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뇌리를 헤집었다. 비릿한 혈향이 목구멍을 타고 끊임없이 역류했다.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선이 턱을 적시고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역사를 비튼 대가는 즉각적이고도 잔혹했다. 가노 덕수의 운명을 꺾어버린 대가로 찾아온 신체적 역풍은 선우의 시야를 흐릿하게 물들였다.

"이곳이군. 국법을 어기고 어사대의 기밀문서와 가문의 보물을 훔쳐낸 대역죄인이 있는 곳이."

우지끈 부서진 대문 틈새로 서늘한 쇳소리가 울렸다. 푸른 도포를 걸친 어사대 군관들이 마당을 빽빽하게 에워쌌다. 그들의 가슴팍에 새겨진 해치 문양이 일렁이는 횃불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 선두에 선 이복형, 민세형이 백야(白冶)로 단련된 관검을 치켜들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네 이놈, 선우야. 서출 주제에 감히 가문의 가산을 훔쳐내고 어사대의 기밀을 탐해? 당장 저놈을 포박하라!"

민세형의 호통에 군관들이 쇠사슬을 절렁이며 다가왔다.

선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턱에 묻은 피를 소맷자락으로 쓸어내렸다. 머릿속은 터질 듯이 아팠지만, 눈동자만큼은 사막의 밤바다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행정고시 수석이자 역사 분석관이었던 이수현의 이성이 고려율(高麗律)의 수많은 조항을 실시간으로 스캔하기 시작했다.

"멈추어라."

선우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마당의 소란을 뚫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피를 흘리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기세에, 다가오던 군관들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무엇을 망설이느냐! 저놈은 대역죄인이다! 당장 사지를 묶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민세형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서출 동생을 단숨에 밟아 죽이겠다는 노골적인 살의가 묻어났다.

선우는 민세형의 등 뒤에 서 있는 어사대 서리(書吏)를 응시했다. 서리의 손에는 붉은 낙인이 찍힌 국문 영장이 들려 있었다.

"어사대 령(令)에 따른 국문 영장이라."

선우가 차갑게 웃었다. 턱 끝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바닥의 흙을 적셨다.

"민세형 형님. 그리고 어사대의 관리들이여. 고려의 법률을 집행하는 자들이 정작 『고려율』의 가장 기본적인 구례(舊例)조차 망각한 것인가?"

"법리라니? 이 비천한 서출 놈이 감히 어디서 국법을 논하느냐!"

민세형이 검을 바닥에 쿵 찧으며 비웃었다.

선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은 비틀거렸으나 곧게 뻗어 있었다.

"『고려율』 잡령(雜令)에 명시된 내방 금지 구례(內房禁止舊例)를 잊었단 말인가? 아무리 어사대의 국문 영장이라 할지라도, 명확한 역모의 증좌가 상소되어 어사대 대부(大夫)의 친필 서명이 담긴 압관(押官)이 찍히지 않은 이상, 사대부 가문의 사택 내방(內房)은 함부로 수색하거나 가노를 체포할 수 없다."

어사대 서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서리가 황급히 들고 있던 영장을 품 안으로 감추려 했다.

선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이곳은 민씨 가문의 사택이자, 주상 전하께서 우리 가문에 하사하신 공음전(功蔭田)의 연장선이다. 내 비록 서출의 몸이나, 엄연히 민씨 가문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 내방 금지의 구례를 깨고 무단으로 무기를 들고 난입한 것은, 도리어 어사대가 사대부의 가택을 불법 침입한 죄에 해당한다. 서리께서는 대관(臺官)의 직첩을 걸고 이 무법한 행위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 이놈이...!"

어사대 서리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고려의 법률과 관습법은 가문의 자치권을 강력하게 보장하고 있었다. 특히 묘청의 난 직전의 현 시점에서는 개경 귀족들의 반발을 의려해 왕실조차 사대부 가택의 내방 수색은 극도로 자제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법률의 자구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선우의 정교한 반박에 관리가 말문이 막힌 것이다.

마당 구석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인물이 있었다.

남루한 비단 옷을 입고 어깨를 부르르 떨며 흐느끼던 소녀. 선우의 서출 누이이자 가문 내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민수연이었다.

수연의 고운 눈망울에는 공포와 경악이 교차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매질을 당하고 숨죽이던 남동생이, 어사대의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법리를 읊조리며 상대를 압박하는 모습은 그녀가 알던 선우가 아니었다.

군관 하나가 수연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며 가로막으려 하자, 선우가 번개처럼 다가가 그 앞을 막아섰다.

선우는 떨고 있는 수연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차가운 가죽 장갑 밑으로 그녀의 여린 뼈마디가 느껴졌다. 선우는 수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누님."

"선, 선우야... 어쩌면 좋으냐. 우리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

"울지 마십시오."

선우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가웠으나, 동시에 기이한 확신을 담고 있었다.

"이 고려의 법망은 저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법은 가장 날카로운 무기이며, 지키는 자에게는 철옹성이 됩니다. 내 반드시 법망 안에서 우리 남매의 정당한 명분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개를 드십시오."

수연은 선우의 심연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인간을 도구로 취급하는 듯한 서늘한 안광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방패보다 든든했다. 수연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보원으로서 암약해 온 그녀의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둘 사이의 묵시적인 동맹이 맺어졌다.

선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어사대 서리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오른쪽 눈에 기괴한 열감이 가득 차오르며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이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 조회 가동] - 대상: 어사대 서리 민장수(閔長壽)가 소지한 집행 관인(官印) - 숨겨진 역사적 사실: 본 관인은 어사대 장령(掌令)과 민씨 가문의 안주인(민세형의 모친) 사이의 불법적인 사승(師承) 카르텔과 뇌물 수수 동맹의 징표임. 관인 후면에 미세하게 새겨진 문양은 가문의 공음전 비리를 덮어주는 대가로 예부 서리가 받은 사리탑 중수 비자금의 유통 경로와 일치함.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텍스트의 파도에 선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상속 문서에 찍혀 있던 어사대 압관인의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 흔적이 바로 이 집행 관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문의 안주인과 어사대 내부의 구린 뒷거래가 영안을 통해 실시간으로 폭로된 것이다.

선우는 천천히 어사대 서리에게 다가갔다. 서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리 장수(長壽) 나리."

선우가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자, 서리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자신의 이름을 이 서출 놈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대 품에 있는 그 관인. 그 관인 뒤에 새겨진 예부 사리탑의 문양이 참으로 아름답더군요. 우리 가문의 안주인 마님께서 예부의 불교 행사 때마다 시주하신 그 막대한 비자금이, 어찌하여 어사대의 사승(師承) 장부와 연결되어 있는지 참으로 기이할 따름입니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서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 비밀은 어사대 내부에서도 극소수만이 공유하는 가문 간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것이 조정에 알려지는 날에는 어사대 전체가 탄핵의 칼바람을 맞을 터였다.

선우는 서리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려율』에 따르면 가노가 주인을 고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조정의 관리가 사대부 가문과 결탁하여 뇌물을 수수하고 사적으로 국문 영장을 남용한 것은 '장리(贓吏·탐관오리)'의 죄에 해당하여 가문 전체가 유배를 가고 가산이 적몰되는 중죄입니다. 관인 뒤의 문양을 지금 당장 이 마당에서 공개해 볼까요?"

땀방울이 서리의 턱을 타고 비 오듯 흘러내렸다. 손에 쥔 영장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이, 이것은... 내방 수색의 명분이 부족하다. 회군하라!"

서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냐! 이놈을 잡지 않고 회군이라니!"

민세형이 광포하게 날뛰며 서리의 덜미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서리는 이미 혼비백산하여 군관들을 이끌고 대문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사대의 부당한 난입을 막아내고 가문의 명예를 지켰으니, 이제 남은 것은 가문 내부의 법리뿐이겠지요."

선우가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하며 민세형을 내려다보았다.

지식과 정보의 우위가 가져다준 완벽한 판정승이었다. 어사대의 서리와 군관들을 오직 고려율과 영안의 비밀 폭로만으로 데꿀멍하게 만들어 쫓아 버린 것이다.

민세형은 부르르 떨며 검을 칼집에 쑤셔 넣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진 자의 발악이었다.

"오냐... 오냐, 선우 이 비천한 서출 놈아! 네 놈이 주둥이를 잘 놀려 오늘은 피했으나, 내일 아침 열릴 종문(宗門)의 가택 가판(家判)에서도 그리 당당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민세형이 이빨을 갈며 선우의 얼굴 앞으로 다가와 삿대질을 해댔다.

"내일 가판에서 네 놈이 가문의 보물을 훔치고 대역을 모의했다는 죄명으로 종문에서 완전히 파내어, 저잣거리에 시체로 내던져지게 만들어 주마! 내일 아침이다!"

민세형은 침을 뱉고는 말머리를 돌려 거칠게 사택을 빠져나갔다.

마당에는 부서진 대문 조각과 매서운 밤바람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선우는 멀어지는 이복형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피를 삼켰다. 역풍의 부작용으로 시야가 일시적으로 어두워졌으나, 그의 입가에는 냉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일 아침, 민씨 가문의 종문 가판.

그곳은 선우가 이 가문의 썩은 뿌리를 사법적으로 완전히 붕괴시키고, 고려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행정전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릴 전장이 될 것이었다.

바람이 윙윙거리며 부서진 대문 틈새를 훑고 지나갔다. 마당에 가득했던 횃불의 잔해들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꺼져갔다.

선우는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억누르며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입안 가득 고인 쇠맛을 삼키려 침을 모았으나, 이내 붉은 타액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수현으로서 가졌던 현대의 기억과 민선우라는 육체가 가진 서출의 한계가 영안의 힘을 빌려 역사를 바꿀 때마다 충돌하고 있었다.

"선우야..."

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 어사대 서리를 사시나무 떨듯 떨게 만들었던 동생의 냉혹한 안광이, 그녀에게는 낯설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선우는 수연의 손길을 가볍게 뿌리치며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조금 전의 비틀거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곧고 단호했다.

"방 안으로 드십시오, 누님. 밖의 눈이 많습니다."

수연은 침을 삼키며 선우의 뒤를 따랐다.

빛바랜 한지 문창살 사이로 달빛이 스며드는 좁고 누추한 방 안. 가구라곤 삐걱이는 서안 하나와 정체 모를 고서 몇 권이 전부인 곳이었다. 선우는 서안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누이를 걱정하는 남동생의 그것이 아니었다. 철저히 상대를 분석하고 쓸모를 저울질하는 행정가의 눈이었다.

"방금 서리가 들고 있던 영장을 보셨을 테지요."

선우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 그래. 세형 오라버니가 어사대의 권세를 빌려 너를 완전히 매장하려 한 것이 아니더냐. 그런데 너는 어찌 그 서리의 이름과 가문의 비밀을 그리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게냐? 마치... 모든 것을 미리 보고 있었던 것처럼."

수연의 목소리에 경외와 의구심이 섞여 들었다.

선우는 대답 대신 서안 위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제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일 아침 열릴 종문의 가택 가판(家判)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를 손에 넣는 것입니다."

"증거라니? 세형 오라버니와 안주인 마님이 종장(宗長)들을 이미 포섭했을 터인데, 우리 같은 서출의 말을 누가 믿어주겠느냐."

"믿게 만들어야지요. 고려율은 서출이라 할지라도 가문의 적통이 끊어지거나, 적자가 가문의 가산을 사적으로 유용하여 국법을 어겼을 경우 그 상속권을 박탈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우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기이하게 빛났다.

"안주인의 처소, 서쪽 벽면에 놓인 자개함 밑바닥을 아십니까?"

수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곳은 안주인 마님이 가장 아끼는 밀실의 열쇠와 사사로운 서찰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내가 가끔 안방의 시중을 들 때 보았지. 하지만 그곳은 삼엄하게 감시받고 있어."

"내일 아침 가판이 시작되기 직전, 가문 내부가 가장 어수선할 때 그 자개함 밑바닥을 뜯어내십시오. 그 안에는 어사대 장령과 가문 안주인이 주고받은 밀약서와 함께, 가문의 공음전 일부를 어사대 관리들의 사승(師承) 카르텔에 무상으로 넘기겠다는 상속 문서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우가 영안을 통해 간파한 민씨 가문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1화에서 청동 향로를 조회했을 때 흘러나왔던 텍스트, 즉 어사대 압관인의 불법 사승 카르텔 흔적이 바로 그 상속 문서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그... 그것이 정말 사실이냐? 만약 발각되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장살당할 것이다!"

수연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발각되지 않습니다. 내일 가판이 시작되면 모든 종장과 가신들의 이목은 사당 앞뜰에 서 있는 저에게 쏠릴 것입니다. 민세형은 저를 대역죄인으로 몰아세우느라 안방의 감시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틈을 타 누님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선우의 도구적 사고방식이 수연을 냉혹하게 몰아세웠다. 수연은 선우의 눈에서 타협 없는 단호함을 읽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거대한 도박의 판돈으로 던져졌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도박만이 평생을 노비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온 서출의 굴레를 벗겨줄 유일한 동아줄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수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내 목숨을 걸고 그 문서를 찾아내마. 하지만 선우야, 네가 가판에서 버텨내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지 않는 싸움만 합니다."

수연이 긴장된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간 후, 선우는 홀로 남아 『고려율』의 조항들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정렬했다.

당대의 법률 체계는 가문의 자치법과 국법이 묘하게 중첩되어 있었다. 가택 가판은 가문 내부의 규율로 죄인을 심판하는 자리이지만, 그 판결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최종적으로 형부(刑部)의 추인을 받아야 했다. 즉, 가문 수뇌부가 아무리 사적으로 선우를 죽이려 해도, 선우가 국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범죄를 입증해 낸다면 판세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바로 그때였다.

톡, 토독.

방 뒷창문에서 아주 미세한 기척이 들렸다. 바람 소리와는 다른, 인위적인 타격음이었다.

선우는 숨을 죽이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덕수가 떨어뜨리고 간 가죽 채찍의 손잡이가 손에 잡혔다.

창문 틈새로 작은 대나무 통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내 기척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선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대나무 통을 주워 올렸다. 통 덮개를 열자, 붉은 진흙으로 봉인된 서신과 함께 묵직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거칠게 구워진 철제 파편이었다. 검붉은 녹이 슬어 있는 그 파편에는 기묘하게도 초석(질산칼륨)의 퀴퀴한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서신을 펼쳤다.

[군기감(軍器監) 야철장(冶鐵匠) 한길의 수하가 전하오니. 귀하가 일전에 사택 가노를 통해 보낸 '토법 초석 정제법'의 초안은 흥미로우나, 당대 조정의 율법과 예부의 사찰 관리 규정상 불교 사찰의 화장터 흙을 무단으로 채굴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소. 특히 개경의 문벌귀족들이 사찰의 사리탑 중수를 명분으로 사찰 토지의 독점권을 쥐고 있는바, 귀하가 제시한 방법은 법적 소유권 제한 규정에 걸려 단 한 되의 초석도 생산하지 못하고 역모죄로 엮이기 딱 좋은 약점이 될 것이오. 이 한계를 극복할 방도를 내일 가판에서 증명해 보이지 못한다면, 우리 야철장 공고(工匠)들은 귀하와의 동맹을 거부할 것이오.]

선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한길.

고려 최고의 야철장이자, 향후 대몽골 항전을 위한 화약 무기 개발의 핵심 파트너가 될 사내였다. 비록 지금은 가문 내의 암투에 치여 있는 서출에 불과한 자신이지만, 이미 가노들을 통해 군기감의 동향을 파악하고 접촉을 시도해 두었던 결실이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사찰 화장터의 초석 퇴적 농축 수집법... 그리고 불교계와 결탁한 개경 문벌의 사리탑 무단 중수 비리라."

선우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단순히 가문 내의 싸움으로 끝날 가판이 아니었다. 이 가판의 결과는 곧바로 군기감 야철장과의 동맹, 그리고 더 나아가 개경 문벌귀족 전체의 돈줄을 죄어오는 사법적 차도살인의 초석이 될 터였다.

그는 서신을 촛불 불꽃에 밀어 넣었다. 붉은 불꽃이 서신을 집어삼키며 방 안을 일순간 환하게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

다음 날 아침.

민씨 가문의 사당 앞뜰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제사 지낼 때나 열리던 사당의 거대한 활엽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마당 한가운데에는 멍석 한 장이 깔려 있었다.

좌우로는 가문의 종장(宗長)들과 방계 어른들 수십 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의자에 의지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마당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선우에게 쏠려 있었다.

단상 가장 높은 곳에는 가문의 실권자인 안주인 노씨(盧氏)와 이복형 민세형이 좌정하고 있었다. 노씨는 화려한 자수 도포를 걸친 채,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서출 선우는 들으라."

종장 중 가장 연배가 높은 노인이 의사봉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가문의 보물인 청동 향로를 훔쳐 사사로이 처분하려 하였고, 어사대의 기밀문서를 탈취하여 조정의 권위를 능멸하였다. 이에 종문은 가택 가판을 열어 네 놈의 죄를 묻고, 족보에서 이름을 파내어 관가에 압송하고자 하는데, 스스로 변명할 말이 있는가?"

민세형이 승리감에 도취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실룩였다. 이미 종장들의 판결은 정해져 있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였다.

선우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안주인 노씨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오른쪽 눈이 다시 한번 욱신거리며 뜨거운 열감을 뿜어냈다. 영안의 시야가 노씨의 품 안을 관통했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 조회 가동] - 대상: 안주인 노씨의 소맷자락 속에 숨겨진 서찰 - 기밀 텍스트: "서출 민선우가 서경(평양)의 묘청 세력과 내통하여 개경의 황실을 전복하려 했다는 위조된 서신. 본 서신에는 예부의 위조 낙인이 찍혀 있으며, 가판 즉시 이를 증거로 제시하여 현장에서 장살(杖殺) 명분을 확보하려 함."

선우의 눈빛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단순한 가문 추방이 아니었다. 저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이 자리에서 합법적으로 죽여 없앨 '역모의 덫'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위조된 묘청과의 내통 서신.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고려율의 그 어떤 구례로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수연이 안방에서 문서를 찾아오기 전에, 안주인이 저 위조 서신을 먼저 꺼내 든다면 모든 판이 깨진다.

시간이 없었다. 선우는 턱을 굳게 다물며, 그의 전 생애를 건 첫 번째 사법적 사투의 서막을 올리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