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로(峽路)를 메운 것은 가을의 쓸쓸한 죽음이다.
마른 잎새들이 흙먼지와 뒤엉켜 차가운 대지 위를 구르고, 산허리를 감싼 안개는 무겁게 내려앉아 풍경의 경계를 흐린다. 당신의 걸음 뒤로 아득히 멀어진 서당의 처마와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환청처럼 귀끝을 스치고 지나갈 때, 길목의 한가운데를 가로막아 선 인영(人影) 하나가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듯 모습을 드러낸다.
백색 도포, 그리고 허리춤에 매달린 투명한 안개 같은 장검.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흔들 때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한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기품과 눈동자 속에 담긴 깊은 번민. 그는 무림맹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매서운 집법자이자, 한때 당신과 피를 나누며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했던 의형제, ‘추풍검(秋風劍)’ 맹서우다.
"형님."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우물가에 흐르는 물소리처럼 처연하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그의 손끝에는 미동조차 없다.
"결국, 가시는구려. 기어이 그 피비린내 나는 길을 걷기로 작정하셨소."
금란지계(金蘭之計)의 굳건했던 언약이 마른 낙엽처럼 무참히 밟혀 바스러진다. 맹주 일족을 향한 당신의 검날이 세상을 흔드는 순간, 그는 자신이 믿는 천하의 평화를 위해 옛 의형제의 심장을 겨눠야만 하는 모순에 직면해 있다. 과거 전 가문이 몰살당했던 가혹한 멸문의 설태(雪胎)를 알지 못하는 그는, 다만 지금의 안정을 깨뜨리려는 당신의 걸음을 개인의 원한에서 비롯된 사사로운 폭력으로 치부할 뿐이다.
"이곳을 지나려거든, 먼저 이 아우의 목을 베고 가셔야 할 것이오."
서우의 검이 천천히 칼집을 빠져나온다. 검신이 울리는 마찰음이 가을 숲의 침묵을 찢는다. 그의 검법은 흐르는 가을 바람과 같아, 눈에 보이지 않으나 끝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꺾는 매서움이 있다. 그가 검을 바로잡자 사방의 기류가 휘감기며, 떨어지는 낙엽조차 공중에서 회오리친다.
당신은 그를 묵묵히 응시한다. 마음의 심연에서 차가운 파문이 일어난다. 강호를 지배했던 무신이라는 이름도, 이제는 흘러간 강물 위에 흔들리는 달그림자일 뿐. 복수의 가시밭길을 가기 위해 가장 아끼던 인연마저 손수 꺾어내야 하는 외로움이 당신의 어깨 위에 납덩이처럼 얹힌다.
당신의 마른 손이 마침내 수묵색 검자루를 잡는다.
달빛을 가두어 둔 듯 희끄무레한 검신이 허공으로 드러나자, 사방을 어지럽히던 거친 바람이 거짓말처럼 고요히 가라앉는다. 한수고월(寒水孤月). 차가운 물 한가운데에 고고히 가라앉은 외로운 달의 기운이 당신의 검 끝에서 아스라이 잉태된다.
"서우야."
당신의 나직한 음성이 낙엽 구르는 소리 틈으로 스며든다.
"너는 끝내 위선 뒤에 숨은 어둠을 보지 못하는구나."
"내게는 이 질서가 곧 의(義)요, 지켜야 할 강호요!"
목숨을 던져서라도 당신의 길을 막아서겠다는 옛 아우의 결연한 눈빛에는 슬픈 고집이 단단히 굳어 있다. 그 눈먼 충의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힘뿐이다. 마른 바람이 두 사람의 도포 자락을 세세히 흔들며, 칼날이 부딪치기 직전의 극명한 정적이 온 산을 휘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