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무림맹의 공터는 일순간 시간이 멈춘 듯 고요에 잠깁니다. 짓물러 터진 욕망의 잔해 속에서, 맹주는 비열하게 웃으며 당신의 어린 제자들의 목에 차가운 비수를 대고 있습니다. 단전을 깨뜨리고 무릎을 꿇으라 종용하는 그 비열한 음성에, 천하의 군웅들은 침묵으로 분노를 삭일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눈동자에는 분노 대신, 서당의 뜰녘에서 바라보았던 푸른 달빛만이 고요히 차오릅니다.
허공을 가르는 것은 분노가 아닌 청량한 바람이었습니다. 당신이 손끝을 가볍게 튕기자, 검 끝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이 흡사 봄날의 낙화(落花)처럼 아스라하게 흩어집니다. 춘풍이 버들가지를 스치듯 부드럽고도 가차 없는 무형검의 실타래가 제자들을 결박하던 자들의 단전만을 정확히 관통합니다. 피 한 방울 아이들에게 튀기지 않은,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운 신형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당신의 도포 자락 뒤로 숨어들자, 당신은 비로소 무림맹주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함을 깨뜨리고 바른 길을 드러내는 것이 무(武)의 본질이거늘, 너는 일족의 영달을 위해 강호를 핏빛 아수라로 만들었다.”
당신의 낭랑한 음성이 대전에 울려 퍼집니다. 이윽고 당신의 소맷자락에서 흩날린 수십 장의 밀서와 혈서들이 군웅의 머리 위로 낙엽처럼 떨어집니다. 그것은 맹주가 외세와 결탁하여 죄 없는 가문들을 멸문시키고 강호를 찬탈하려 했던 명백한 증좌들이었습니다. 진실을 목도한 군웅들의 동요는 들불처럼 번져가고, 가식의 가면이 벗겨진 맹주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당신에게 달려듭니다.
그의 검세가 탁하고 어두운 흙탕물 같다면, 당신의 검은 산정(山頂)에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이자 밤하늘을 수놓는 소담한 명월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호흡. 당신의 백색 검광이 허공에 반원 모양의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갑니다. 그것은 미련도, 애증도 남기지 않은 정종(正宗)의 검세였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함께 맹주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의 육신은 더러운 죄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무겁게 쓰러집니다. 마침내 가문을 몰살했던 원흉의 숨통이 끊어지고 원한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입니다.
비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청명한 햇살이 대전을 비춥니다. 피비린내 가득한 마당에서, 당신은 손에 쥔 검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복수의 끝은 성취감 대신 오랜 갈증이 해소된 뒤의 쓸쓸함을 남길 뿐입니다.
그때, 군웅들의 앞에서 장로 한 명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윽고 수백, 수천 명의 무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무릎을 꿇으며 대지가 진동합니다.
“무림의 대의를 구하고 정종의 기틀을 바로 세우신 검신이시여! 만장일치로 당신을 새로운 무림맹주로 모시고자 하오니, 천하를 굽어살펴 주소서!”
산천을 뒤흔드는 추대의 함성 속에서 제자들이 당신의 소매를 꼭 붙잡습니다. 당신은 문득 멀리 떨어진 변방의 서당,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던 그 평화로운 마당을 떠올립니다. 고독한 검사의 길을 걸어온 당신의 어깨 위에, 이제는 천하의 무게가 얹어지려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