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리…… 봉화가 네 개입니다! 서경의 대위국 본진, 3만 보병 선봉대가 이미 개경 북방 십 리 구역까지 도달했다는 신호입니다!"
조원의 절규 섞인 외침이 매캐한 화약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여좌문 옹성벽 위를 사정없이 때렸다.
삼각산 정상에서 솟구쳐 오른 네 줄기의 붉은 불길은 칠흑 같은 밤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넘실거렸다. 그것은 단순한 경보가 아니었다. 도성의 목덜미를 겨눈 서경 반군의 서슬 푸른 칼날이자, 개경의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임을 알리는 사신의 전언이었다. 옹성 아래에서 시신을 치우고 화약 상자를 나르던 사찰 노비들과 야철장 인부들이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그들의 동공에 붉은 봉화의 빛이 반사되어 잘게 흔들렸다. 3만이라는 숫자가 주는 압도적인 공포가 순식간에 군기감 전체를 싸늘한 침묵으로 가라앉혔다.
그 침묵을 깨트린 것은 선우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거친 기침 소리였다.
"커흑!"
가슴뼈 안쪽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덮쳤다. 심장이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가 한순간에 쪼그라드는 것 같은 감각에 선우는 비틀거리며 차가운 무쇠 포신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놋쇠 표면을 긁었다.
'역풍(歷史回歸)이로군.'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묘청의 기습 부대를 화포로 전멸시키고 개경 함락의 역사를 강제로 뒤튼 대가였다. 목구멍으로 뜨겁고 비린 액체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선우는 입을 틀어막았으나, 손가락 틈새로 붉디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려 흙바닥을 적셨다. 검은 화약 가루 위에 떨어진 피는 기괴할 정도로 선명하게 빛났다.
눈앞이 흐려지며 허공에 오직 선우의 눈에만 보이는 반투명한 청색 글자들이 어지럽게 점멸했다.
[역사 궤적 인위적 수정 감지: 서경 기습군 300명 전멸] [인과율 복원력(역풍) 발동: 시각 보존력 일시 감퇴, 심폐 기능 15% 일시 정지] [경고: 고려사 연표 변동으로 인해 북방 여진 세력의 통합 및 대장정 시기가 약 6개월 앞당겨집니다.]
"도련님! 피를……!"
수연이 단번에 달려와 선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평소의 차분함을 잃어버린 그녀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그녀의 손가락끝이 선우의 피 묻은 도포 자락을 움켜쥐며 덜덜 떨렸다.
"나으리! 이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몸이 어찌 되신 겁니까!"
한길 역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가왔다. 그의 거친 손이 선우의 등을 세차게 쓸어내렸지만, 선우의 이성은 그 고통 속에서도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선우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수연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비키거라."
"도련님, 지금 고집을 피우실 때가 아닙니다! 속히 의원을 불러와 지혈을—"
"입 닫아라, 수연."
선우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배자의 명령이 담겨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입술을 소매 깃으로 훔쳐내며, 그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한길을 응시했다. 은혜나 감정 따위는 배제된, 오직 쓸모와 배치만을 계산하는 도구주의자의 눈빛이었다.
"지금 도성 한복판에서 의원을 부르고 법석을 떨면, 저 아래에 있는 군사들이 무어라 생각하겠느냐. 대장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으니 이제 다 죽었다며 무기를 버리고 달아날 터다. 한길, 너는 내 몸뚱이가 어찌 되든 상관할 바 없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다."
"……말씀하십시오, 나으리."
한길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선우의 서늘한 이성이 뿜어내는 공포감이 그의 걱정을 찍어눌렀다.
"화포 다섯 문을 전부 해체하여 개경 북문인 자하문(紫霞門) 후방 언덕으로 즉시 이동시켜라. 사찰에서 거두어들인 초석으로 만든 화약은 모두 포차에 실어라. 단 한 톨의 가루도 이곳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선우는 품 안에서 핏자국이 점점이 박힌 가죽 주머니를 꺼내 한길의 가슴팍에 툭 던졌다. 한길이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한 달 전에 가져왔던 '사찰 화장터 초석 퇴적 농축 수집법'의 법적 소유권 칙령 초안이다. 개경 문벌들과 승려 세력이 저희의 밥그릇을 빼앗겼다며 소송을 준비하던 그 법적 맹점 말이다."
한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제가 이미 예부와 형부에 구례(舊例)를 들어 '군수물자 비상 징발령'과 '소유권 일시 귀속법'을 접수해 두었다. 이 서류가 통과되는 순간, 고려 전역의 사찰 화장터와 가축 배설물에서 나오는 초석은 더 이상 부처의 소유가 아니다. 오직 군기감, 즉 나와 네가 관리하는 야철장만이 독점할 수 있는 국가의 사유 재산이 된다. 놈들이 이 난리통에서 살아남아 목숨을 보존하고 싶다면, 향후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화약을 사 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포진해라."
"나으리…… 이 와중에도 그런 법리적 대책을 다 세워두셨단 말입니까?"
한길의 목소리에 경외를 넘어선 소름 끼치는 공포가 깃들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생명이 깎여 나가는 순간에도, 가문의 이권과 법령의 맹점을 조율해 적들의 숨통을 쥘 덫을 놓고 있었다.
선우는 시선을 돌려 수연을 보았다. 그의 숨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으나 지시만큼은 명확했다.
"수연, 너는 지금 즉시 어사대로 가라."
"어사대 말씀이십니까? 지금쯤이면 도성 방어선을 버리고 남경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느라 아수라장일 텐데요."
"그렇기에 가야 한다. 장령 소정이 가지고 있는 민씨 가문의 상속 문서를 확보해라. 그 문서의 어사대 압관인 밑에 숨겨진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의 흔적을 내가 영안으로 확인했다. 어사대 서리들과 개경 귀족들이 뒷거래로 가주의 상속을 조작하고 면세 혜택을 나눈 명부다. 그것을 들이밀면, 소정은 물론이고 김부식의 측근들조차 도성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내 발밑에 기어 다녀야 할 것이다."
수연은 선우의 눈에 서린 잔혹한 확신을 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련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
개경의 황실 편전은 거대한 도살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과 비명이 교차하고 있었다.
"폐하! 서경의 역적들이 3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북방 십 리까지 도달했습니다! 도성은 성벽이 낡고 군사가 부족하니, 속히 남쪽으로 피하셔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사옵니다!"
문벌귀족의 영수이자 수당(守舊)의 우두머리인 김부식의 목소리가 편전 대들보를 흔들었다. 그의 관복 소매는 이미 피난 짐을 꾸리느라 구겨져 있었고, 그의 뒤에 선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자신들의 가문과 노비, 그리고 공음전을 지키기 위해 개경을 버리고 남경(서울)으로 도망치겠다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남경으로 피하라니…… 내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진 이 개경을 버리고 도망치란 말이냐?"
옥좌에 앉은 인종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손을 떨었다. 왕권 강화의 갈망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눈앞의 파멸에 대한 공포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성입니다! 서경의 철기병들이 들이닥치면 폐하의 어가마저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어서 결단을 내리소서!"
김부식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인종을 압박했다.
그때, 편전의 무거운 나무 문이 거칠게 열렸다.
쿵!
"도망치는 자는 고려 율법에 따라 군령위반으로 참형에 처해야 하거늘, 법과 사대를 논하는 문벌의 영수가 가장 먼저 도망칠 궁리를 하십니까."
모든 시선이 문가로 쏠렸다.
민선우였다. 그의 도포 자락에는 여전히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고,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으나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무뢰한 것! 서출 따위가 어찌 감히 황제께서 계신 엄숙한 편전에 무기도 없이 난입한단 말이냐! 당장 저놈을 끌어내라!"
김부식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어사대 장령 소정 역시 선우를 보며 이빨을 갈았다.
선우는 김부식의 고함을 완전히 무시한 채, 한 걸음씩 인종이 있는 옥좌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바닥에 묻은 흙먼지가 조금씩 흩날렸다. 선우의 뇌리에 영안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흘러들어왔다. 인종이 걸치고 있는 황룡포의 소매 끝동,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어필(御筆) 상자 위에 푸른 광채가 서렸다.
[사물: 고려 태조 성헌대왕의 훈요십조 사본 및 황룡포] [숨겨진 율기: 제1조 불교 숭상의 법적 한계 및 제6조 서경 천도 주술의 전제 조건 - '지덕(地德)이 쇠하면 오히려 화가 미친다'는 율칙] [분석: 태조 왕건은 서경을 중시하되, 풍수설을 빙자하여 국가의 법통을 흔드는 사교(邪敎) 세력을 징벌하라 명시함.]
선우는 인종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황제를 향한 예의 따위는 없었다. 오직 철저한 법리와 이해타산만을 계산하는 행정가의 칼날만이 존재했다.
"폐하. 조상 태조 대왕께서 남기신 훈요십조를 진정 잊으셨습니까? 서경을 중히 여기라 하신 것은 그곳이 길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북방의 군사적 안보를 책임지는 방패로 삼으라 하신 뜻이었습니다. 묘청 일파는 사악한 술수로 풍수를 논하며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나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천도는 태조 대왕의 유훈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역모입니다. 지금 도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하신다면, 폐하께서는 스스로 고려의 정통성을 포기하는 낙인이 찍힐 것입니다."
"하, 하지만…… 3만 대군을 막을 군사가 없지 않으냐! 개경의 방어군은 고작 수천에 불과하거늘, 어찌 저들을 막는단 말이냐!"
인종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선우는 품 안에서 수연이 어사대에서 빼앗아 온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김부식의 발밑으로 툭 던졌다. 먼지 쌓인 바닥에 가죽 명부가 굴러떨어졌다.
"김 대감. 그리고 어사대 장령 소정 대감. 그 문서에 찍힌 낙인을 똑똑히 보십시오."
김부식과 소정의 시선이 동시에 바닥으로 향했다. 문서를 확인한 소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것은……."
"민씨 가문의 상속 문서 밑에 숨겨진, 어사대 압관인의 불법 사승(師承) 카르텔 명부입니다. 대감들께서 음서제와 공음전을 조작하여 가문의 자제들에게 무단으로 관직을 세습하고, 면세 혜택을 나누어 가진 명백한 증좌이지요. 전란을 틈타 폐하를 버리고 도망치신다면, 저는 이 문서를 즉시 도성 전체와 남경의 관아에 벽서로 붙일 것입니다. 역적들의 칼에 죽기 전에, 고려의 온 백성들이 대감들의 목을 먼저 매달 것입니다. 그래도 도망치시겠습니까?"
김부식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지적 권위와 율법적 명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선우의 잔혹한 협박 앞에 단 한 마디의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주먹만 움켜쥐었다.
선우는 다시 인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가 편전 안을 차갑게 울렸다.
"폐하. 저에게 도성 방위의 전권을 위임하는 밀지(성지)를 내리소서. 훈요십조 제1조에 명시된 '사직의 안위를 해치는 자는 왕법으로 다스린다'는 구례를 적용하여, 서경의 난신적자들을 개경 성벽 아래에 묻어버리겠나이다. 황제의 명을 내리소서."
인종은 선우를 바라보았다. 피를 흘리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가문과 조정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서자. 그 기괴하고도 압도적인 지배력 앞에, 인종은 마치 구원의 동아줄을 잡듯 떨리는 손으로 황필을 쥐었다.
사대주의 귀족들은 침묵했고, 왕은 굴복했다.
사각사각, 종이 위를 구르는 붓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붉은 옥새가 밀지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쿵.
"내…… 그대에게 개경 방위의 군권을 위임하노라."
선우는 옥새가 찍힌 밀지를 거칠게 낚아챘다.
***
편전의 커다란 문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찌릿한 전기 충격이 다시 한번 가해졌다.
"윽……!"
선우는 문틀을 잡고 비틀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며, 입안 가득 다시 한번 비린 피가 고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시야 사방에서부터 검은 장막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인종의 어전과 김부식의 일그러진 얼굴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잠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암전이었다.
'일시적 실명인가…….'
역풍의 대가는 잔혹했다. 눈앞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으나, 멀리 북방에서 들려오는 서경 군대의 북소리와 군마의 거친 숨소리만큼은 그의 귓가를 찢어발기듯 생생하게 들려왔다. 선우는 어둠 속에서 밀지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