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온기가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갑니다.

마주 앉은 지후의 시선은 테이블의 불규칙한 나무 결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의 손끝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잔을 그러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가 지닌 슬픔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당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킵니다.

지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툭 끊어진 실타래처럼 무거운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둔탁하게 울립니다.

"우리 집에 들이닥친 사람들이... 너한테까지 찾아가겠다고 협박했었어. 나 하나 망가지는 건 상관없었지만, 너까지 나 때문에 지옥에 끌려 들어가게 둘 수는 없었어. 그게... 내가 너를 떠나야만 했던 유일한 이유였어."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의 마르고 긴 손가락 사이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테이블 위로 번집니다. 지후가 물기 어린 눈동자로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상처로 얼룩진 그의 눈빛 속에 담긴 투명한 진심이 오롯이 당신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 스며듭니다.

언제나 차디찬 얼음벽 같던 마음의 한구석이 쩍 갈라지는 소리를 낸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지후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무너뜨려 가면서까지 나를 지키려 했다는 잔인하고도 다정한 진실. 오랜 세월 당신을 가두었던 원망의 사슬이 무력하게 흔들립니다. 날카롭게 서 있던 미움이 그의 눈물방울 속에서 길을 잃고 서서히 녹아내립니다.

당신의 손끝이 허공에서 가늘게 흔들립니다. 그를 붙잡아 주고 싶은 충동과,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흉터처럼 남은 아픔이 가슴 속에서 쓰리게 교차합니다. 지후는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채, 그저 어깨를 힘겹게 들썩이며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영원히 단단해 보였던 그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작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당신의 입술 사이로 얕은 숨결이 흘러나옵니다. 공방 안을 비추던 차분한 가을볕이 비스듬히 기울며 두 사람의 경계선 위에 아련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립니다. 기나긴 겨울의 끝에 비로소 조심스러운 봄볕이 닿듯, 차갑게 누적되어 온 오해의 얼음벽이 그의 눈물 앞에서 조용히 금 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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