쩍.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은 둔탁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고막을 찢고 들어온 진동은 이내 가슴팍을 사선으로 베고 지나가는 작열감으로 변했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은 한 줌의 핏물과 섞인 마른기침뿐이었다.
"서출 놈이 매질 몇 대에 엄살은. 대방마님께서 아끼시던 구리 향로를 훔쳐다 어디에 팔아넘겼느냐? 바른대로 대지 못할까!"
머리 위에서 내리누르는 목소리는 거칠고 상스러웠다.
바닥은 축축하고 차가운 흙바닥이었다. 뺨에 닿는 흙먼지에서 썩은 짚단과 누린내가 섞여 났다. 이수현은—아니, 이제는 민선우라 불리는 이 사내의 육신은 본능적으로 사지를 웅크렸다.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려 왔다. 행정고시 수석 합격 후 기획재정부에서 무역 및 역사적 세제 개편안을 분석하던 기억들이, 12세기 고려의 문벌귀족 민씨 가문의 서자(庶子)인 '민선우'의 기억과 사정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1133년, 고려 인종 11년.'
연도가 뇌리에 박히는 순간, 등 뒤로 다시 한번 채찍이 내리쳤다. 가죽 끝에 달린 쇠붙이가 살점을 뜯어내는 감각에 선우는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터져 비릿한 액체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다리를 분질러 놓아야 입을 열겠느냐?"
가노장(家奴長) 덕수의 험악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름진 얼굴에 돋아난 검버섯이 흉물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묻은 가죽 채찍이 들려 있었고, 양옆으로는 몽둥이를 든 사택 사병 셋이 선우를 포위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우는 차가운 바닥을 기었다. 살아야 했다. 행시 수석의 두뇌가 회전하기 시작한 것은 고통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훈육이 아니었다. 도둑질이라는 누명을 씌워 이 자리에서 장살(杖殺)하려는 명백한 의도였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았다.
마당 한구석, 잡초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청동 제기(祭器)였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밀교의 의식용 향로.
그 향로의 손잡이를 움켜쥐는 순간, 선우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렸다.
두통이 사라지고, 오른쪽 눈 안구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시야가 붉게 물들더니, 이내 황금빛의 미세한 글자들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이 개안(開眼)합니다.]
[대상 유물: 고려 민씨 가문의 '밀교 청동 쌍이향로(雙耳香爐)'] [- 제작 시기: 선종 8년 (1091년)] [- 소유권 이력: 현 가문의 안주인 임씨(任氏)가 친정인 평장사 임원후 가문에서 가져온 혼수품.] [- 은폐된 서사: 해당 향로의 밑바닥에는 어사대 장령(掌令)의 사적인 압관인(押官印)이 불법 각인되어 있음. 이는 임씨 가문과 어사대 간의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 및 공음전(功蔭田) 상속 문서 위조의 물증임.]
선우의 눈동자가 기괴할 정도로 투명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시선이 향로에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노장 덕수에게로 향했다. 덕수의 머리 위로도 푸른빛의 텍스트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상 인물: 민가 가노장 덕수(德守, 42세)] [- 신분: 노비(사노)] [- 소속: 민세형(민씨 가문의 장자)의 사주를 받음.] [- 율법 위반 사항: 고려율 명례률(名例律) 제32조 및 직관장리도형조(職官臟吏盜刑條) 위반. 지난 3년간 개경 남문의 사설 투전방에서 가문의 전곡(錢穀) 120관을 횡령하여 탕진함. 이를 은폐하기 위해 동부 대창(大倉)의 곡물 장부를 허위로 작성함.]
선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고통 속에서 피어오른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철저한 계산이었다.
이것이 어째서 가택 재판의 형식을 띤 살인극인지, 그 구조가 단숨에 파악되었다.
'민세형.'
이복형인 그자가 움직인 것이다. 올해 중추(仲秋)에 있을 음서(蔭敍) 배당 때문이었다.
고려의 음서제는 한 가문에서 한 명의 자제에게만 무시험 관직 진출권을 부여하는 것이 관례였다. 민세형의 적자(嫡子)인 민우진은 학문이 일천하여 과거로는 급제가 불가능했다. 반면, 서자임에도 천재성을 보여 가문의 어른들에게 은밀히 주목받던 민선우는 눈엣가시였을 터였다.
'나를 도둑으로 몰아 의절시키거나 죽여서, 음서의 경쟁자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속셈이군.'
문벌귀족의 카르텔은 이토록 추잡하고 명료했다. 사승 관계와 혼인 동맹으로 엮인 그들은 자신들의 파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자 하나쯤은 파리 목숨처럼 비틀어 죽일 수 있었다.
"죽어가는 놈이 무엇이 우스워 입을 벌리느냐!"
덕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채찍을 높이 쳐들었다. 쇠가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다시 한번 마당을 울리려던 찰나였다.
"덕수야."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당의 공기를 얼려 버렸다.
채찍을 내리치려던 덕수의 동작이 우스꽝스럽게 멈췄다. 매질을 당해 초주검이 된 줄 알았던 서자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기이할 정도로 서늘했기 때문이다.
선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옷자락에서 핏방울이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방금 전까지 매를 맞던 나약한 서자의 것이 아니었다. 황금빛 서기가 서린 눈동자가 덕수의 눈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너는 지금 매질을 서두를 때가 아닐 텐데."
"이 서출 놈이 미쳤나... 어디서 반말을 짓거리느냐! 저놈의 주둥이를 당장—"
"개경 남문, 백가(白家)가 운영하는 투전방."
선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덕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 그것이 무슨..."
"지난달 보름, 네가 판돈으로 걸었던 십 관짜리 은병(銀甁) 세 개. 그것이 어디서 나온 물건이더냐?"
선우는 한 걸음 내딛었다. 매질로 엉망이 된 다리였으나, 그의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가노들을 지휘하는 행정관의 풍모가 서자의 껍데기를 뚫고 나오고 있었다.
"민씨 가문의 동부 대창(大倉)에서 매해 거두어들이는 면포와 미곡의 장부는 네 손을 거치지. 작년 가을, 수재로 인해 유실되었다고 보고한 미곡 오십 석은 실제로 어디로 흘러갔을까?"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덕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채찍을 쥔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려 가죽 끈이 바닥으로 늘어졌다.
주변의 사병들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 역시 가노장이 사적으로 재물을 빼돌려 도박을 해왔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감정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사실과 수치, 그리고 법률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상대를 해체하는 감각이었다.
"고려율 명례률에 따르면, 노비가 주가의 재산을 도적질하여 그 액수가 십 관을 넘을 시에는 장(杖) 일백 대에 처하고 원지배형(遠地配刑)에 처하게 되어 있다. 하물며 그 액수가 일백 관이 넘는다면..."
선우가 덕수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피비린내 섞인 그의 숨결이 덕수의 얼굴에 닿았다.
"참형(斬刑)이다. 덕수야. 네 목이 관가 앞 저잣거리에 걸리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이, 이놈이 허세를... 증거가 어디 있다고!"
덕수가 소리를 질렀으나,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증거?"
선우는 품 안에서 손을 뻗어, 덕수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가죽 주머니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덕수가 저항할 틈도 없었다.
선우는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든 작은 놋쇠 열쇠를 꺼내 보였다.
"동부 대창 뒤편, 세 번째 옹기 밑바닥에 묻어둔 이중 장부. 그 열쇠가 바로 이것이지. 내가 지금 당장 대방마님께 이 열쇠를 바치며 상소(上疏)를 올린다면, 네 족속들은 어찌 될 것 같으냐?"
덕수의 무릎이 털썩 꺾였다.
그는 장부를 횡령한 사실을 가문의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중 장부를 숨겨둔 장소는 그가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묻어둔 곳이었다. 눈앞의 서자는 그것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정확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소, 소인... 도련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덕수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읍소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채찍을 휘두르던 기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식의 우위가 가져다준 완벽한 굴복이었다. 선우는 자신을 짓누르던 물리적 폭력을 오직 '정보'와 '법률'의 힘만으로 뒤집어엎었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희열이 솟구쳤다.
'이것이 영안의 힘인가.'
그러나 희열도 잠시, 갑자기 오른쪽 눈에서 극심한 통증이 재발했다.
"윽..."
머릿속이 핑 돌며 시야가 일순간 암전되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선우는 급히 소맷자락으로 입을 막았으나, 붉은 피가 옷감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경고: 역사의 인과에 개입하여 '가노장 덕수'의 운명 궤적을 비틀었습니다.] [역풍(歷史回歸) 현상이 발생합니다. 신체적 대가가 지불됩니다.] [부작용: 극심한 토혈 및 일시적 이명(耳鳴).]
귀가 먹먹해지며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역사를 바꾸는 대가는 참혹했다. 하지만 선우는 쓰러지지 않았다. 정신을 잃으면 이 가혹한 고려의 모래밭에서 그대로 매장당할 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턱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선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순간이었다.
우지끈—!
사택의 나무 대문이 비정상적인 힘에 의해 부서지며 열렸다.
귀가 멍한 와중에도 대지가 울리는 듯한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선우의 고막을 자극했다.
마당으로 가득 들이닥친 것은 푸른빛의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어사대(御史臺)의 상징인 해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사대의 군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선 사내.
화려한 비단 도포를 걸치고,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은 사내의 얼굴이 선우의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이복형, 민세형이었다.
"이곳이군. 국법을 어기고 어사대의 기밀문서와 가문의 보물을 훔쳐낸 대역죄인이 있는 곳이."
민세형이 허리춤에서 관검(官劍)을 뽑아 들며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로 어사대 군관 수십 명이 삼엄하게 포위를 좁혀왔다.
일이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덕수가 떨어뜨린 채찍이 흙바닥에 뒹굴고 있는 마당 한가운데서, 선우는 검 차가운 쇠날을 겨누는 이복형의 눈을 응시했다.
여기서 한 걸음만 잘못 내딛으면, 가택 재판이 아닌 국법에 의한 처형이었다.
선우는 붉게 물든 입술을 깨물며, 칼끝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