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시간은 상처를 치료하기보다 그 위에 하얗게 먼지를 내려앉히는 데 더 능숙했습니다.

공방의 유리창 위로 새하얀 첫눈이 조용히 내려앉기 시작하는 오후, 당신은 멍하니 창밖의 골목길을 바라봅니다. 소리도 없이 세상을 하얗게 지워가는 눈송이들을 보며, 당신은 문득 그가 없는 겨울이 고스란히 시작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지후가 아주 먼 외지로 떠났다는 소식은, 아침나절 골목길을 쓸던 이웃의 입을 통해 아주 덤덤하게 전해졌습니다. 기차를 타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우리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머나먼 타국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이야기. 마치 전설처럼 들려온 그 짧은 소식은 차가운 공기를 타고 당신의 가슴속 깊은 곳을 조용히 적셔 내려갔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공방 구석, 그가 늘 머물며 나무를 다듬던 빈 의자에 잠시 머뭅니다. 텅 빈 자리 위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이 유난히도 시립니다. 가장 매정하게 그를 외면했던 것은 자신이었으면서, 이제 와 그의 부재를 실감할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아픔을 느끼는 스스로가 가증스럽고도 서글픕니다.

당신의 서늘해진 손가락 끝이 단단한 나무 테이블의 모서리를 쓸어내립니다. 그의 따스했던 온기가 머물던 자리마다 이제는 까슬한 나뭇결의 질감만이 선명하게 만져질 뿐입니다. 지후와 함께했던 과거를 내 손으로 불태워 버렸음에도, 가슴속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흉터 같은 그의 이름이 남아 숨을 쉴 때마다 안쪽을 깊숙이 찔러댑니다.

책상 위에는 오래전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빈 종이 한 장과 흐려진 잉크병이 놓여 있습니다. 이 깊은 그리움과 후회를 쏟아내어 어딘가에 가두어 두어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칩니다. 그러나 전해지지 못할 마음을 다시 적어 내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펜을 잡으려던 손끝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힘없이 떨립니다. 눈물조차 얼어붙은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당신은 깊은 갈림길에 마주 섭니다.

계절은 소리 없이 흐르고, 굳어버린 침묵 위로 차디찬 하얀 어둠이 소복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