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적막이 지배하던 무림맹의 본산은 이제 비명조차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도수장(屠獸場)으로 변해 있습니다. 붉은 효수(梟首)의 밤, 당신의 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맹주 일족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대리석 바닥을 검붉게 물들입니다. 일찍이 세상을 정화하려던 천외천(天外天)의 검선(劍仙)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우뚝 선 것은 오직 피에 굶주린 한 자루의 마검뿐입니다.

품속에서 꺼낸 혈음공(血陰功)의 주박은 이미 당신의 기경팔맥을 완전히 잠식했습니다. 가슴 속 골 깊은 원한을 먹고 자란 마기(魔氣)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혈관 속에서 검은 독충처럼 꿈틀거리며 날뜁니다. 복수의 대상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때마다, 당신이 느끼는 것은 쾌감이 아닌 고요하고 지독한 갈증입니다. 더 많은 피를, 더 깊은 절망을 탐하는 저주받은 갈망이 영혼의 심처에서 소용돌이칩니다.

"이... 수라(修羅) 같은 놈..."

마지막 남은 맹주의 혈육이 목을 부여잡은 채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합니다. 그의 눈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닙니다. 두 눈은 초점을 잃은 핏빛 나락이요,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류는 차가운 밤하늘의 달빛마저 검게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마치 비틀린 검은 달이 조각나 흐르는 듯한 묵색(墨色)의 검풍이 대기를 가르고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갑니다. 한때 가을에 내리는 서리처럼 맑고 서늘했던 당신의 초식은, 이제 생명을 사르는 아비지옥의 불꽃이 되어 사방을 태울 뿐입니다.

마침내 오랜 염원이었던 멸문(滅門)의 한을 풀었으나, 가슴속에는 승리자로서의 희열도, 남겨진 자의 안도감도 없습니다. 오직 끝이 없는 허무와 빙하처럼 차가운 마성(魔性)만이 전신을 지배할 뿐입니다.

문득, 머릿속에서 아련하게 울리던 서당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갑니다. 맹자(孟子)의 구절을 더듬더듬 외우던 아이의 목소리, 이른 아침 마당을 쓸던 서늘하고 맑은 바람 소리. 그러나 그 따뜻했던 인연의 기억들은 한 방울의 먹물이 물에 번지듯 검붉은 마기에 뒤덮여 흔적도 없이 사그라집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피안의 저편으로 가버린 낙원. 이제 당신의 마음이 기억하는 것은 오직 살육의 쓰라린 감각과 피비린내 나는 검의 울림뿐입니다.

당신은 검을 고쳐 잡습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강호의 산하를 굽어보는 당신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집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은거검신 백결은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피의 비를 뿌려 천하를 도탄에 빠뜨릴 새로운 절대마두(絕對魔頭)만이 그 자리에 서서, 다가올 참혹한 강호의 피바람을 예고하며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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