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선혈이 대지 위를 적시고, 질기던 원한의 사슬이 마침내 끊어졌을 때, 손에 쥐어진 천외천(天外天)의 검은 비로소 무거워집니다. 대전 마당을 메우던 비명도, 적의 단말마도 전설처럼 흩어진 자리에는 오직 쓸쓸한 가을바람만이 불어와 무인들의 고독한 일생을 위로하듯 핏자국 위로 낙엽을 쓸어갈 뿐입니다.
성벽마저 무너뜨린 파천의 검력도 결국 허망한 연기요, 명예란 아침 이슬 아래 스러지는 환영에 불과함을 당신은 압니다. 가문을 도륙했던 원수들의 피로 씻어낸 검날을 든 채, 당신은 무림맹의 중심에 자리한 깊고 푸른 연못가에 멈춰 섭니다. 평생을 함께하며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던 검날 위로, 무심한 달빛이 은빛 잔물결처럼 부서집니다.
풍화설월(風花雪月)의 무상함을 깨달은 당신은 집착과 살의가 깃든 병기를 천천히 손에서 놓아버립니다.
*풍...*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는 물소리는 가벼웠으나, 수면 아래로 향하는 무게는 가늠할 수 없이 깊습니다. 가라앉는 검 끝을 따라 달빛의 파문이 둥글게 퍼져나가며 마침내 검의 일생을 고요히 삼켜버립니다. 천하를 오만하게 굽어보던 천외천의 검패는 그렇게 차가운 진흙 속으로 영원히 침묵합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아득한 남녘의 외딴 산골마을에 다시 따스한 매화 향기가 흩날리기 시작합니다. 살구꽃이 눈송이처럼 날려 서당의 낮은 기와지붕을 하얗게 덮는 어느 봄날의 오후, 유장하고 소박한 글소리가 담장 너머로 흘러나옵니다.
“왈약계고(曰若稽古) 하옵시고, 제요(帝堯)를 하시니…”
한쪽 소맷자락을 힘없이 떨군 채, 굳어버린 다른 한 손으로 낡은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기는 늙은 훈장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강호를 진동시키던 천하무인의 위압적인 신형은 사라지고, 오직 구부정한 어깨와 세월을 이겨낸 눈빛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소맷자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깊은 흉터는 지난날의 혈로(血路)를 증명하지만, 그 상처 위로 쏟아지는 봄볕은 눈부시게 따스할 뿐입니다.
훈장의 낭랑하면서도 묵직한 가락을 따라, 서당 가득 둘러앉은 아이들의 입술이 옹골지게 움직입니다. 흔들리는 하얀 콧수염과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이 마주칠 때마다, 차가웠던 은거검신의 가슴 속에 아주 작고 따스한 온기가 은은하게 번져갑니다.
당신은 책장을 넘기다 문득 창밖 먼 산을 바라봅니다. 은거의 세월 동안 마음을 옥죄던 한(恨)도, 밤마다 피어오르던 붉은 악몽도 이제는 먼지처럼 바래어 사라졌습니다.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는 더 이상 피비린내도, 부서진 강호의 은원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직 대지를 깨우는 흙내음과 아이들의 숨결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검을 쥐었던 손은 이제 세상을 향한 증오대신 아이들의 가슴에 새겨질 한 자의 묵향을 쥐고 있습니다. 끝없는 어둠 속을 헤매던 무사(武士)의 긴 여정은, 비로소 가닿은 작은 서당의 따뜻한 봄날 안에서 소리 없이 완성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