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장이 내민 징계 소집 통보서는 빳빳했다. 붉은색 이사장 직인이 찍힌 백색의 종이가 선우의 흐릿한 시야 끝자락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이선우 교수."
비서실장의 목소리에는 승자의 여유가 묻어났다.
"이사회와 이사장님의 자비는 여기까지입니다. 무단 침입과 기밀 유출, 그리고 의료법 위반 혐의까지. 3일 뒤 청문회는 단순한 소명 자리가 아닙니다. 당신의 의사 면허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하는 단두대가 될 겁니다."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통보서가 아닌, 비서실장의 어깨너머 어두운 복도 끝을 향해 있었다. 왼쪽 시야의 가장자리가 짙은 먹물을 뿌린 것처럼 타들어가 있었다. 시신경식(視神經蝕). 신의 안목을 사용할 때마다 안구 후방의 미세혈관들이 파열되며 시야를 좀먹어 들어가는 형벌이 기어이 그의 왼쪽 구석을 완전히 삼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의 입꼬리는 느리게 비틀려 올라갔다.
"단두대라."
선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통보서를 낚아채듯 받아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거친 마찰음이 고요한 복도를 찢었다.
"강진엽에게 전해. 3일이라는 시간은 나를 매장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그 노인이 휠체어를 타고 법정으로 갈 준비를 하기엔 아주 안성맞춤인 기간이겠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비서실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나 선우는 이미 몸을 돌려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맹목적인 어둠이 도사리는 왼쪽을 완벽히 무시한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당당한 발걸음이었다. 그 뒤를 쫓는 한수아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우려와 서늘한 긴장이 교차하고 있었다.
***
### 02:40:12 — 이선우 교수의 개인 연구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숨을 고를 여유 따위는 사치였다. 선우는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스마트폰을 켜고 단축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음이 채 두 번을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이 교수, 연락 기다리고 있었소.]
우필용 의원의 중후한 목소리였다. 그의 딸을 살려낸 대가로 얻은 정계의 거대한 동아줄이 마침내 팽팽하게 당겨질 차례였다.
"의원님, 약속하셨던 카드를 꺼내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선우는 책상 위의 태블릿 PC를 켜며 차갑게 말했다.
[벌써 움직이려는 건가? 이사장 측에서 대대적인 청문회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은 들었네만.]
"강진엽이 저를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판을 짰다면, 저는 그 판 자체를 통째로 인수할 생각입니다. 성강대학병원의 불법 임상시험 'ST-9'의 실체와 부작용 데이터는 이미 제 손에 있습니다. 이 더러운 카르텔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이사회의 눈치를 보던 기관 투자자들, 그리고 소액 주주들의 연락처를 원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우필용 의원은 이 냉혹한 젊은 외과의의 계산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단박에 간파했다.
[사학연금공단과 대형 자산운용사 몇 곳의 책임자들이 내게 큰 빚을 지고 있지. 그들은 성강대학병원의 주가 폭락 리스크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네. 자네가 쥔 패가 확실하다면, 그들도 강진엽의 침몰하는 배에서 기꺼이 탈출하고 싶어 할 걸세.]
"확실한 수준이 아니라, 숨통을 끊어놓을 탄환입니다. 오늘 밤 안으로 그들의 의결권 위임장을 받아내야 합니다."
[좋네. 내 즉시 사적으로 움직이지. 3시간 뒤에 그들의 대리인들과 연락이 닿도록 조치하겠네.]
전화가 끊어졌다. 선우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침침해진 눈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안구 깊숙한 곳에서 핀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선우 씨, 정말 괜찮은 거예요?"
수아가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길은 따뜻했지만, 선우의 맥박은 얼음처럼 차갑고 일정했다.
"ST-9의 소아 병동 투약 기록 말이에요."
수아가 품 안에서 은밀하게 보관해 온 USB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소아 환자들에게조차 불법 임상시험을 강행하고 조작했던 성강대학병원의 가장 추악한 민낯이 담긴 원본 차트였다.
"이걸 청문회에서 터뜨리면 강진엽은 물론이고 병원 이미지 자체가 재기 불능이 될 수도 있어요. 소액 주주들이나 기관들이 오히려 발을 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선우는 USB를 집어 들며 수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기에 타이밍이 중요한 겁니다. 그들이 공포에 질려 주식을 던지기 직전, 내가 대안이 되어 그 주식을 흡수하는 것. 그게 이 '의장부'가 가리키는 유일한 승리 공식이니까요."
그의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푸른빛의 스펙트럼이 어른거렸다. 수아는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선우의 완벽주의는 자신을 파괴하는 광기와 동의어였다.
***
### 11:22:05 — 민도현의 비밀 작업실
"아, 진짜 머리 빠지겠네!"
도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모니터 화면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사방에는 정체 모를 캔커피 빈 깡통과 에너지 드링크 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타닥! 탁! 타다닥!
"형, 나 이러다 진짜 탈모 오면 성강병원 모발이식 센터 평생 무료 이용권 무조건 끊어줘야 해. 어? VIP 골드 카드로다가!"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선우를 향해 도현이 징징거리듯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진행 상황은?"
선우가 도현의 어깨 뒤로 다가섰다.
"우필용 의원이 소개해 준 기관 놈들, 겉으로는 정중한 척하면서 엄청 간 보더라고요. 하지만 내가 누굽니까? 성강대학병원의 불법 임상 리스크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메일로 쏴주니까 바로 꼬리 내리던데요? 'ST-9' 터지면 주가 반 토막 나는 건 시간문제니까."
도현이 엔터 키를 강하게 내리쳤다. 화면 가득 붉은색 경고 창들이 사라지고, 녹색의 승인 완료 메시지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끝났어요. 기관 투자자 3곳이랑 소액 주주 연대가 가지고 있던 의결권 위임 및 백업 지분의 명의 이전 승인 코드, 전부 우리 쪽 보안 서버로 확보했습니다. 이제 형이 승인만 누르면 끝이에요."
그 순간, 선우의 눈앞에 거대한 반투명 홀로그램 창이 솟구쳐 올랐다.
스스스스―.
공간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의장부(醫帳簿)'의 정비 윈도우가 열렸다.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짜릿한 한기가 뇌리를 관통했다.
[시스템 메시지: 의장부 정비 및 동기화 시작.] [분석 완료: 외부 유입 지분 및 우호 의결권 취합 중…….] [최종 결과: 우호 교호 지분율 24.3% 확정.] [알림: 성강대학병원 지배권 장악을 위한 2단계 록(Lock) 해제. 정보 권한 '심연(Abyss)' 단계 활성화.]
눈부신 형광빛의 수치들이 선우의 망막 위에 내려앉았다. 24.3%. 이사장 강진엽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지분과 우호 지분을 합친 수치에 육박하는 거대한 성벽이 단 사흘 만에 구축된 것이다.
그러나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윽……."
선우가 왼쪽 눈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망막 뒤쪽에서 불에 달군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뇌하수체를 강타했다. 눈물과 함께 핏방울이 섞인 진액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형! 괜찮아?!"
도현이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선우는 허공을 향해 한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형 지금 왼쪽 눈 완전히 충혈됐어. 수술할 때마다 눈이 나빠지는 거, 그거 농담 아니지? 제발 좀……."
"이길 수 있는 판이다."
선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처럼 차가웠다.
"강진엽이 나를 징계하기 위해 준비한 그 자리가, 결국 그들의 관뚜껑이 될 테니까."
***
### 15:40:00 — 성강대학병원 본관 9층, 소회의실
임시 청문회를 하루 앞둔 오후. 이사장 직속의 징계 준비 위원들이 모인 비공식 회합실은 무거운 침묵과 기묘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는 박태경 교수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그 주변으로 이사회 측 법무팀 변호사들과 행정처장들이 서류 더미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선우의 임상 기록 무단 반출 건은 형사 고소장 접수까지 마쳤습니다."
법무팀장이 서류를 정리하며 비열하게 웃었다.
"보안실 CCTV에 한수아 교수와 함께 아카이브 룸에 들어간 정황이 완벽하게 찍혔습니다. 3일 뒤 청문회장에서 이 문서를 들이밀고 즉시 직위 해제 및 면허 정지 가처분 신청을 진행하면, 이선우는 단 한 마디도 항변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될 겁니다."
박태경이 콧방귀를 꼈다.
"진작 이랬어야지. 지가 천재 외과의면 다야? 병원 생리를 몰라도 너무 몰라. 이사장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보지."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활짝 열렸다.
쿵!
소음과 함께 들어선 인물은 이선우였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표정의 한수아가 서 있었다.
"누구 맘대로 남의 징계를 여기서 확정 짓고 있는 거지?"
선우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동결시켰다.
박태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선우!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징계위원회 소환은 내일 오전이다! 당장 나가!"
"내일 오전까지 기다려 주기엔, 당신들이 짜놓은 각본이 너무 조잡해서 말이야."
선우가 천천히 회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왼쪽 눈은 붉게 충혈되어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의 걸음걸이와 손끝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선우는 들고 있던 검은색 가죽 서류 가방을 테이블 한가운데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탁!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행정처장이 인상을 쓰며 서류 가방을 밀쳐내려 했다.
"열어봐."
선우의 짧고 단호한 명령에, 법무팀장이 쭈뼛거리며 가방을 열어 서류들을 꺼냈다. 서류의 첫 페이지를 확인한 법무팀장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이…… 이럴 리가……."
"서, 서 서기관? 그게 뭔데 그래?"
박태경이 다가와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류철에는 성강대학병원의 주요 기관 투자자들과 소액 주주 연대의 직인이 찍힌 '의결권 위임장'과 '지분 합의 양도 각서'가 빼곡하게 편철되어 있었다.
"우호 지분율…… 24.3%?"
박태경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사학연금이 왜 네놈한테 의결권을 위임해? 말도 안 돼! 이건 위조야!"
"위조인지 아닌지는 내일 주주총회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지."
선우가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회의실 안에 모인 이사장 진영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꿰뚫었다.
"당신들이 나를 해고하겠다고 만든 그 청문회 자리는, 내일부로 합법적인 이사장 해임안 결의를 위한 임시 주주총회로 병합된다. 내가 확보한 24.3%의 지분과, 강진엽의 불법 임상시험 부작용 은폐 자료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당신들이 가진 지분은 휴지조각이 될 거고, 이 방에 있는 놈들 중 절반은 구치소로 가게 될 거야."
소회의실 안은 마치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 선우를 징계하고 내팽개칠 모의를 하던 자들의 얼굴이 공포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갑작스러운 권력의 전치. 자신들이 쳐놓은 덫에 스스로의 목이 감겼음을 직감한 자들의 신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선우…… 네 이놈……!"
박태경이 부들부들 떨며 서류를 꽉 쥐었지만, 이미 전세는 완벽하게 뒤집혀 있었다.
선우는 차갑게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내일 보자고. 아주 재미있는 청문회가 될 테니까."
***
### 23:45:10 — 이사장실
"쿵!"
강진엽이 크리스탈 양주잔을 벽에 던져 산산조각을 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비서실장과 박태경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24.3%라고? 이선우 그 애송이 놈이 어떻게 그만한 지분을 모았단 말이냐!"
강진엽의 목소리는 노성이 아니라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우필용이 움직였습니다. 그 영악한 늙은이가 이선우의 뒤를 봐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ST-9'의 소아 병동 임상 부작용 원본 데이터까지 이선우의 손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의 보고에 강진엽의 주름진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내일 청문회에서 그 데이터가 폭로되고, 이선우가 확보한 우호 지분과 연합하여 자신을 압박한다면 성강대학병원의 왕좌는커녕 평생을 쌓아 올린 제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위기였다.
강진엽의 눈에 살기(殺氣)가 서렸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증거를 없애야 해."
"예? 하지만 이미 이선우가 데이터를 확보했는데 어떻게……."
박태경이 묻자, 강진엽이 그를 서늘하게 쏘아보았다.
"바보 같은 놈. 데이터는 복사본일 뿐이야. 진짜 '증거'는 지금 소아 중환자실과 특수 병동에 누워 있는 그 환자들이지.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임상 실패의 부작용은 언제든 신체 감정을 통해 증명될 수 있어."
강진엽의 잔인한 지시에 비서실장조차 침을 삼켰다.
"지금 즉시, ST-9 투약 후 혼수 상태에 빠진 환자 4명을 지하 사후 정리 수술실(Sub-OR)로 이송해라. 사유는 '급성 다장기 부전으로 인한 긴급 처치'로 조작하고, 오늘 밤 안으로…… 영구적인 심정지 상태로 처리해."
사후 정리 수술실. 그것은 병원의 공식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실패한 임상 환자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비밀의 도살장이었다.
"하지만 이사장님, 그들의 주치의는 한수아 교수와 이선우 교수 라인입니다! 밤중에 환자들을 빼돌린다면 당장 발각될 겁니다!"
박태경이 경악하며 만류했으나, 강진엽의 결단은 단호했다.
"그럼 강제로라도 집행해.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그 환자들은 이 세상에 없어야 한다. 내 모든 지위와 권력을 걸고 명령한다. 당장 움직여!"
어둠이 짙게 내린 성강대학병원의 심장부에서, 은밀하고도 잔혹한 증거 인멸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청문회를 단 몇 시간 앞둔 밤, 환자들의 생명을 도구로 삼은 카르텔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