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야철장의 천장을 삼킬 듯 치솟았던 자색(자줏빛)의 화염이 이윽고 가느다란 연기로 화하며 사그라들었다. 매캐한 유황의 잔향이 콧등을 찌르고, 바닥에 흩어진 잿가루 위로 붉은 불씨들이 몇 번 더 깜빡이다가 숨을 거두었다.

비웃음을 터뜨리던 늙은 사공들의 턱이 벌어진 채 닫힐 줄 몰랐다. 누군가는 들고 있던 쇠집게를 떨어뜨렸고, 누군가는 넋이 나간 눈으로 자신의 거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화약의 맹렬한 기운은 일개 천민들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영역의 것이었다.

그 경악의 중심에서, 한길은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선우가 서 있는 가죽신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장장이로 뼈가 굵은 남자의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선우는 가죽신에 묻은 그을음을 가볍게 털어내며 낮게 읊조렸다.

"비율은 초석 일곱에, 황 하나, 목탄 둘이다. 이것이 율(律)에 어긋나지 않는 천하의 정량(定量)이다."

"공자, 이, 이것이 대체……."

한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평생 달궈진 철과 흙만을 만져온 장인에게, 방금 전의 화염은 단순한 불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기감의 도가니를 통째로 녹여버릴 수도 있는, 가공되지 않은 권력의 실체였다.

"내 너에게 고려의 모든 야철지와 사찰의 화장터에서 흙을 긁어모을 권한을 주마. 물론 합법적인 절차 안에서다."

선우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한길의 발앞에 던졌다. 가문에서 쫓겨나기 전, 어사대와 형부의 묵인 하에 사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군기감 야동(冶洞)의 원료 수급 대장 사본이었다.

"이것을 보고 배합을 고도화해라. 불순물이 섞인 초석은 자색을 띠지만, 정제가 완벽해질수록 백색에 가까운 순수한 화력을 낼 것이다. 내 다시 올 때까지, 단 한 톨의 화약도 밖으로 유출되어서는 안 된다."

"소인 한길, 목숨을 걸고 공자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한길의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선우는 그 굽혀진 등허리를 내려다보며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인간이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정교하게 설계된 톱니바퀴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이 장인은 화약이라는 거대한 행정 병기를 생산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부품일 뿐이었다.

***

사흘 뒤, 개경의 밤은 차가운 안개로 가득 찼다.

선우는 가문에서 물려받은 임시 처소의 등잔불 아래에서 붓을 놀리고 있었다. 서자라는 신분적 족쇄는 여전했으나, 가택 재판에서 어사대 장령 소정을 옭아맨 이후 가문 내에서의 감시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사각, 사각.

한지의 결을 따라 흐르는 먹물이 정교한 문장으로 화했다.

그가 작성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형부(刑部)의 말단 서리로의 복직 및 승진 신청서였고, 다른 하나는 예부(禮部)를 거쳐 조정에 상정될 독자적인 상소문이었다.

[상송조철원금수대책서(上宋朝鐵源禁輸對策書)]

현재 고려는 북방의 여진과 금나라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와의 전면전을 준비하며 고려로 수출하던 철원(철광석 및 제련된 철괴)의 금수 조치를 단행한 상태였다. 무기를 만들 철이 부족해지자, 고려 조정은 군기감의 철물 수급을 전면 통제하며 개경 가문들의 사적 무장까지 단속하기 시작했다.

선우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송나라의 금수 조치는 단순한 자원 통제가 아니다. 고려가 금나라와 손을 잡을까 두려워하는 외교적 압박이지.'

그는 상소문에 당대의 기술적 한계를 정량적으로 분석해 넣었다. 고려 내부의 야철 기술이 송나라의 수입재에 비해 탄소 함유량이 낮아 쉽게 부러진다는 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찰의 종과 불상을 녹여 무기를 만들자는 불교계의 주장이 지닌 경제적 허구성을 율법과 수치로 증명해 나갔다.

"황과 목탄을 배합한 토법 제련을 통해 철의 순도를 높이고, 부족한 철원은 가문들이 은닉한 사적 공음전의 철광 채굴권을 몰수하여 충당해야 한다."

이 상소는 개경의 기득권인 문벌귀족들의 명줄을 죄는 칼날이었다. 동시에, 송나라에 굽신거리는 사대 외교의 모순을 정면으로 찌르고 있었다.

선우는 붓을 놓고 품속에서 낡은 장부 한 권을 꺼냈다. 가택 재판 당시 어사대 소정의 뒤를 캐며 영안(靈眼)으로 확인했던 민씨 가문의 상속 문서 사본이었다.

스스스.

선우의 눈동자 주위로 푸르스름한 안개 같은 백색 빛무리가 일렁였다. 사물서사 영안이 발동하자, 상속 문서에 찍힌 붉은 어사대 압관인(押官印) 위로 반투명한 이권 관계 텍스트가 떠올랐다.

[유물: 어사대 장령의 압관인] - 상세: 어사대 장령 소정과 예부 시랑 유필 간의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의 인장. - 은폐된 사실: 1129년, 예부 시랑 유필은 송나라 사신 접반사로 근무하며 고려의 철원 유통권을 송나라 상인에게 밀매함. 그 대가로 받은 은자 5천 냥의 일부를 어사대 장령 소정의 가문에 수당(學謝) 명목으로 상속 문서 위조를 통해 세탁함. - 관련 인물: 유필(예부 시랑), 소정(어사대 장령), 민씨 가문 안주인 오씨.

선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사승(師承)이라는 허울 좋은 학벌의 그늘 아래서, 나라의 철을 팔아먹은 도둑놈들이 어사대의 자리에서 법을 논하고 있었군."

그는 이 명백한 범죄의 궤적을 자신의 상소문 행간 속에 교묘하게 녹여냈다. 드러내놓고 고발하는 것은 하책이다. 상대가 문서를 읽는 순간, 자신의 목덜미에 칼날이 들어와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선우가 구사하는 구례 차도살인의 정수였다.

상소문을 접어 봉투에 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우윽……!"

선우는 급히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붉은 선혈이 하얀 소매 자락을 적셨다. 눈앞이 순간적으로 캄캄해지며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역풍(歷史回歸)인가.'

역사의 궤적을 억지로 비틀고, 존재하지 않아야 할 기술과 사법적 단서를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그는 피가 묻은 소매를 담담히 닦아냈다. 육신의 수명이 깎여 나가는 감각은 오히려 그의 정신을 차갑게 벼려주었다. 몽골의 말발굽이 이 땅을 짓밟기 전에 천자국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 따위는 사소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

개경의 예부 청사.

문벌귀족의 거두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일등공신 김부식은 시찰을 위해 예부의 서고를 거닐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수십 명의 예부 관료들이 숨소리조차 죽인 채 뒤따랐다.

"송나라의 금수 조치 이후, 예부에서 올린 대책이 고작 이것인가?"

김부식이 칙칙한 상소문 더미를 툭 던지며 차갑게 물었다. 관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식은땀만 흘렸다.

"황제국인 송의 처사를 원망하기만 할 뿐, 조공의 격식을 낮추어 그들의 비위를 맞추자는 심약한 소리뿐이로군. 사대(事大)란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방책이지, 스스로의 손발을 묶어 굶어 죽으라는 법이 아니다."

유학의 대가인 김부식이었으나, 그는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현실주의자였다. 송나라의 비위를 맞추는 것과 고려의 국력이 파탄 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때, 서리들이 정리하던 서류 더미 구석에서 유독 정갈하게 접힌 한 장의 상소문이 김부식의 눈에 들어왔다. 관직도 없는 일개 서리가 올린 잡수(雜守) 상소였다. 원래대로라면 서고의 구석에서 먼지나 뒤집어썼을 문서였다.

김부식은 무심코 그 상소문을 집어 들었다.

"……?"

상소문의 첫 장을 읽어 내려가던 김부식의 눈썹이 서서히 좁혀졌다.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붓끝 하나하나에 실린 힘과 예기(禮記)의 구절을 인용한 정교한 자구 해석, 그리고 고려율 제12조와 제24조를 교묘하게 결합하여 송나라의 금수 조치를 법리적으로 무력화하는 방책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김부식은 서둘러 상소문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상소인의 이름이 적힌 곳이었다.

[형부 서리 민선우]

"민선우? 민씨 가문의 서자 놈이 아닌가?"

김부식의 곁에 서 있던 예부 시랑 유필이 이름을 확인하고는 안색을 붉혔다. 유필은 민씨 가문의 안주인 오씨와 사승 관계로 얽힌 자로, 최근 민선우가 가택 재판에서 소정을 굴복시켰다는 풍문을 듣고 심기가 불편하던 참이었다.

"서출 주제에 감히 조정의 외교 방침에 훈수를 두다니, 가문의 기강이 해이해진 모양입니다. 내 당장 이 자를 불러 징계하겠……."

"닥치게."

김부식의 묵직한 음성이 유필의 말을 끊었다.

김부식은 상소문을 든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의 눈은 상소문 행간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가시를 이미 읽어내고 있었다. 철원 금수를 해결하기 위해 가문의 사적 공음전을 조사해야 한다는 구절 뒤에는, 예부와 어사대가 결탁한 사적 밀무역의 혐의가 아주 은밀하고도 명확하게 암시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상소가 아니다. 어사대와 예부의 목을 쥐고 흔드는 협박장이야.'

김부식은 이 믿기지 않는 문장력과 법리적 완벽함에 소름 끼치는 경외감을 느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서자가, 조정의 거물들을 한 손에 올려놓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 자의 배후를 조사하라."

김부식이 상소문을 소매 속에 집어넣으며 나직하게 명령했다.

"누가 이 서자에게 이토록 정교한 법리를 가르쳤는지, 그리고 민씨 가문의 내부 사정이 어찌 이 자의 손에 흘러 들어갔는지 샅샅이 캐내라. 만약 배후가 없다면……."

김부식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감돌았다.

"이 자는 고려 조정 전체를 집어삼킬 괴물이다."

***

같은 시각, 고려의 황궁 편전.

인종은 서경(평양)의 묘청이 올린 천도 상소문을 읽으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폐하! 서경은 제왕의 기운이 서린 땅이옵니다. 개경의 썩어빠진 문벌귀족들의 기운을 씻어내고, 서경으로 천도하여 금나라를 정벌하고 천자국을 선포하소서!"

묘청과 정지상 등 서경 파벌의 목소리가 연일 편전을 가득 채웠다. 인종 역시 개경 귀족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싶었으나, 묘청의 주장은 지나치게 허황되고 급진적이었다. 금나라를 정벌할 군사적, 경제적 대책도 없이 풍수지리설에만 의존하는 천도는 자멸의 길이었다.

"내 내일 예부와 호부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소."

인종은 지친 목소리로 조회를 마쳤다.

편전의 불이 꺼진 밤, 인종은 홀로 내관이 가져온 예부의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개경 귀족들의 지루한 상소문이었다.

그러다 인종의 손이 멈췄다. 김부식이 예부에서 가져온 상소문 중 하나가 실수로 내시부에 함께 넘어온 것이었다.

[상송조철원금수대책서 - 형부 서리 민선우]

인종은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송의 철원 금수에 맞서 우리 스스로 야철 기술을 혁신하고, 사대(事大)의 명분을 유지하면서도 실리를 취하는 방책이라……."

상소문은 묘청처럼 허황된 풍수지리나 천도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철저히 당대의 자원과 법률을 바탕으로 고려가 가질 수 있는 독자적인 힘을 논하고 있었다.

"민선우……."

인종은 그 이름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개경의 문벌귀족 가문에서 이런 문장이 나왔단 말인가? 그것도 서자에게서?"

인종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묘한 전율이 일었다. 개경 귀족들의 사리사욕과 서경 파벌의 광기 사이에서, 오직 고려라는 국가의 생존만을 계산하는 차가운 지성이 느껴졌다.

"이 자를 기억해 두어야겠구나."

인종은 붉은 붓을 들어 민선우의 이름 위에 작은 점을 찍었다. 그것은 훗날 개경과 서경의 파벌이 모두 무너질 때, 왕이 쥐어야 할 가장 날카로운 칼날의 시작이었다.

***

다음 날 황혼 무렵, 선우는 예부 청사 뒤편의 외진 정자에서 불려 나온 참이었다.

그의 앞에는 예부 시랑 유필이 거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 유필의 뒤에는 어사대의 하급 관료 두 명이 험악한 기색으로 선우를 감시하듯 버티고 있었다.

"서출 놈이 가택 재판에서 요행을 얻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유필이 선우의 상소문 사본을 바닥에 던지며 윽박지렀다.

"감히 예부와 어사대의 고유 권한인 철원 유통에 대해 이따위 망령된 글을 올려? 네놈이 올린 상소문은 당장 소각될 것이며, 너는 조정의 권위를 모독한 죄로 형부에서 파직되어 유배형에 처해질 것이다!"

유필의 가당치 않은 으름장에도 선우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필의 눈을 응시했다.

선우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영안의 백색 빛무리가 유필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유필 대감."

선우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하고 건조했다. 감정이 배제된, 마치 기계의 작동음과 같은 서늘함이었다.

"1129년 기유년, 송나라 사신 접반사로 나가셨을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유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당시 송나라의 밀무역 상단 '진경각'의 행수 진평과 나눈 밀약서가 아직 어사대의 기밀 보관소에 있더군요. 송나라로 유출된 고려의 철괴가 무려 3만 근. 대감께서 그 대가로 받은 은자 5천 냥은 어사대 장령 소정의 가문 상속 문서를 위조하는 데 쓰였습니다."

"이, 이놈이 미쳤구나! 어디서 그따위 허황된 유언비어를……!"

유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사실은 오직 자신과 소정, 그리고 이미 죽은 민씨 가문의 안주인 오씨만이 아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그 상속 문서에 찍힌 어사대 압관인은 가짜더군요."

선우가 품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종이를 꺼내 유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압관인의 서체 중 '어(御)' 자의 마지막 획이 0.1촌 짧습니다. 이는 소정 장령이 사적으로 주조한 불법 인장이지요. 고려율 제85조, 국인(國印) 및 관인을 위조한 자는 참형에 처하며, 그 가솔은 모두 변방의 노비로 삼는다."

선우는 한 걸음 더 유필에게 다가갔다. 유필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어사대 관료들 역시 사색이 되어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내가 올린 상소문이 소각되면, 이 가짜 압관인이 찍힌 상속 문서와 대감의 밀무역 장부 사본이 내일 아침 의금부와 김부식 대감의 집무실에 전달될 것입니다. 김부식 대감이 사대(事大)의 명분을 중시하나, 나라의 철을 사적으로 팔아먹은 매국노까지 감싸줄 거라 생각하십니까?"

"너, 너……."

유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서 있는 서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모든 치부와 조정의 법률을 완벽하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악마였다. 신분의 격차 따위는 이 완벽한 정보와 법리의 칼날 앞에서는 아무런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다.

"선택하십시오, 유필 대감."

선우가 유필의 귀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 복직 서류에 승인 도장을 찍고 내 상소문을 김부식 대감의 책상 위에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내일 아침 참수대 위에서 가문의 몰락을 지켜보시겠습니까?"

침묵이 정자를 지배했다.

유필은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소매 속에서 예부의 압관인을 꺼냈다. 그는 선우가 내민 형부 복직 신청서 위에 도장을 찍었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유필의 권력이 꺾이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물러가라."

선우의 차가운 명령에, 예부 시랑 유필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정자를 빠져나갔다. 그의 수하들도 도망치듯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홀로 남은 선우는 복직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붉게 찍힌 도장은 그가 고려의 사법 체계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선우는 서류를 품에 넣고 정자를 나서 개경의 어두운 골목길로 향했다.

밤안개가 더욱 짙어져 사방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적막한 골목길을 걷던 선우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스스스.

골목 양끝의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을 입고 칼을 든 괴한들이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수는 대여섯 명. 살기가 안개 속을 뚫고 선우의 피부를 찔렀다.

"민선우, 얌전히 우리를 따라오시지."

괴한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칼끝을 선우의 목에 겨누며 차갑게 말했다.

선우의 눈동자가 깊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하들을 굴복시킨 직후 찾아온 뜻밖의 습격. 이들의 배후는 누구인가. 김부식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조정의 거물인가.

선우는 천천히 소매 속의 손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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