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저 멀리 누각의 짙은 그늘 아래 서 있는 정지상의 신형(身形)은 미동조차 없었다.

학문과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며 서경 파벌의 실질적인 뇌수로 군림하는 사내. 그의 수려한 미간 아래 박힌 눈동자가 밤안개 너머로 선우를 꿰뚫을 듯 타올랐다. 유광을 비롯한 은밀한 자금줄이 어사대의 사슬에 묶여 진흙바닥을 구르는 꼴을 보면서도, 정지상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그저 서늘한 안광만으로 선우의 전신을 훑었다.

황궁의 예법을 논하고 황제에게 직언을 올리던 고결한 문사의 가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그 균열 틈새로 비치는 것은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집요함이었다.

선우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지상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어스름한 새벽빛을 받아 선우의 눈동자에 기묘한 붉은빛이 감돌았다.

'네놈들이 믿는 풍수와 천명이 이 조정의 법률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었더냐.'

말 없는 조소(嘲笑)가 허공을 갈랐다. 정지상은 선우의 거침없는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이질감을 느꼈는지, 천천히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며 몸을 돌렸다. 가파른 누각 계단 아래로 그의 화려한 관복 자락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잠할 때까지, 선우는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민, 민 도령…… 아니, 소협."

뒤에서 소정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목소리로 선우를 불렀다. 어사대 장령이라는 직첩이 무색하게, 그의 넓은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선우는 천천히 몸을 돌려 소정을 응시했다. 차가운 한기가 소정의 멱살을 쥐어짜듯 그를 압박했다.

"장령 대감. 서경파의 꼬리를 자른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이 정도면 서경의 자금줄을 완전히 묶어둔 것이 아니오? 묘청 그 요망한 중놈의 수하들이 개경에서 더는 발을 붙이지 못할 터인데……."

"눈앞의 가지만 치고 뿌리를 남겨두면, 봄비가 내릴 때 다시 돋아나는 법입니다."

선우가 품 안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민씨 가문의 상속 문서였다. 그러나 단순한 상속 문서가 아니었다. 선우의 눈앞에 푸른 텍스트가 명확하게 떠올랐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 발동] - 대상: 어사대 압관인이 찍힌 민씨 가문 상속 문서 - 숨겨진 사실관계: 현 어사대 장령 소정이 자신의 스승이자 개경 문벌의 거두인 이재(李載)의 가문과 결탁하여 불법적으로 위조한 압관인 흔적. 사승(師承) 관계를 이용한 어사대 사법권 오용 및 뇌물 수수 기록 잔존. - 영향력: 폭로 시 소정은 물론, 그가 속한 사승 카르텔 전체가 탄핵 및 유배형에 처해짐.

소정의 눈동자가 상속 문서의 붉은 압관인에 닿는 순간, 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것은……!"

"어사대의 압관인이 법을 수호하는 인장이 아니라, 가문의 이권을 나누는 사리사욕의 도구로 쓰였다는 증좌입니다. 대감의 스승이신 이재 대감께서 이 압관인을 찍어주는 대가로 민씨 가문에서 어떤 토지를 양도받았는지, 형부와 어사대 감찰 부서에 상소를 올리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민 도령! 제발, 그것만은……! 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터이니!"

소정이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로 매달렸다. 개경 문벌의 사승 카르텔은 겉으로는 유교적 도덕을 숭상하지만, 속으로는 이처럼 추잡한 이권과 인척 관계로 단단히 얽혀 있었다. 선우는 이 약점을 쥐고 흔드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사대의 명의로 개경 인근 사찰들의 가마터와 화장터, 그리고 분토(糞土) 축적지에 대한 특별 사법 감사를 발의하십시오."

"사, 사찰 말이오? 불교계는 태조 대왕 이래로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조정의 대신들과도 깊이 연계되어 있소. 특히 흥국사와 보제사는 김부식 대감의 가문과도 인척으로 얽혀 있는데……."

"그렇기에 어사대가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선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들이 독점하고 있는 분토 채굴권을 군기감으로 강제 이관시켜야 합니다. 거부할 시, 사찰들이 사리탑을 무단으로 증수하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군역을 기피하게 만든 죄를 물어 법정에 세우겠다고 협박하십시오. 초안은 내가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대감은 그저 어사대의 도장만 찍으시면 됩니다."

소정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서자가 지닌 정보력과 법리적 무기는 이미 일개 관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거부하는 순간, 자신의 관직은 물론 가문 전체가 파멸할 것이라는 공포가 소정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

사흘 뒤, 개경 북쪽 계곡에 자리 잡은 명찰(名刹) 흥국사의 후원.

퀴퀴한 썩은 내와 향내 가득한 연기가 뒤섞여 기묘한 악취를 풍기는 화장터 인근의 평지에 거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란 말이냐! 부처님의 성역에서 감히 흙을 파내가다니! 당장 멈추지 못할까!"

화려한 가사를 걸친 승려가 주장자를 땅바닥에 쿵쿵 찧으며 소리쳤다. 그의 뒤에는 몽둥이를 든 승병 수십 명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군기감의 인부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흥국사의 대표이자, 불교계의 영수로 군림하는 혜관(慧觀) 스님이었다. 그는 문벌 수장 김부식의 처남이자, 개경 내의 사찰 재산을 총괄하는 실권자였다.

"군기감의 공무를 방해하는 자는 율법에 따라 엄벌에 처할 것입니다."

한길이 땀에 젖은 앞치마를 두른 채 앞으로 나섰다. 그의 등 뒤에는 수레와 삽을 든 군기감의 야철장 장인들이 바짝 긴장한 채 서 있었다.

"공무? 이놈들이 미쳤구나! 태조 대왕께서 친히 하사하신 사찰의 토지에서, 그것도 조상들의 유골이 묻힌 화장터의 분토를 무단으로 가져가려 하다니! 이는 국법을 어기는 천인공노할 짓이다!"

혜관의 호통에 승병들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한길이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군기감 장인들의 갈라진 틈 사이로 선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낡은 가죽 장부와 함께, 조정의 공식 인장이 찍힌 감찰 문서가 들려 있었다.

"혜관 대사."

선우의 부름에 혜관이 눈을 부릅떴다.

"네놈은 또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냐? 감히 어사대와 군기감의 이름을 팔아 사찰의 재산을 침탈하려 드는가!"

선우는 대답 대신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 혜관의 눈앞에 장부의 한 페이지를 들이밀었다.

"고려율(高麗律) 호령(戶令) 제십이조. '사찰의 사리탑 및 불상을 중수할 시에는 호부의 허가를 득해야 하며, 이에 소요되는 비용의 출처를 명확히 밝혀 관청의 검인을 받아야 한다.' 또한, '허가받지 않은 증수는 사리사욕을 위한 불법 축재로 간주하여, 그 증축물을 몰수하고 관련자를 노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그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우리는 그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사리탑을 중수했을 뿐이다!"

선우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지난 삼 년간 흥국사에서 중수한 사리탑은 도합 네 기. 하지만 호부의 대장에는 단 한 기의 중수 허가서만 존재하더군요. 나머지 세 기는 어디로 갔습니까?"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 발동] - 대상: 흥국사 동쪽 삼층사리탑 - 숨겨진 이권 관계: 김부식의 친족들이 기부한 면세전(免稅田)의 수확물을 사리탑 중수 비용으로 위장하여 세금을 포탈함. 실제 사리탑 내부에는 불상이 아닌 골드바와 은괴, 그리고 누락된 소작농 대장 320정이 은닉되어 있음.

선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폭탄을 던졌다.

"동쪽 삼층사리탑 내부, 불상이 안치되어야 할 불단 아래에 숨겨진 비밀 궤짝이 있더군요. 그 안에는 김부식 대감의 가문에서 흘러들어온 은괴 500냥과, 조정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 조작된 소작농 대장 도합 320정이 들어 있습니다. 맞습니까?"

혜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주장자를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보기 흉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네, 네놈이 그걸 어찌……!"

"또한, 승려의 신분을 이용하여 군역을 기피하게 만든 첩첩(牒牒) 미등록 승려가 이 사찰에만 마흔여덟 명입니다. 이들을 군역 기피 죄로 의형대에 고발하고, 사리탑 내부를 현장에서 압수 수색하면 개경 문벌과 흥국사의 결탁이 천하에 드러나겠지요."

선우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혜관의 화려한 가사를 덮었다.

"김부식 대감께서 자신의 친척이 사찰의 돈을 빼돌려 조세를 포탈했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는 것을 기꺼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서경파를 치기 위해 기세를 올리는 어사대의 칼날에 혜관 대사의 목을 제물로 바치시겠습니까?"

"이…… 이 악마 같은 놈……."

혜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선우가 제시한 정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장부의 세세한 숫자와 숨겨진 위치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진다면 김부식조차 자신을 지켜주지 못할 터였다. 오히려 꼬리를 자르기 위해 먼저 자신을 처단할 것이 분명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혜관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승병들이 들고 있던 몽둥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선우는 미리 준비해 온 전용권 서류를 혜관의 코앞에 내밀었다.

"한길이 제시한 '사찰 화장터 초석 퇴적 농축 수집법'에 따른 분토 채굴권의 독점적 이관."

과거 한길이 제안했으나 사찰 세력의 반발과 구례 독점권의 맹점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던 기술이었다. 사찰의 화장터 뒷마당 흙은 오랜 세월 동안 유골의 인 성분과 초석(질산칼륨) 성분이 섞여 들어가 백색의 결정이 풍부하게 맺히는 최고의 원료 기지였다.

"이곳 흥국사를 비롯하여 개경 인근 다섯 개 사찰의 화장터 분토 채굴권을 군기감에 영구히 양도한다는 서명을 하십시오. 이를 거부한다면, 당장 어사대의 군사들이 사리탑을 무너뜨리고 은괴를 꺼낼 것입니다."

혜관은 덜덜 떠는 손으로 품에서 직인을 꺼냈다. 그리고 선우가 내민 서류에 붉은 도장을 찍었다.

쿵.

도장이 찍히는 소리와 함께, 선우의 머릿속에 새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역풍(歷史回歸) 발동 경고] - 역사적 인물의 생존 궤적 및 군수 이권 구도가 변동되었습니다. (고려의 독자적 화약 대량 생산 기반 확립) - 대가: 극심한 신체적 과부하 발생.

"윽……."

선우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훔치며 붉은 피를 황급히 감추었다. 눈앞이 잠시 흐려지고 이명이 들렸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잡았다.

이 정도의 대가는 예상한 바였다. 고려를 천자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수명 따위는 행정적 비용에 불과했다.

"가져가라."

선우가 한길에게 서류를 건넸다. 한길의 거친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희열이 피어올랐다.

"도령…… 정말 해내셨구만요! 이 흙만 있으면, 그동안 중국에서 밀수해 오던 초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순도 높은 화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체할 시간 없다. 당장 수레에 싣고 군기감 야철장으로 이동해라."

선우의 냉혹한 명령에 인부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혜관과 승려들은 그저 먼지 날리는 수레를 바라보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

그날 밤, 군기감 지하 야철장.

가마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퀴퀴한 질산염의 냄새가 좁은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길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가마솥 안의 액체를 커다란 주걱으로 저었다. 사찰 화장터에서 수거해 온 분토를 물에 녹여 불순물을 걸러내고, 여기에 잿물과 소금기를 배합하여 증류하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도령, 보십시오. 이 맑은 물이 식으면서 바닥에 가라앉는 것이 바로 진짜 초석입니다."

한길이 가마솥 아래의 불을 끄고, 차가운 물을 담은 대야에 솥을 담갔다.

시간이 흐르자, 가마솥 바닥에 눈부시게 하얀 결정들이 침전되기 시작했다. 마치 겨울날의 서리처럼 곱고 날카로운 결정들이었다.

한길이 조심스럽게 그 결정을 긁어모아 선우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토법으로 정제해 낸 고순도 질산칼륨 분말입니다. 서역이나 송나라에서 들여오던 흙먼지 섞인 초석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놈을 유황, 목탄과 구 대 일 대 일의 비율로 배합하면…… 개경의 그 어떤 적들도 날려버릴 수 있는 진짜 화약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선우는 손바닥 위의 하얀 가루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우면서도 묘한 생명력을 품은 가루. 이것이 향후 여진과 몽골의 철기군을 주저앉힐 고려의 심장이 될 터였다.

"수고했다, 한길."

선우의 짧은 칭찬에 한길은 투박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항상 양반들을 불신하던 그였지만, 법리와 정보를 이용해 자신에게 완벽한 연구 환경과 원료를 제공해 주는 선우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령을 만난 것이 제 일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이 화약으로 멋진 화포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전우애가 흐르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갑자기 야철장 구석에 세워둔 화약 건조대 인근에서 기묘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응? 저게 무엇이냐……."

한길이 고개를 돌리는 찰나.

쨍강! 쨍강! 쨍강!

군기감 창고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화재 경보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침입자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불이다! 군기감 창고에 불이 났다!"

열린 문틈으로 붉은 화염이 밤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선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경파, 혹은 개경 문벌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된 것이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