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끝에 닿는 석판의 촉감은 차디차다.

품속에 갈무리한 검은 먹빛의 서판(書板)에는 천하의 고혈을 짜내어 올린 탐욕의 제단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무림을 정화하겠다던 백도의 영수, 무림맹주 일가가 어둠 속에서 마교의 잔당들과 결탁하여 무림 지배를 견고히 하려 한 밀약. 정(正)과 사(邪)가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한 잔의 피비린내 나는 술로 맹세를 맺었으니, 백성들의 피눈물은 창해(滄海)를 이루고 무인들의 넋은 구천(九泉)을 헤맨다. 실로 양두구육(羊頭狗肉)이자 표리부동(表裏不同)의 극치라 할 만하다.

당신은 서당의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맹자의 인의(仁義)를 떠올린다. 그 순박한 눈망울들이 살아갈 세상이 이토록 추악한 진흙탕이었던가. 가슴 깊은 곳, 수십 년의 은거로 흐려졌던 검심(劍心)이 밤바람을 타고 가늘게 공명한다. 슬픔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이내 고독한 결의로 가라앉는다.

눈앞에 우뚝 솟은 만불사(萬佛寺)의 지붕들이 짙은 밤안개 속에 은밀히 은신해 있다. 백 년 묵은 소나무 조각 사이사이에 숨겨진 백색의 기운과 사악한 마기(魔氣)가 뒤엉켜 허공으로 피어오른다. 소나무 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는 가문이 몰살당하던 날 밤의 비명 같기도 하고, 홀로 살아남은 무인의 쓸쓸한 비가(悲歌) 같기도 하여 가슴을 저미게 한다.

"만물이 공(空)하거늘, 인간의 탐욕은 머물 곳을 모르는구나."

낮은 읊조림과 함께 당신은 검자루에 조용히 손을 얹는다. 잃어버렸던 천외천의 검패가 용틀임하며 뿜어내는 진기는 가슴속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이루고, 이내 온몸의 혈도를 거쳐 푸른 칼날 위에 서리처럼 엉겨 붙는다. 칼끝이 가리키는 허공으로 차가운 달빛이 미끄러지듯 스며들어 일순 밤하늘에 한 줄기 은하수를 그려낸다.

밀사들이 회합할 시간은 바야흐로 지금이며, 만불사 깊은 곳에는 무림맹주의 아들이자 차기 후계자가 삼엄한 호위를 대동한 채 움직이고 있다.

원수를 갚고 이 음모의 뿌리를 뽑기 위해, 당신의 검은 이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당신은 서판을 품에 깊이 밀어 넣으며 만불사의 두 갈래 이정표 앞에서 고독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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