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조차 빛을 잃은 음산한 야색(夜色)이 무림맹 본산의 거대한 성벽을 장막처럼 뒤덮고 있다. 천지를 가로막은 듯 우뚝 솟은 석벽은 이 세상의 도리를 비웃는 철옹성이요, 일족의 피로 쌓아 올린 가증스러운 상아탑이다. 검은 도포를 두르고 어둠 속에 몸을 묻은 당신의 이마 위로 한 줄기 서늘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지필묵의 청향(淸香)을 흩날리며 아이들의 맑은 낭송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던 변방 서당의 고독한 훈장. 그 평온한 허울은 이제 한 꺼풀 벗겨져 나간 지 오래다. 당신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오직 천외천(天外天)의 검패가 해금되며 깨어난, 뼈를 깎는 복수의 열망뿐이다. 낮에 용봉객잔에서 언뜻 보았던 원수들의 일그러진 미소가,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혈화(血花)의 기억을 사정없이 들쑤셔 깨운다.
성벽 위로는 횃불의 붉은 이빨들이 어지러이 춤을 추고 있다. 일정한 보폭으로 성벽을 메운 순라군들의 발소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단하여, 마치 바위를 누르는 철추의 울림 같다. 삼엄하기 이를 데 없는 철통(鐵桶)의 경비다. 바람에 쓸리는 낙엽 소리 하나, 스쳐 지나가는 들고양이의 그림자 하나에도 저 삼엄한 도부수(刀斧手)들의 칼날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릴 터였다. 실수는 곧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고립무원을 의미하며, 만 명의 무사가 몰려드는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당신은 난간에 몸을 밀착한 채 천천히 숨을 고른다. 어둠의 심연 속에서 차갑게 침전된 내력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가만히 백회혈을 타고 내려와 손끝으로 모여든다. 마치 고요한 연못에 가라앉은 낙화(落花)처럼 극도로 제어된 기운이다.
눈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다.
성벽의 모퉁이, 무림맹의 온갖 은밀한 치부와 더러운 오수가 밤안개 속을 뚫고 흘러나오는 수로가 보인다. 그 축축하고 비린 어둠의 통로는 치욕스러우나 맹주의 목줄기를 가장 가까이서 겨눌 수 있는 비수가 되리라.
혹은, 저 높은 본전 누각 높은 곳에 매달려 밤하늘의 달과 대치하고 있는 거대한 대종(大鐘)으로 시선이 향한다. 온 무림을 경악시키고 원수들의 심담을 서늘하게 고할 기선제압의 격돌. 검기를 실어 천지를 진동시킬 일격을 가해 당당히 정문을 부수고 들어설 장엄한 투로다.
바람이 멈추고, 당신의 손끝이 마침내 검자루를 향해 서서히 움직인다.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발걸음이 마침내 어느 한곳을 향해 내딛어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