! 서경의 대위국 본진, 3만 보병 선봉대가 이미 개경 북방 십 리 구역까지 도달했다는 신호입니다!"

도성 방어의 작은 승리를 축하할 시간도 없이, 고려의 명운을 건 거대한 폭풍이 개경의 턱밑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선우는 붉게 물든 북쪽 하늘을 응시하며, 서서히 허리춤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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