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칠흑이었다.

인종의 도장이 찍힌 붉은 성지(聖旨)를 움켜쥐고 편전 문을 박차고 나온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단숨에 휘발했다. 머리 정수리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찌릿한 전기 충격 뒤에 찾아온 것은, 감각의 완전한 단절이었다.

"읍……!"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컥하며 뜨거운 비린내가 치밀었다. 선우는 문틀을 짚으려 손을 뻗었으나 허공을 휘저었을 뿐이다. 바닥이 뒤집히는 듯한 현기증과 함께 무릎이 꺾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호흡이 가빠졌다. 역풍(歷史回歸)의 대가였다. 고려의 사직을 뒤흔들 서경 천도 세력을 막기 위해 왕권을 강탈하듯 군권을 쥐어짜 낸 나비효과는, 그의 육신을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도련님! 정신 차리십시오!"

어둠 속에서 굳은살이 박인 투박하고 단단한 손이 선우의 어깨를 억척스럽게 부축했다. 한길의 목소리였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어사대 서리들과 내시들의 발소리가 이명처럼 고막을 찔렀다.

선우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악물며 한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닿는 거친 삼베의 감촉만이 그가 아직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음을 증명했다.

"성벽으로 간다."

"예? 하지만 지금 눈이……."

"상관없다. 부축해라. 내 발로 걷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성벽 아래의 군사들보다 개경의 귀족들이 먼저 내 목을 벨 것이다."

선우의 목소리는 시력을 잃은 자의 그것이라 믿기 힘들 만큼 차갑고 낮았다. 그는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냈다. 보이지 않는 눈을 부릅뜬 채, 오직 한길의 어깨에 실린 무게중심에 의지하여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

반나절 뒤, 개경 북문 성벽 위.

초여름의 습한 바람이 성벽의 여장을 세차게 때렸다. 성벽 아래 웅성거리는 군사들의 가쁜 숨소리와 철기들이 부딪치는 금속음이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선우는 북문 누각의 가장 높은 곳에 꽥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먼 지평선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전장을 내려다보는 냉철한 사령관의 형상이었으나, 실상은 오직 바람의 방향과 발밑의 진동으로만 전황을 가늠하는 고독한 맹인이었다.

그의 품에는 몇 장의 서류가 들어있었다.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었으나, 그 텍스트의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완벽히 각인되어 있었다.

하나는 민씨 가문의 상속 문서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어사대 압관인의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 명부였다. 음서제와 공음전을 조작해 가문의 자제들에게 관직과 면세를 세습하던 문벌의 추악한 줄기. 선우는 이 문서를 칼날 삼아 김부식을 협박했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개경의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유화하고 있던 가문 사병 팔백 명과 군량미 이천 석을 군기감 방어군에 고스란히 헌납했다. 법리의 약점을 쥐고 흔든 차도살인의 행정전이 거둔 첫 번째 수확이었다.

또 다른 서류는 한길이 군기감 지하에서 올렸던 초석 수급 보고서였다.

그동안 사찰의 화장터 흙에서 질산칼륨을 추출하는 '사찰 화장터 초석 퇴적 농축 수집법'은 불교계의 강력한 반발과 예부의 사찰 소유권 제한 규정에 묶여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개경의 유력 사찰들은 황실의 비호를 받으며 법적 특권을 누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우는 고려율 구례 중 '국난 시 공물 전용 및 사찰 징발조'의 자구적 맹점을 파고들었다. 예부의 관료들을 법률 오용 혐의로 탄핵하겠다 압박하는 동시에, 승록사(僧錄司)의 정점들을 가문의 비리와 엮어 사법적으로 고사시켰다.

결국 개경 인근 12개 사찰의 화장터 뒷마당은 합법적으로 파헤쳐졌다. 군기감의 연간 초석 생산량이 고작 300근에 머물던 한계를 깨부수고, 단 보름 만에 1,800근의 고순도 초석을 양산해 내는 기적을 달성한 것이다.

"나리, 준비가 끝났습니다."

한길이 선우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긴장감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청동 토법 구포(口砲) 다섯 문, 모두 북문 옹성 전면에 거치를 완료했습니다. 약실의 배합비는 나리가 명하신 대로 초석 칠십, 목탄 십오, 유황 십오의 비율을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선우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의 기술적 한계 내에서 화포를 만드는 것은 가시밭길이었다. 청동을 주조할 때 발생하는 기포와 균열을 막기 위해, 한길과 장인들은 황토와 숯가루를 7대 3의 비율로 섞어 거푸집을 만드는 토법 주조법을 사용했다. 포구의 두께는 2치로 얇게 하되, 폭발 압력이 집중되는 포미(砲尾)는 5치까지 두껍게 설계하여 폭발 사고의 위험을 정량적으로 제어했다.

현대의 만능주의로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진 철포가 아니었다. 수많은 고공(高工)들의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수십 번의 주조 실패를 거치며 정제된 고려 토착 기술의 결정체였다.

"한길아."

"예, 나리."

"지금부터 네가 내 눈이 되어라. 적들과의 거리를 정밀하게 읊어라."

"소인, 목숨을 걸고 그리하겠나이다."

한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천대받던 기술직 장인에 불과했던 자신이, 나라의 운명이 걸린 개경 성벽 위에서 화포의 조준을 맡아 역사의 전면에 섰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사대부들의 명분론과 경전 외우기 장난질이 아닌, 오직 쇠와 화약의 힘으로 천하를 움직이는 위대한 순간이 눈앞에 있었다.

그때, 성벽 아래에서 대지를 찢는 듯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두두두두!

개경 북쪽 벌판의 흙먼지를 뚫고, 서경의 깃발을 앞세운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봉장은 서경파의 핵심 정지상의 사촌인 정찬이었다. 그가 이끄는 3천 명의 정예 돌격기병들이 개경 북문을 단숨에 돌파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서경의 역도들이 다가옵니다! 거리 오백 보! 사백 오십 보!"

성벽 위의 수성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의 사대부들은 성루 아래에서 사색이 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유교적 명분과 송나라식 사대 사상은 밀려오는 철기(鐵騎)들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선우는 눈을 감은 채 암흑 속에서 집중했다.

바로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칠흑 같던 그의 시야 속에서, 붉은색 글자들이 유령처럼 번쩍이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의 형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물서사 영안'이 실명한 그의 망막 위에 전장의 거시적 흐름을 실시간 텍스트로 투사한 것이다.

[서경 돌격기병 3,000기: 북서쪽 구릉지 250보 지점 진입 예정. 지형적 병목 현상으로 밀집도 87%까지 상승.]

[청동 구포 1호기~5호기 사격 제원: 방위각 우측 3치, 고각 하향 2도 설정 시 살상 구역 일치율 94%.]

선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눈은 멀었으나, 역사의 기록을 지배하는 그의 영안은 그 어떤 눈보다 명확하게 적들의 파멸을 보고 있었다.

"한길아! 포신을 우측으로 세 치 돌려라! 포미를 들어 고각을 두 도 낮춘다!"

선우의 날카로운 명령이 고함 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예! 우측으로 세 치! 고각 이 도 낮춤!"

한길이 쇠지렛대를 쥐고 청동 구포의 포미를 두드렸다. 장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포신을 조절했다. 성벽 아래의 기병들은 이제 삼백 보 안쪽까지 육박해 들어왔다. 말들의 투구에 박힌 쇠뿔이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백 오십 보! 적 기병들이 구릉지 병목으로 진입했습니다!" 한길이 소리쳤다.

영안의 붉은 텍스트가 눈앞에서 미친 듯이 점멸했다.

[적 선봉 정찬, 가속을 위해 대열을 최대로 밀집함. 지금 포격 시 충격파로 인한 연쇄 도사(倒死) 발생 확율 99%.]

선우가 숨을 들이쉬며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감각 속에서도, 검은 공포 대신 차가운 확신이 뇌리를 지배했다.

"방포(放砲)!"

손을 아래로 거칠게 내리쳤다.

"방포하라!" 한길이 소리 높여 외치며 화선을 포미의 도화선에 갖다 댔다.

치이이익!

짧은 도화선이 타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 직후.

콰콰콰콰쾡!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개경 북문을 통째로 흔들었다. 성벽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 전율했고, 엄청난 폭풍과 함께 매캐한 유황 연기가 성루를 덮쳤다.

초석과 목탄의 비율을 철저히 개량한 토법 탄환들이 포구를 빠져나가 허공을 갈랐다. 탄환 내부에는 무수한 철편과 황토로 감싼 백린 가루가 가득 차 있었다.

쿠우웅! 쾅! 쾅! 쾅!

서경 기병 3천 명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던 구릉지 정중앙에 탄환들이 정확히 내리꽂혔다.

폭발은 참혹했다. 기존의 고려 화약이 단순히 소리와 연기만 내는 수준이었다면, 선우가 개량한 화약은 강력한 폭발력과 함께 백린의 지옥 불을 뿜어냈다. 사방으로 비산한 철편이 말의 목과 병사들의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고, 꺼지지 않는 백색 불꽃이 병사들의 온몸에 달라붙어 타들어 갔다.

"으아아악!"

"괴물이다! 번개다!"

단 한 번의 포격으로 선봉 수백 명이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이 났고, 뒤따르던 말들이 폭음에 놀라 제자리에서 날뛰며 서로를 짓밟았다. 구릉지는 순식간에 피와 불로 물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성루 아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부식의 턱이 덜덜 떨렸다. 유교적 경전 어디에도 이런 무지막지한 힘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사대주의 귀족들은 넋이 나간 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성벽 위에 꼿꽥 서 있는 서자, 민선우를 경외와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압도적인 지식과 철저한 행정 통제력이 만들어 낸 과학의 승리였다.

"적들이…… 적들이 퇴각합니다! 선봉장 정찬은 폭사에 휘말려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한길이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군사들의 함성이 북문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선우는 미소 짓지 않았다. 그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며, 검게 바랬던 시야 끝에서부터 흐릿한 빛줄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역풍의 일시적 실명이 걷히고 있는 것이었다.

뿌연 연기 너머로 지평선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패퇴하여 도망치는 서경군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선우의 미간이 굳어졌다.

퇴각하는 서경군의 거대한 대열 뒤편, 벌판 한가운데에서 기이한 백색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화약의 폭발이 아니었다. 허공을 향해 길게 뻗어 나가는 백색 연기가 기묘한 만다라 문양을 그리며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동시에, 땅을 울리는 거대한 바퀴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황소가 끄는 대형 목조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불교의 법차(法車)였다. 황금색 법륜이 장식된 3층 높이의 법차 위에는, 백색 가사를 입고 한 손에는 구리 지팡이를 든 사내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묘청이었다.

그가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들자, 법차 사방에 장치된 화공 솥에서 다시 한번 눈부신 백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멀리서 보기에는 마치 부처의 후광이 강림한 듯한 이적(異蹟)이었다.

"하늘이 대위국을 수호하신다! 개경의 역당들에게 천벌을 내려라!"

법차에서 흘러나오는 묘청의 웅장한 목소리가 광풍을 타고 개경 성벽까지 도달했다. 패닉에 빠져 도망치던 서경의 광신적인 병사들이, 그 백색 불꽃을 보는 순간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다시 무기를 쥐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선우의 눈앞에 다시 한번 영안의 붉은 텍스트가 번뜩였다.

[묘청의 대형 법차: 내부 주축에 다량의 백린 및 질산바륨을 이용한 화공 선동 장치 내장. 아군 사기 200% 고취.]

[선택 훅: 즉시 2차 포격을 가해 법차를 파괴할 것인가, 혹은 적의 종교적 이적 사술을 법리적으로 역이용하여 개경 내 배후 세력까지 일망타진할 것인가?]

선우는 붉게 빛나는 질문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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