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치이이이익.

천장에 박힌 원형 노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쏟아져 내린 백색 안개는 거침없이 낙하해 지훈의 발목을 적시고, 찰나의 순간에 무릎까지 차올랐다. 이산화탄소와 신경 가스가 뒤섞인 차가운 증기. 그것이 폐포를 파고들 때마다 가슴속에서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돋아나 내부를 사정없이 긁어대며 헤집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당신의 그 잘난 '범죄 설계도'가 이 밀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공식을 연산해 낼 수 있을지 아주 궁금하군요."

유리벽 너머, 백선우는 찻잔을 든 채 우아하게 눈매를 좁혔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기괴하게 굴절되었다.

지훈은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짚은 손끝이 딱딱한 대리석의 한기를 흡수했다. 쿨럭, 거친 기침을 뱉어낼 때마다 가래 대신 시큼한 위액과 핏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산소가 차단된 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붉은 그을음처럼 타들어가며 명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눈앞에 떠오른 푸른색 3D 홀로그램, 즉 '범죄 설계도'의 궤적마저 가스의 밀도에 가려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탈출구를 연산해라. 당장.’

지훈은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으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머릿속의 시스템은 붉은색 경고등만 요란하게 깜박일 뿐, 어떠한 물리적 탈출 경로도 제시하지 못했다. 사방을 가로막은 특수 강화유리의 두께는 80밀리미터. 인장 강도와 충격 흡수율을 계산한 푸른 숫자들이 홀로그램 위로 나열되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물리적 타격에 의한 파괴 불가능.]

가스는 이제 지훈의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질식의 공포 속에서 지훈의 안구는 붉은 핏줄로 가득 찼다. 눈물과 땀이 뒤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과거의 내가 설계했다는 덫이 고작 이 차가운 유리 상자 안에서 숨이 막혀 죽는 시나리오였단 말인가.

그때였다. 지훈의 흐려진 시야 속에서, 미친 듯이 명멸하는 푸른색 설계도 화면 구석에 이질적인 노이즈가 잡혔다.

치직. 지지직.

그것은 시스템의 일시적인 오류가 아니었다. 옅은 녹색 광채를 뿜어내며 주기적으로 깜박이는 작은 텍스트 코드.

[User-designed 1092]

눈물이 고인 눈을 깜박이며 지훈은 그 텍스트를 응시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무겁게 고동쳤다. 머릿속 깊은 곳, 얼어붙어 있던 기억의 빙하 밑바닥에서 무언가 둔탁한 진동이 느껴졌다.

'User-designed 1092.'

타인이 내 뇌에 이식한 저주이자 족쇄인 줄만 알았던 이 '범죄 설계도'의 시스템. 하지만 저 녹색 태그는 명백히 외치고 있었다. 이 시스템의 설계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라고. 1092. 지훈은 그 숫자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과거 서울 서부경찰서에 처음 입직했을 때 부여받았던 옛 경찰 군번의 뒷자리이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비밀번호였다.

"이게... 내가 남겨둔 이스터 에그(Easter Egg)였나."

지훈은 굳어가는 손가락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허공을 향해 뻗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허공의 빈 공간, 녹색으로 깜박이는 디버깅 태크를 향해 검지 끝을 가져갔다.

꾹.

손가락 끝이 허공의 가상 입력을 누르는 순간, 지훈의 망막 위로 푸른빛의 가상 키패드가 팝업되었다. 자판의 배열은 과거 자신이 사용하던 구형 보안 단말기의 형태 그대로였다. 숨이 완전히 가빠와 폐가 쪼그라드는 고통 속에서도, 지훈은 본능적인 손놀림으로 네 자리 숫자를 차례대로 눌렀다.

1. 0. 9. 2.

마지막 숫자를 누르는 순간, 귓가에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려 퍼졌다.

웅—!

머릿속 시냅스들이 강제로 재연결되는 물리적 통증이 지훈의 전신을 강타했다. 아으윽!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동시에 머릿속의 푸른 홀로그램 화면이 급격하게 반전되며 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심층부로 진입하는 루트 권한이 획득된 것이다.

[Administrator 권한 승인: User 1092] [시스템 자가 파괴 및 우회 프로토콜(By-pass Protocol)을 활성화합니다.]

우우웅 하는 기계음과 함께, 요양원 지하 실험실의 천장 내부에서 둔탁한 밸브 회전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유리벽 너머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백선우의 손길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훈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천장의 공조기를 올려다보았다. 시스템 제어권을 탈취한 범죄 설계도가 실시간으로 공기 흐름을 역산해 내고 있었다. 천장의 배기 댐퍼가 강제로 닫히고, 대신 급기 팬이 역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뿜어져 나오던 가스가 급격한 압력 변화에 의해 흡입구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훈이 재설계한 우회 프로토콜은 단순히 가스를 배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역류(Reverse Flow) 시작."

지훈이 피맺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출된 이산화탄소와 신경 가스는 정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요양원 지하 설비의 공조 배관을 타고 그대로 역류했다. 그 배관의 종착지는 다름 아닌 유리벽 너머, 백선우의 경호원들과 통제실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경호병 대기소'와 제어실이었다.

"어, 어라? 배기 압력이 이쪽으로...!"

제어실 내부에서 모니터를 감시하던 백야회 소속의 요원들이 갑자기 목을 움켜쥐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유리벽 뒤편의 대기실 환풍구에서 백색의 가스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다.

"컥! 쿨럭! 가스 방향이...!" "문 열어! 문...!"

우아함을 유지하던 백선우의 비서와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들은 통제실의 차단벽을 두드리며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지훈이 시스템을 잠가버린 터였다. 가스는 자비 없이 밀폐된 대기실을 채웠고, 무장한 경호원들이 차례대로 바닥으로 쓰러지며 혼절했다.

백선우는 그 무참한 광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 밑에 깃든 기괴한 보조개가 가늘게 떨렸다. 분노와 경악이 뒤섞인 눈빛이 유리벽 안쪽의 지훈을 향했다.

"과거의 잔재치고는 꽤 제법이군요, 강지훈 형사."

백선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여유가 없었다. 백선우는 왼쪽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더니, 쓰러져가는 부하들을 뒤로한 채 비상구를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철컥, 쿵!

지훈이 갇혀 있던 특수 강화유리 문이 시스템 오류로 인해 잠금 해제되며 위로 치솟았다.

"하아... 하아..."

지훈은 쏟아지는 신선한 공기를 허겁지겁 들이마셨다. 얼어붙었던 폐가 다시 팽창하며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지만, 살아있다는 감각이 온몸의 신경을 타고 번졌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대기실에 있던 경호원들 중 가스를 덜 마신 잔당 둘이 비틀거리며 총을 추출해 지훈을 향해 조준하려 했다.

"가만히... 있어!"

왼쪽 어깨가 탈구된 지훈의 몸은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신체 기능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지훈의 눈앞에 다시 켜진 설계도는 푸른색 선을 그리며 경호원들의 무게 중심과 바닥의 구조적 결함을 가리켰다.

[전방 3미터 지점: 대리석 바닥 아래 배관 점검구 덮개 균열.] [하중 집중 시 붕괴 가능성 94%.]

지훈은 이빨을 악물며 앞으로 돌진했다. 탈구된 왼쪽 어깨를 오른손으로 고정틀처럼 움켜쥔 채, 몸 자체를 무기로 삼아 첫 번째 경호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팍!

어깨로 상대의 명치를 들이받음과 동시에, 지훈은 그의 발을 걸어 정확히 설계도가 지목한 배관 덮개 위로 밀쳐냈다.

콰창!

약해져 있던 철제 덮개가 경호원의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다. 경호원의 한쪽 다리가 깊숙한 배관 구멍 속으로 빠지며 우지끈하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아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사이, 남은 한 명의 경호원이 지훈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겨눴다. 조준선이 지훈의 이마에 닿기 직전, 옆쪽의 그늘에서 나풀거리는 실루엣이 튀어나왔다.

"지훈 씨!"

빠르고 정확한 외침과 함께, 서은우가 들고 있던 무거운 소형 소화기를 경호원의 관자놀이를 향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경호원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은우는 안경테를 가운데 손가락으로 거칠게 치켜올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하얀 뺨에는 그을음과 먼지가 묻어 있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머릿속 제어 흐름이 끊기는 걸 보고... 정말로 자아가 완전히 붕괴된 줄 알았어요."

은우가 지훈에게 다가와 그의 오른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지훈의 뇌리에 강렬한 현기증이 몰아쳤다.

즈직, 직.

설계도를 무리하게 구동하고 시스템을 역해킹한 대가였다. 머릿속에서 소중한 기억의 파편들이 강제로 추출되어 소멸하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누구지...?'

지훈은 은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돕는 정신분석의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 가로등 아래에서 나누었던 대화, 그녀의 서재에서 풍기던 오래된 책 냄새, 자신을 향해 지어주던 따뜻한 미소의 기억들이 모래성처럼 스르륵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온기가 가득했던 기억들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냉혹한 기계적 논리와 살인마의 본능만이 차갑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은우 씨..."

지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손을 더 세게 맞잡았다.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바래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내 기억이... 또 사라지고 있어. 당신과 함께했던... 어떤 순간들이... 지워지고 있다고."

"알아요, 지훈 씨. 제 손을 놓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닻이 되어 줄게요.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계속 기억하고 증명할 테니까."

은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굳건한 신뢰가 지훈의 흔들리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아 매넜다. 지훈은 어금니를 깨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직 쓰러질 때가 아니었다. 백선우가 도망치고 있었다. 이 요양원 깊숙한 곳에 숨겨진 백야회의 실체를 완전히 세상에 드러내기 전에는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지훈은 쓰러진 경호원의 품에서 무전기와 탄창을 챙겼다. 탈구된 왼쪽 어깨를 벽에 대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뚝!

뼈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극심한 통증에 지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감정이 메말라갈수록 통증에 대한 감각마저 무뎌지고 있었다. 그것이 서글프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는 유용한 무기가 되었다.

"민수현의 움직임은?"

지훈이 물었다.

"아직 요양원 상층부에 있어요. 하지만 지하의 기동이 감지되자마자 요양원 전체에 비상 경보를 울렸어요. 백선우는 이미 탈출 경로를 확보한 것 같아요."

은우의 말에 지훈은 무전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무전기 너머로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들이 오가고 있었다.

- 'User 1092'가 시스템을 장악했다! 지하 3구역 차단막 개방! 전원 무장하고 지하 통로로 집결하라! 다시 말한다, 용의자는 생포할 필요 없다. 사살해라!

민수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지훈은 무전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과거의 자신이 쳐놓은 자해형 덫. 그 덫의 톱니바퀴가 이제 마지막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가야 합니다."

지훈이 은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라기보다, 목표물을 포착한 사냥개의 눈빛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훈은 은우를 뒤에 세우고, 반쯤 열린 제어실의 철문을 힘껏 박차고 복도로 나섰다. 백선우가 도망친 비상 통로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하지만 철문이 열리는 순간, 지훈의 신형 센서가 극도의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삐빅! 삐비비빅!

복도 사방에 설치된 비상등이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어두운 통로를 피처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광선이 가득한 복도 끝,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렬된 수십 개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철컥! 철컥! 철컥!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사설 진압 부대였다. 방탄복과 전술 헬멧으로 무장한 그들은 일체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훈과 은우를 향해 전술 대형을 유지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기관단총의 총구들이 일제히 지훈의 심장과 이마를 조준했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어라."

진압 부대의 맨 앞줄에 선 대장이 차가운 지시를 내렸다. 그들의 뒤편,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민수현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왼쪽 손목의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 나왔네, 강지훈 형사님? 아니, 이제는 그냥 미친 살인마라고 불러야 하나?"

수십 개의 총구가 뿜어내는 서늘한 살기가 복도의 명도를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지훈의 머릿속 범죄 설계도가 붉은색 경고 신호로 가득 차며 미친 듯이 연산 결과를 쏟아내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탈출 궤적이 단 하나도 그려지지 않았다.

완벽한 포위. 그리고 붉은 조명 아래 겨눠진 수십 개의 총구.

지훈의 손가락이 방전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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