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가을 아침 바람이 공방 문틈을 파고들어 낙엽 냄새를 실어 나릅니다. 당신은 아직 가시지 않은 어제의 열기와 피로를 털어내려 얇은 카디건 깃을 여밉니다. "더는 찾아오지 마." 매몰차게 던져진 당신의 목소리가 텅 빈 공방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는 것만 같습니다. 그를 내쫓듯 밀어내고 돌아섰던 손바닥에는 아직도 차가운 문고리의 감촉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기척 없는 골목길을 향해 습관적으로 시선을 던지다, 당신의 발걸음이 마당 한구석 낡은 빨간 우편함 앞에서 멈춰 섭니다. 우편함의 좁은 틈새로 차가운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하얀 종이 모서리가 위태롭게 삐져나와 있습니다.
손끝이 차갑게 굳어갑니다. 당신은 아주 천천히, 부서지기 쉬운 낙엽을 줍듯 손가락을 뻗어 그것을 꺼냅니다. 봉투도 없이 두 번 반듯하게 접힌 종이. 뒷면에 적힌 '...에게'라는 글자를 본 순간, 가슴 한구석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그것은 지후의 글씨입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 모퉁이에 정갈하고 반듯한 글씨로 필기를 하던 그의 필체는 간데없고, 종이 위에는 심하게 떨리며 비뚤어진 글씨들이 위태롭게 늘어서 있습니다. 사고로 다쳤던 손목의 상처 때문인지, 혹은 마음의 진동 때문인지,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흔적 위로 잉크가 옅게 번진 자리가 보입니다. 당신은 마른침을 삼키며, 차마 펼치지 못하고 종이의 접힌 선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립니다. 사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고요한 정원 실루엣 사이로 안개처럼 퍼져나갑니다.
조심스레 접힌 면을 펼치자, 거칠게 흔들리는 문장들이 당신의 시야를 메우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네가 겨우 다듬어 둔 고요함을 내가 또 헤집어 놓았구나. 어제 네 눈빛에서 내가 남긴 흉터들을 보았어. 미안하다는 말조차 너에게는 또 다른 짐이 될까 봐 서둘러 돌아섰지만, 이 말만은 꼭 남기고 싶었어. 나는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 없어. 그때의 우리도, 지금의 우리도...]
글씨는 이어지다 멈추고, 다시 삐뚤빼뚤하게 이어집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겨진 그의 머뭇거림과 떨리는 숨결이 종이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어제 흔들리던 그의 눈빛, 찻잔을 쥐고 가늘게 떨리던 그 가냘픈 손끝이 머릿속에 겹쳐 흐릅니다. 당신이 밀어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통해 소환될 아픈 과거의 파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눈앞이 조금씩 흐려집니다. 가슴을 짓누르는 이 감정이 그에 대한 원망인지, 아니면 겨우 닫아걸었던 마음에 다시 찾아온 균열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편지지는 아침 안개 속에서 하얗게 빛나며 소리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와 당신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하얀 종이 위의 활자들이 당신의 무방비한 내면을 자꾸만 흔들어 깨웁니다.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감정의 심연이 펼쳐질 것만 같은 순간, 당신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편지지의 다음 줄을 바라봅니다.
아침 햇살은 이슬 맺힌 마당을 소리 없이 비추기 시작하고, 당신의 손끝은 갈 길을 잃은 채 외로운 무게를 견디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묻어두었던 온기가 가만히 손끝을 적셔올 때, 당신의 마음은 다시 한번 거친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흔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