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물서사 영안(史物書史 靈眼)의 붉은 텍스트가 시야의 중심에서 기괴하게 일렁였다.

[선택 훅: 즉시 2차 포격을 가해 법차를 파괴할 것인가, 혹은 적의 종교적 이적 사술을 법리적으로 역이용하여 개경 내 배후 세력까지 일망타진할 것인가?]

선우는 붉게 빛나는 질문을 바라보며 싸늘한 침묵을 지켰다. 시각을 마비시켰던 역풍의 잔재인 검은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멀리 서경 벌판에서 백색 불꽃을 뿜어대며 사기를 돋우는 묘청의 법차가 선명하게 비쳤다.

"어찌할까요, 선우 어른? 포를 한 번 더 쏘아 저 해괴한 수레를 박살 내 버릴까요?"

한길이 거친 숨을 내쉬며 포신의 열기를 식히던 가죽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군사들은 묘청의 백색 광채에 압도되어 주춤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포격을 멈춰라."

선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낮고 차가웠다.

"저것은 신통력이 아니다. 백린(白燐)과 질산바륨을 섞어 불꽃의 색을 인위적으로 바꾼 화공의 잔재주에 불과하다. 지금 저 장난감을 부숴 보아야, 무식한 백성들은 묘청이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적(異蹟)은 법리로 깨부수어야 가장 참혹하게 무너지는 법이다. 사도(邪道)를 빌려 군사를 움직인 죄, 그리고 국가의 화약 원료를 사사로이 유용한 죄를 물어 저들의 배후를 개경 법정에서 말려 죽일 것이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 북문을 지키던 군관들을 향해 검을 치켜세웠다.

"적들은 이미 기세를 잃고 퇴각하는 중이다. 전 군은 대열을 정비하라. 황명을 받들어, 서경을 향해 진격한다."

개경 수비의 승리는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경을 뿌리째 뽑아내기 위한 거대한 사법적, 군사적 추격전의 서막에 불과했다.

***

사흘 뒤, 토벌군은 개경을 떠나 황주 벌판을 가로질러 북상하고 있었다.

평탄해야 할 진격로였으나, 대열의 흐름은 유독 지체되었다. 3만 명에 달하는 토벌군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적의 습격이 아니었다. 뒤편에서 삐걱거리며 따라오는 군수 수송대의 태만 때문이었다.

선우는 어사대 감찰관의 푸른 관복 위에 철제 흉갑을 덧입은 채, 말 위에서 보급대의 장부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영안의 서늘한 활자들이 내려앉았다.

[남궁석의 군수 수송 장부: 외견상 군량 3,000석을 정상 수송 중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질 적재량은 1,800석에 불과함. 나머지 1,200석은 황주 서원 및 개경의 사승(師承) 가문으로 역밀매되어 은 500냥의 뇌물로 치환됨.]

[물적 증거: 수송 수레 제4호부터 제12호까지의 이중 바닥 적재함. 하단에 군량 대신 모래와 자갈을 채워 무게를 위장함.]

선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인간의 탐욕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장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남궁석 대장군을 불러라."

선우의 명령에 군관이 급히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은도금 갑주를 입은 비대한 체구의 사내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남궁석. 보수 문벌귀족의 거두인 김부식의 심복이자, 서경 정벌군의 군수를 책임지는 중군 대장군이었다.

"어사대 감찰관께서 이 누추한 수송대까지 무슨 일로 왕림하셨소? 아직 피도 안 마른 서자 놈이 어사대 마패를 찼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무대치고는 너무 먼지가 많지 않소?"

남궁석의 말투에는 멸시가 가득했다. 가문의 음서로 무관직을 얻고 공음전 수백 결을 거느린 그에게, 서출 출신의 신참 감찰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남궁 대장군. 수송 마차 제4호부터 제12호까지의 덮개를 모두 벗겨라."

선우가 말 위에서 내려다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남궁석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러나 이내 콧방귀를 뀌며 맞받아쳤다.

"군수 수송은 중군의 고유 권한이오. 어사대가 아무리 기세등등하다 한들, 전장 한복판에서 군기를 지체시키며 수색을 벌일 권한은 없을 텐데?"

"고려율 제24조 율법에 의거, 전시 어사대 감찰관은 군수품의 훼손 및 횡령 혐의가 명백할 시 즉각적인 압수 수색과 집행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군관들은 무엇을 하느냐. 당장 검수하라."

선우의 지시에 선우가 대동한 어사대 서리들이 군수 수레로 달려들었다. 남궁석의 사병들이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대치 정국을 형성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황주 벌판의 먼지 바람 속에서 맴돌았다.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느냐! 내 가문은 대대로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뼈를 묻어온 공신 가문이다! 서자 출신 주제에 감히 공음전을 지닌 무관을 벌하려 드는가!"

남궁석이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칼을 반쯤 뽑아 들었다. 주변의 귀족 출신 무관들도 선우를 포위하듯 거리를 좁혀왔다. 신분과 가문의 위세로 젊은 감찰관의 기를 죽이려는 수작이었다.

선우는 품에서 누런 가죽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남궁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궁 대장군. 그대가 믿는 그 공음전과 가문의 방패가, 바로 이 어사대 압관인(押官印)에서 비롯된 것인가?"

선우가 펼쳐 보인 것은 1화에서 영안으로 확보했던 민씨 가문의 비자금 상속 문서이자, 어사대 내부의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밀약서였다.

그 문서의 하단에는 남궁석의 가문 인장과 어사대 장령의 압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것은…… 네놈이 그걸 어떻게……!"

"귀문(貴門)의 혼인 동맹과 사승 관계가 참으로 눈물겹더군. 남궁 가문이 어사대 법관들에게 뇌물을 뿌려 상속세를 포탈하고, 그 대가로 군수권을 장악해 왔음이 이 문서 한 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이조 전랑의 죄목 장부에도 그대의 이름이 가장 붉게 적혀 있지."

선우는 한 걸음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군사들이 하루 한 홉의 미음으로 버티며 진격하는 동안, 그대는 군량 1,200석을 빼돌려 황주의 사찰들에 팔아넘겼다. 그 대가로 받은 은 500냥은 지금 그대의 수송 마차 안쪽 궤짝에 들어 있겠지. 내 말이 틀렸는가?"

남궁석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선우의 영안이 짚어낸 사실은 추호의 오차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싼 군사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험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일반 병졸들의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

"이, 이건 모함이다! 개경의 김부식 대감께서 나를 보증하셨거늘……!"

"김부식 대감은 개경의 법을 지키는 자지, 군량을 훔친 도둑놈을 지키는 자가 아니다."

선우는 품에서 인종이 하사했던 군령 밀지를 꺼내 높이 들었다. 황금색 문양이 박힌 밀지가 햇빛을 받아 엄숙하게 빛났다.

"황명이다. 전시에 군량을 횡령하여 적을 이롭게 하고 군심을 어지럽힌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참(卽斬)에 처한다."

남궁석은 도망치려 발을 뗐으나, 이미 선우의 철저한 배치 아래 어사대 호위병들이 그의 퇴로를 차단한 뒤였다.

"서자 놈이 감히…… 감히 내 목을 치겠단 말이냐! 내 가문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네 가문은 오늘부로 고려의 역사에서 지워질 것이다."

선우의 눈빛에는 일절의 자비도 없었다. 공포와 광기로 얼룩진 인간의 감정 따위는 그에게 단순한 행정 처리의 장애물에 불과했다.

"참(斬)하라."

선우의 담담한 명령과 함께, 어사대 호위관의 날카로운 참마도가 허공을 갈랐다.

서슬 퍼런 궤적과 함께 비대한 대장군의 목이 황주 벌판의 흙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붉은 선혈이 군수 마차의 밀포 위에 흩뿌려졌다.

순식간에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귀족 출신 무관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기를 떨어뜨렸고, 굶주린 병사들은 무릎을 꿇으며 선우를 향해 경외의 눈빛을 보냈다.

"남궁석의 목을 수송대 맨 앞 마차에 매달아라. 그리고 이중 바닥을 모두 부수어 숨겨진 은과 군량을 병사들에게 즉각 배분하라. 단 한 홉이라도 사사로이 숨기는 자는 이 자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선우의 목소리는 군법 그 자체였다. 이 단 한 번의 단죄로, 토벌군 내부의 고질적인 보급 비리는 완전히 숙청되었다.

***

그날 밤, 황주 벌판의 임시 군영지.

개경에서 화약과 포탄의 추가 보급을 이끌고 온 군기감의 한길이 선우의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수치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선우 어른, 남궁석의 목을 치신 것은 통쾌하나…… 현실적인 문제가 남았습니다. 현재 아군의 진격 속도로는 서경 성문 앞까지 화약 무기를 보급하는 데 최소 열흘이 더 걸립니다. 고려의 진흙길은 수레바퀴를 잡아먹는 늪과 같습니다."

한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당대 기술의 한계로 인해, 무거운 청동 화포와 수천 발의 석환, 화약을 수송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선우는 한길이 내민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4화에서 심어두었던 미완의 공식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한길. 예전에 자네가 제안했던 '사찰 화장터 초석 퇴적 농축 수집법'을 기억하는가?"

"기억하고말고요. 하지만 불교계와 개경 문벌들이 사찰의 영골탑과 화장터 주변의 흙을 '불가침의 성역'이라 주장하며 소유권을 제한하는 바람에 개경 인근에서만 겨우 소량을 채굴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선우는 서늘하게 웃었다.

"그 제한 규정은 '평시'의 법률이다. 지금 우리는 '전시'의 한복판에 서 있다. 남궁석의 목을 친 명분으로, 나는 황주와 평산 일대의 모든 사찰에 대규모 징발령을 내릴 것이다."

선우는 붓을 들어 지도 위의 특정 사찰들을 붉은 선으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 사찰들은 모두 개경 문벌들과 결탁하여 면세 혜택을 누리며 화장터 주변의 황화 질산염 노다지를 숨겨두고 있었다. 이들을 군기감의 군영지로 즉각 임시 귀속시킨다. 반발하는 승려들은 남궁석과 내통한 역당으로 다스릴 것이다."

한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렇다면…… 수송로 자체를 사찰 네트워크로 전환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사찰은 자체적인 곡물 창고와 마구간, 그리고 도로망을 갖춘 훌륭한 군수 보급소다. 불가의 자비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찢어발기고, 그들의 인프라를 군수 수송로로 강제 편입한다."

선우는 정량적 수치를 빠르게 계산해 나갔다.

"황주에서 서경까지의 경로에 위치한 대형 사찰 12곳을 간이 보급소로 지정한다. 각 사찰에서 대기 중인 승려들과 우마(牛馬)를 징발하여 릴레이 식으로 수송대를 교대시킨다. 이렇게 하면 수송대의 휴식 시간이 사라지고, 하루 이동 거리는 기존 20리에서 60리로 늘어난다."

"수송 효율이…… 200% 이상 증가하는군요."

한길은 소름이 돋는 듯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다. 선우의 머릿속은 인간의 애국심이나 종교적 경외감 따위가 아니라, 오직 철저한 행정적 효율성과 법리적 강제력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당장 법안을 기안하여 어사대 압인을 찍어라. 내일 아침부터 즉시 시행한다."

"알겠습니다. 소인, 어른의 명을 받들어 당장 야철군을 움직이겠습니다."

한길이 깊이 숙이고 막사를 나갔다.

선우는 홀로 남은 막사에서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의 뇌리에 또 다른 영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11화에서 역사 개변의 여파로 역풍을 견디던 중 감지했던, 인종이 서경의 정지상에게 한밤중에 도장을 찍어 준 밀지의 텍스트였다.

[황제 인종의 밀지: 서경 천도 및 독자적 연호(乾德) 사용을 가인(假認)함. 단, 개경 문벌의 반발을 무마할 명분을 서경 파벌이 제시할 것을 조건으로 함.]

'인종, 나약한 군주여.'

선우는 차가운 침묵 속에서 중얼거렸다. 왕권을 강화하고 싶으면서도 스스로 피를 묻히기는 두려워 밀지 따위나 남발하는 나약함이, 결국 이 거대한 전란을 불러온 것이다. 그 밀지는 조만간 서경파를 완전히 파멸시킬 가장 날카로운 덫이 될 것이었다.

***

사흘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철저히 숙쇄되고 정비된 3만의 토벌군은 마침내 서경 성문 앞 오 리 지점까지 직진하여 군영을 건설했다.

눈앞에 보이는 서경성은 거대한 장벽과 굳게 닫힌 성문으로 완강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성벽 위에는 묘청의 백색 깃발들이 어지럽게 펄럭였다.

"선우 어른! 군기감의 화포 부대가 배치를 완료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저 성문을 단숨에 부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한길이 흥분된 목소리로 고했다. 완벽한 군수 보급과 사찰 네트워크를 통한 빠른 진격 덕분에, 토벌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선우가 손을 들어 포격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였다.

"보, 보고드립니다! 개경 황궁에서 파견된 급보입니다!"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된 전령 한 명이 말에서 떨어지듯 굴러 내려와 선우의 발앞에 엎드렸다. 그의 품에서 꺼내진 가죽 주머니는 황실의 붉은 봉인으로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선우는 봉인을 뜯고 서신을 펼쳤다. 순간, 그의 눈앞에 붉은 영안의 경고음이 기괴한 파열음을 내며 번뜩였다.

[비상 경고: 개경 황궁 내 잔존한 묘청의 비밀 세작 및 내관 무리가 황제 인종에게 독이 든 약탕을 올리고 있음. 현재 인종의 생존 확률 35%.]

[역풍 경고: 황제 인종이 독살당할 경우, 황위 계승의 혼란으로 고려는 극심한 내전에 휩싸이며 북방 여진족의 전면 침공 시기가 5년 앞당겨짐.]

전령이 피 섞인 침을 뱉으며 간신히 소리쳤다.

"어사대 장령 선우 어른……! 황궁 내의 내관들과 백안(白衣)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상 전하의 약탕에 독을 탔사옵니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위독하시옵니다!"

황궁의 정변. 문 앞의 적을 두고 등 뒤에서 칼이 꽂힌 격이었다.

성벽 위에서 묘청의 군사들이 일제히 북을 울리며 조롱하듯 함성을 질렀다.

진격하여 서경을 칠 것인가, 아니면 군대를 돌려 개경의 황제를 구하러 회군할 것인가.

선우의 차가운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는 영안의 경고창을 응시했다. 그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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