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작열감에 선우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파가 쪼그라들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연의 비명이 들려왔으나, 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하게 웅웅거릴 뿐이었다.

눈앞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며 온 세상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바닥에 조각조각 떨어지는 핏방울들은 검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시각과 청각이 급격히 멀어져 가며, 그의 몸이 차가운 흙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가산 분할 증서를 쥔 그의 손끝이 경련했다.

* * *

사흘 뒤.

개경 동부의 한적한 민가. 사면이 거친 흙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선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입안 가득 맴도는 비린 철분 냄새가 뇌리를 찔렀다.

"깨어나셨습니까, 오라버니."

머리맡에서 수연이 마른 수건을 쥔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밑은 거뭇하게 죽어 있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간호한 흔적이었다.

선우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뻐근한 통증에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가슴팍을 움켜쥐자 아직도 심장 부근이 화끈거렸다. 사물서사 영안을 통해 고려의 사법 제도를 뒤흔들고 가문의 판도를 바꾼 대가였다.

'역풍(歷史回歸).'

역사의 궤적을 강제로 뒤튼 인과율의 반작용은 육체의 수명을 갉아먹는 각혈로 나타났다. 선우는 침착하게 자신의 호흡을 가다듬었다. 감정에 휘둘릴 시간은 없었다. 그가 이 고려 땅에 환생한 이상, 예정된 여진과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선 이 정도의 대가는 기꺼이 감수해야 할 매몰 비용에 불과했다.

"가산은 어찌 되었느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수연은 품 안에서 두껍게 접힌 종이 뭉치와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약조대로 노씨 부인에게서 은자 오천 냥을 받아내었습니다. 어사대 장령 소정의 목줄을 쥔 보람이 있더군요."

선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1화에서 영안을 통해 간파했던 민씨 가문의 상속 문서. 거기에 찍힌 어사대 압관인은 단순한 도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사대 장령 소정과 가문의 안주인 노씨가 맺은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의 명백한 증거였다. 과거 시험의 답안을 유출하고 공음전을 불법으로 세습하기 위해 위조된 압관인의 흔적을 상속 문서 구석에서 영안으로 포착했던 것이다.

가택 재판이 끝난 직후, 선우는 이 명백한 율법 위반의 흔적을 소정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사대의 수장이 불법 사승과 문서 위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대간(臺諫)들에 의해 조정에 상소되는 날에는, 감찰을 담당하던 소정 본인의 목이 먼저 날아갈 판이었다. 결국 소정은 노씨를 압박하여 민씨 가문의 노른자위 전답을 즉시 처분하게 만들었고, 그 대금인 은자 오천 냥을 선우의 손에 쥐여줄 수밖에 없었다.

가문 내의 부패한 카르텔을 역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자금을 갈취하는 구례 차도살인의 완벽한 결실이었다.

"훌륭하구나."

선우는 은자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묵직한 금속의 무게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이 돈은 단순한 사치재가 아니었다. 장차 대몽골 항전을 위한 군수 기지의 초석이자, 고려의 기술적 한계를 돌파할 열쇠였다.

"이제 움직여야겠다."

"몸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으셨습니다."

수연이 만류했으나, 선우는 이미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북방의 형세는 우리가 숨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그의 눈빛은 이미 개경의 좁은 가택을 벗어나,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한반도 북방과 대륙의 초원을 향하고 있었다.

* * *

개경 북동쪽, 군기감(軍器監)의 장인들이 모여 있는 야철장(冶鐵匠).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유황 냄새와 석탄 타는 연기가 하늘을 검게 뒤덮고 있었다. 귓가를 찢는 쇠망치 소리와 거대한 풀무질 소리가 대기를 흔들었다. 이곳은 고려의 무기와 갑주를 생산하는 군사 기술의 심장부였으나, 실상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쓸모없는 천것들이! 국가의 귀한 구리와 철을 이따위 불량품으로 낭비해?"

가죽 장포를 입은 군기감의 주부(注簿, 종7품 행정관)가 가마 앞에서 흙투성이가 된 채 서 있는 사내를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사내의 이름은 한길. 군기감에서 가장 고집스럽고 말수 적기로 소문난 고공(高工)이었다. 그의 앞에는 형태가 일그러진 점토 가마와 시꺼넓게 그을린 쇳덩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한길이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글쟁이 관리들을 향한 깊은 불신과 피로가 섞여 있었다.

"네 이놈! 감히 조정의 관리에게 말대꾸를 해? 당장 저놈을 묶어 곤장을 쳐라!"

주부의 호통에 주변의 군졸들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섰다. 한길은 주먹을 꽉 쥐었으나, 신분의 벽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지녔어도 천민 고공에 불과한 그가 관리의 처벌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멈추시오."

나직하지만 청중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야철장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단정한 비단 도포를 입었으나, 어딘가 냉혹한 기운을 풍기는 젊은 선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민선우였다.

주부는 선우의 고급스러운 의복과 당당한 기세를 보고 주춤했다.

"그대는 뉘시오? 이곳은 군기감의 사적인 징벌 구역이거늘, 어찌 외인이 간섭하는가."

선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주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고려율 구례(舊例) 고공고용조(高工雇用條) 제4조에 이르기를, '군기감의 관할 하에 있는 기술 장인은 국가의 공무를 수행하는 자이므로, 그 과실이 명백한 사법적 범죄가 아닌 한, 현장 관리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장형을 가할 수 없다' 하였소. 또한 동률 제7조에는 '기술적 실패로 인한 자재의 손실은 매년 조정이 책정한 감모율(減耗率) 범위 내에서 보전하며, 이를 이유로 신체적 처벌을 가하는 자는 역으로 장(杖) 육십 대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지."

주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슨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는가! 이놈은 국가의 구리를 허비한 대역죄인이다!"

"대역죄라 함은 형부(刑部)의 판결이 있어야 성립하는 법. 종7품 주부의 직권으로 대역죄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월권이자 고려의 사법 체계를 모독하는 행위요. 내가 이 사실을 어사대에 상소하여 귀하의 직첩을 회수하도록 조치해 줄까?"

선우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철저히 법률의 자구와 격식을 들이대며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정교한 행정전이었다. 주부는 선우의 서슬 퍼런 법리적 압박에 기가 죽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주변의 기장들과 군졸들 역시 선우의 위압감에 압도당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흥, 두고 보자!"

결국 주부는 튄 침을 닦으며 군졸들을 이끌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야철장에 침묵이 흘렀다.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던 한길이 쓰러진 점토 가마 옆에서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감사함 대신 경계심이 가득했다.

"양반 나리가 무슨 일로 이 더러운 야철장까지 찾아와 천민을 도우시는 겁니까. 내게서 뜯어낼 이권이라도 있으신 모양이지요."

한길의 말투는 거칠고 날이 서 있었다.

선우는 대답 대신 한길의 발치에 놓여 있는 흙 묻은 옹기단지로 시선을 돌렸다. 단지 겉면에 묻은 흰색 결정체와 거무스름한 가루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

선우의 오른쪽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푸른빛으로 점멸했다. 그의 시야에 단지의 내력과 수치화된 정보들이 텍스트로 떠올랐다.

[ 대상: 한길이 정제 중인 토착 분토(糞土) 단지 ] - 성분: 질산칼륨(초석) 32%, 유황 분말 15%, 목탄 가루 18%, 다량의 규소 분해 불순물(수분 및 나트륨염) 35%. - 역사적 기록: 송나라의 화약 제조법을 모방하려 했으나, 고려의 기후적 다습함과 불순물 정제 기술의 부재로 인해 점화 시 폭발하지 않고 연기만 뿜어내는 상태임. - 숨겨진 이권 및 해결책: 고려 토착 사찰의 화장터 분토(화장 후 남은 골분과 재가 토양의 질산염과 결합한 흙)를 활용할 시, 초기 질산칼륨 농축도를 70%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 - [경고 - 복선]: 단, 사찰 소유의 땅에서 자원을 무단 징발하는 것은 고려 율법상 불교계의 '사원면세 및 면역 특권'과 정면으로 충돌함. 불교계의 구례 독점권을 우회할 사법적 장치 마련이 필수적임.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재 고려의 화약 기술이 제자리걸음을 걷는 이유가 명확히 보였다. 송나라에서 수입하는 화약은 순도가 낮았고, 자체적으로 정제하려 해도 습도 조절과 불순물 제거법을 몰라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사찰의 화장터 뒷마당에 널려 있는 분토에 있었다.

선우는 단지 쪽으로 몸을 숙여 흙을 한 줌 집어 올렸다. 손가락 끝으로 흙의 감촉을 느끼며 나직하게 말했다.

"초석의 순도가 너무 낮군. 나트륨염과 수분이 섞여 있으니 불을 붙여 보았자 매캐한 연기만 나고 가마를 날려버릴 폭발력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한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글만 읽는 양반이 화약의 성질을 알 리가 없는데."

"네가 겪고 있는 실패의 원인은 정제법에 있다. 송나라의 화약 배합법은 고려의 다습한 기후에는 맞지 않아. 초석과 유황, 목탄의 황금비율은 날씨와 정제 도구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바람이 불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초석 75, 유황 10, 목탄 15의 비율을 기본으로 삼고,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가마의 온도를 조절해야 하지."

선우가 제시한 정량적 수치에 한길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십 번의 실패를 거치면서도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배합의 수치를, 이 젊은 귀족이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흙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길."

선우가 한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지배자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내가 가문에서 뜯어낸 은자 오천 냥이 여기 있다."

선우는 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한길의 발치에 던졌다. 둔탁한 금속음이 야철장의 먼지 낀 바닥에 울려 퍼졌다. 주변에서 엿듣고 있던 다른 기장들과 사공들의 시선이 일제히 은자 주머니로 쏠렸다.

"이 돈으로 군기감 배후의 야철 가마와 부지를 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너를 이 야철장의 책임 고공으로 고용하겠다."

한길은 은자 주머니와 선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제게… 겨우 화약이나 만들라고 이 거금을 쓰시는 겁니까?"

"화약?"

선우가 차갑게 웃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화약이 아니다. 이 화약을 담아 천하를 뒤흔들 거대한 철통, 즉 화포(火砲)다. 나는 너를 일개 대장장이로 부리려는 것이 아니다. 훗날 저 북방의 여진과 초원의 괴물들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올 때, 그들의 기병대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릴 화포 군대의 사령관, 기장(器將)의 자리를 네게 주려는 것이다."

사령관. 기장.

천민 대장장이의 입에서 평생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 선우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한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글쟁이 귀족들에게 무시당하고 짓밟히며 쌓였던 울분이, 선우가 제시한 거대한 비전 앞에서 폭발적인 야망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서출 주제에 가문에서 쫓겨나더니 미쳤구나!"

그때, 야철장 구석에서 작업하던 늙은 사공 하나가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화포 타령이냐? 흙먼지에 불을 붙인다고 천하가 흔들려? 양반 놈이 돈이 좀 생기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군!"

주변의 다른 기장들과 사공들도 웅성거리며 비웃기 시작했다. 천민인 한길을 사령관으로 삼겠다는 선우의 말이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선우는 그들의 비웃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한길이 모아둔 정제 중인 흙더미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은자 주머니 옆에서 작은 약포를 꺼냈다. 사전에 수연을 통해 개경의 약재상에서 구해온 고순도의 황과 목탄 가루였다. 선우는 한길의 단지에서 퍼 올린 초석 분말을 섞어, 자신이 말한 비율대로 흙더미 위에 어림잡아 뿌렸다.

"비웃음은 무지의 가장 확실한 증거지."

선우가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들었다.

"잘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딛고 선 이 땅의 힘이다."

탁. 탁.

철편과 부싯돌이 마찰하며 날카로운 불꽃이 흙더미 위로 떨어졌다.

기장들과 사공들이 비웃는 낯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치이익-!

불꽃이 가루에 닿는 순간, 예측을 초월한 맹렬한 자색(자줏빛)의 화염이 폭음과 함께 치솟아 올랐다.

콰아아앙!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눈을 멀게 할 듯한 강렬한 자줏빛 불길이 야철장의 어두운 천장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고, 그 충격파에 주변의 점토 가마들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매캐한 유황 냄새와 함께 강력한 열풍이 야철장 전체를 쓸고 지나갔다.

"으아악!"

"이, 이게 무슨…!"

비웃던 기장들과 사공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자빠졌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색의 화염 속에서, 단 한 사람, 민선우만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불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일렁이는 보랏빛 불꽃은, 장차 이 고려 땅을 피로 물들일 전쟁의 서막이자 새로운 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경악한 한길이 넋을 잃고 그 화염을 바라보았다.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길을 바라보았다.

"선택해라, 한길. 평생 흙먼지를 마시며 매질을 당하는 대장장이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내 손을 잡고 천하를 뒤흔들 기장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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