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을 겨눈 칼날 끝에서 차가운 쇳내와 밤안개의 비릿한 습기가 섞여들었다.
"민선우, 얌전히 우리를 따라오시지."
사내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개경의 거친 부두 노동자나 정규 군졸의 말투가 아니었다. 억양 끝에 묘하게 얹히는 서경 특유의 뭉툭한 발음. 선우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사내의 검포 자락을 응시했다.
"내 발로 걸어가기엔 밤이 깊었군. 뉘 집 마부들이기에 이리 예의가 없는가?"
"세치를 놀려 목숨을 부지하려 들지 마라. 서지 않으면 여기서 다리를 분지르겠다."
괴한들의 칼날이 한 치 더 밀려들기 직전이었다. 골목길 모퉁이,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가마터 방향에서 둔중한 발소리가 울렸다. 철판을 바닥에 끄는 것 같은 불쾌하고 묵직한 마찰음이었다.
"어이, 서방님 가시는 길에 파리가 너무 많네."
어둠 속에서 불쑥 거대한 인영이 솟아올랐다. 야철장 한길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쇠물을 풀 때 쓰는 투박하고 거대한 무쇠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연장을 쥔 그의 힘줄 가득한 팔둑이 밤안개 속에서 허옇게 드러났다.
괴한들의 시선이 한길에게 쏠린 찰나, 선우는 주저 없이 뒤로 몸을 꺾었다.
"쳐라."
선우의 냉혹한 낙화와 동시에 한길의 무쇠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쿠웅!
단단한 두개골과 쇠붙이가 부딪치는 둔탁한 파열음이 골목길을 찢었다. 맨 앞에 서 있던 사내의 어깨뼈가 처참하게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습격자들은 선우가 힘없는 귀족 서자일 뿐이라 방심하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한길의 무지막지한 완력에 노출된 그들은 도망칠 틈조차 찾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두 명의 사내가 칼을 휘두르며 한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좁은 골목길은 긴 칼보다 사정거리가 짧고 묵직한 쇠방망이를 휘두르기에 최적의 전장이었다. 한길은 가볍게 칼날을 쳐내고 그대로 사내의 복부에 방망이 끝을 박아 넣었다.
꺼억, 하는 단말마와 함께 사내가 진흙바닥을 굴렀다. 단 세 번의 호흡 만에 상황은 종결되었다.
선우는 흙먼지를 털며 쓰러진 우두머리의 앞으로 다가갔다. 사내는 허벅지 뼈가 부러진 채 신음하며 선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놈이 어찌…… 이런 자를 거느리고……."
선우는 대답 대신 사내의 가슴팍을 구두굽으로 짓눌렀다.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입에서 밭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예의를 차릴 시간은 끝났다. 묻는 말에만 답해라. 너희를 보낸 자가 누구냐?"
"우, 우리는 그저 개경 동가의……."
"동가의 부랑자라고 거짓을 고하려거든 혀를 뽑아라."
선우의 눈동자가 기괴할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그의 시선이 사내의 품속, 살짝 드러난 짙은 갈색의 목패에 닿았다.
선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동공 속에서 붉은빛의 실타래가 얽히며 글자들이 허공에 명멸하기 시작했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의 시동이었다.
**[대상: 서경 둔전군(屯田軍) 제3령 목패]** **[상세 영안 기록: 묘청의 심복들이 개경 내 사대주의 세력을 감시하고, 서경 천도 및 대위국(大爲國) 건립을 위한 군자금을 확보하고자 파견한 사병의 징표.]** **[자금 이권 관계: 개경 역관(譯官)들과 결탁하여 황실에 납품할 세곡과 수입 비단을 빼돌림. 장물과 빼돌린 자금은 개경 서쪽 벽란도 인근 '흥국사(興國寺)' 지하 석고(石庫)에 은닉됨. 장부의 실소유주: 서경 세작 유광.]**
치솟는 정보의 양에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허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선우는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소매 위로 붉은 선혈이 번졌다.
"도련님!"
한길이 깜짝 놀라 다가왔으나, 선우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일시적으로 왼쪽 귀의 청력이 멀어지고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고막을 찔렀지만, 그는 핏자국을 닦아내며 사내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역사의 궤적을 비틀 때마다 찾아오는 '역풍'의 대가였다. 수명이 줄어드는 감각이 뼛속까지 시렸으나, 얻어낸 정보는 그보다 훨씬 값졌다.
"흥국사."
선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너, 네놈이 그걸 어찌……."
"지하 석고에 쌓인 황실 세곡과 비단 장부. 서경의 유광이 관리하는 그것들이 아직 흥국사 승려들의 법당 밑에 안전하게 있을 거라 생각하나?"
사내는 귀신을 본 듯한 표정으로 사지를 떨었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던 군사조차 알지 못하는 은닉처의 핵심을, 개경의 일개 귀족 서자가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선우는 사내의 품에서 목패를 거칠게 빼앗아 품에 넣었다.
"한길."
"예, 도련님."
"이놈들을 묶어서 가마터 밀실에 가두어라. 관아에는 알리지 마라. 아직은 쓸모가 있다."
"알겠습니다."
한길이 사내들의 덜미를 짐짝처럼 움켜쥐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선우는 골목길의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의 영안이 제시한 정보들을 조합해 나갔다.
'묘청 일파가 개경 내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거점을 잡았다. 이 자금줄을 끊어버리면, 서경의 천도 움직임은 그 발걸음부터 꼬이게 된다.'
하지만 이를 사법적으로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개경 조정 내부의 확실한 사냥개가 필요했다. 선우의 머릿속에 한 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사대 장령 소정. 그리고 그를 옭아맬 가장 확실한 밧줄이 선우의 품 안에 있었다.
***
늦은 밤, 민씨 가문의 별채 후원.
은밀한 그림자 속에서 민수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오라버니, 요청하신 가문의 상속 문서와 어사대 관련 서류들을 모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것으로 어사대를 움직일 수 있습니까?"
수연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아무리 서자라 해도 일개 가문의 내부 문서를 가지고 조정의 사법 기관인 어사대를 흔든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선우는 수연이 건넨 서류를 펼쳤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토지 상속 문서의 하단에는 붉은색 어사대 압관인(押官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선우가 손가락으로 그 도장 자국을 쓸어내렸다. 그의 눈에 다시 한번 영안의 붉은 실선이 보였다.
**[유물: 민씨 가문 상속 문서 (어사대 압관인)]** **[숨겨진 서사: 십수 년 전, 어사대 장령 소정의 스승이자 전임 대부였던 노 관료가 가문 안주인과 결탁하여 불법적으로 날인한 위조 관인. 이 도장을 매개로 어사대 내 특정 학벌 파벌(사승 카르텔)이 사적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수수함.]**
이것이 바로 1화에서 발견했던, 민씨 가문과 어사대 관료들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고려의 법률인 '고려율(高麗律)'에 따르면, 관인의 위조와 이를 통한 사적 사승(師承) 카르텔의 형성은 가문 멸문지화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이 압관인의 서체와 잉크의 성분을 보아라."
선우가 서류의 모퉁이를 가리켰다.
"이것은 관청의 공식 서체가 아니다. 당시 어사대 내부의 사승 세력들이 자기들끼리 이권을 법적으로 보장해주기 위해 사적으로 파낸 위조 도장이지. 어사대 장령 소정의 가문 역시 이 도장으로 공음전을 불법 증식했다."
수연의 입술이 가볍게 벌어졌다.
"그렇다면…… 소정 장령은 제 목줄이 오라버니 손에 쥐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겠군요."
"목줄을 쥐었으면 부려야지."
선우는 서류를 다시 접어 수연에게 건넸다.
"이 상속 문서의 사본과, 방금 입수한 서경 세작들의 흥국사 자금 은닉처 장부 정보를 어사대 소정 장령의 집무실에 '익명 고변' 형태로 보내라. 보낼 때 이 가짜 압관인의 탁본을 함께 동봉해라. 소정은 그 탁본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흥국사를 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서경 세력을 치는 동시에, 어사대를 우리 손아귀에 넣겠다는 뜻이군요."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수호한다고 믿겠지만, 결국 우리가 파놓은 함정 속에서 춤추는 광대에 불과할 것이다."
수연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냉혹한 도구적 사고방식에 소름이 돋았지만, 동시에 이 무시무시한 행정적 지략이야말로 가문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동아줄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사흘 뒤, 개경 황궁 앞 광화문 광장.
"개경의 지기(地氣)는 이미 다하였다! 황제 폐하께옵서 서경으로 천도하시어 천하를 호령하셔야 고려의 국운이 일어날 것이다!"
수십 명의 승려들과 풍수지리설을 추종하는 서경파 유생들이 광장 한복판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군중들이 그들의 화려한 언변과 도참설에 홀려 웅성거렸다. 묘청이 보낸 선동가들이 민심을 흔들기 위해 판을 깔아놓은 것이었다.
"서경의 용력(龍力)이 금나라를 굴복시킬 것이니, 어찌 이 쇠락한 개경에 머물며 사대의 굴레를 쓰려 하십니까!"
선동의 열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 광장 모퉁이에서 철갑을 두른 형부의 군사들과 어사대의 관료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그 선두에는 형부의 복직 승인을 받아 정식 관료의 의복을 입은 민선우가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어사대 장령 소정이 수행하듯 따르고 있었다.
"모두 멈추어라!"
소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선동을 주도하던 서경파 역관 유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어사대에서 어찌 황실의 안녕을 위한 풍수 기도를 방해하는가? 이는 조정의 대업을 가로막는 처사다!"
유광은 당당했다. 자신들의 배후에 묘청과 서경 천도를 지지하는 황실 내부의 세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우가 천천히 걸어 나와 유광의 앞에 섰다.
"황실의 안녕이라."
선우는 품속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흥국사 지하 석고에서 어사대가 전격 압수한 불법 거래 장부와 가짜 세곡 영수증들이었다.
"고려율 제십이조, 황실의 세곡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적국과의 밀무역을 도모한 자는 참형에 처한다."
선우의 건조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이것은 흥국사 지하에서 압수한 서경의 자금 장부다. 여기 적힌 역관 유광, 그리고 서경 세작들이 결탁해 빼돌린 세금이 자그마치 오천 석에 달한다. 이 돈이 풍수 기도를 빙자해 서경의 사병들을 기르는 자금으로 흘러 들어갔음이 확인되었다."
"무, 무슨 터무니없는 모함인가! 우리는 그저……."
"여기에 네놈의 직인과 서경 둔전군의 목패가 함께 출토되었다."
선우가 유광의 코앞에 둔전군의 목패를 내던졌다.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목패를 본 유광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장령 소정 대감."
선우가 뒤를 돌아보며 소정을 압박했다. 소정은 선우의 품에 있는 '가짜 압관인 상속 문서'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선우의 뜻대로 서경 세력을 처단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문이 먼저 날아갈 판이었다.
"어, 어사대의 명으로…… 흥국사 자금 세탁에 관여한 역관 유광과 서경파 무리들을 전원 체포하라! 배후 자금은 즉시 국고로 동결한다!"
소정의 고함이 떨어지기 무섭게 형부의 군사들이 유광과 선우를 지지하던 무리들을 덮쳤다.
"이놈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가! 서경의 천벌을 받을 것이다!"
유광이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으나, 군사들의 거친 구둣발과 쇠사슬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광장에 모여 있던 백성들은 풍수지리를 외치던 이들이 실은 나라의 세금을 빼돌린 도둑놈들이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풍수지리를 핑계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도적 떼였구나!"
"서경으로 가자는 이유가 저것이었나!"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묘청 일파가 개경 내에서 수개월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여론 조작과 자금줄이, 단 한 번의 사법적 행정전으로 인해 완전히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선우는 끌려가는 유광의 뒷모습을 냉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아주 잠깐 스쳤다. 철저한 계산과 법리의 칼날 앞에, 서경의 그 어떤 도참설도 무력한 미신일 뿐이었다.
소란스러운 광장의 한복판, 군중들이 흩어지는 틈바구니 속에서 선우는 기묘한 살기를 느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광장 건너편의 누각 그늘을 응시했다.
그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화려한 관복을 입고, 문장가 특유의 날카롭고 수려한 기품을 풍기는 사내. 묘청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자, 서경파의 브레인인 정지상(鄭知常)이었다.
정지상은 멀리서 선우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 서린 안광은 마치 선우의 심장 관통하려는 듯 형형하게 빛났다. 자신들의 자금줄을 완벽하게 도려낸 이 이름 없는 서자의 존재를, 그는 이제야 명확히 인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밤안개가 걷히는 광장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