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4……]
붉은 디지털 숫자가 망막을 찌를 듯이 번뜩였다.
귓가를 때리는 경고음은 고작 데시벨의 수치에 불과했으나, 뇌의 편도체를 자극해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왼쪽 어깨 관절에서 시작된 둔탁한 통증이 척수를 타고 목덜미까지 뻗쳐 올라왔다. 가시덤불로 추락했을 때 입은 부상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지만, 뇌는 오히려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푸른색 3D 홀로그램 선들이 공간을 쪼개며 펼쳐졌다. 범죄 설계도의 연산 장치가 가동되자, 도어록 콘솔의 내부 회로가 투시되듯 푸른 실선으로 시각화되었다. 광케이블의 흐름, 구리 도선의 배치, 그리고 중앙 처리 장치로 흘러드는 전류의 미세한 파형까지.
그 푸른색 가상 스크린의 오른쪽 구석, 노이즈처럼 깜박이는 녹색 글자가 보였다.
[User-designed 1092]
지훈의 심장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타인이 이식한 저주라고만 믿었던 이 설계도 시스템 가동창에 매번 떠오르는 저 기묘한 태그. 1092는 그의 옛 경찰 군번 조합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이 시스템을 설계했다는 증거가 뇌세포의 틈새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곱씹을 시간이 없었다.
[11…… 10……]
"후우."
지훈은 주머니에서 서은우가 챙겨준 초소형 역류 발생기를 꺼냈다. 손가락 크기의 은색 실린더 표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서부경찰서 수색망을 뚫고 나올 때 그녀가 귓속말로 속삭였던 단서가 뇌리를 스쳤다.
'아르카디아의 보안망은 폐쇄 루프야. 외부 해킹은 불가능해. 하지만 물리적 접점에서 역전류를 흘려보내면, 시스템은 과부하를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게이트를 개방하고 리셋 프로토콜로 전환돼.'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조금이라도 빠르면 메인 컴퓨터가 침입을 감지해 록다운을 실행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사설 타격대가 이 좁은 복도를 포위할 터였다.
지훈은 도어록 하단의 고정 나사 세 개를 손톱 끝과 간이 드라이버를 이용해 순식간에 풀어내고 커버를 뜯어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하네스 배선 뭉치가 드러났다.
[7…… 6……]
시야에 표시된 설계도가 배선의 전류 밀도를 실시간으로 계산해 냈다. 노란색 피복의 전선이 중앙 제어 장치로 가는 신호선이었다. 지훈은 검지와 엄지손톱으로 피복을 정밀하게 벗겨냈다. 구리선이 붉은 경고등 불빛을 받아 핏빛으로 반사되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법도 했지만, 지훈의 손은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사처럼 고요했다. 그는 침착하게 도어록의 초당 연산 부하를 마이크로 암페어 단위로 읽어 내려갔다.
1.2㎃. 전류의 파동이 가장 낮아지는 주기가 감지되었다.
[3…… 2……]
"지금이다."
역류 발생기의 구리 단자를 노출된 신호선에 밀착시켰다.
치직!
푸른색 불꽃이 튀며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순간적으로 수만 볼트의 고전압이 역류하여 콘솔 내부의 트랜지스터를 태워버렸다. 붉은색 경고등이 거짓말처럼 꺼지며 콘솔의 액정 화면이 검게 죽었다.
철컥, 쿵.
지하 1층 실험 구역을 가로막고 있던 육중한 강철 문이 길고 무거운 한숨을 쉬듯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문틈 사이로 차갑고 소독약 냄새가 섞인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훈은 어깨의 통증을 억누르며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내부의 온도는 지상의 요양원 구역보다 최소 5도는 낮은 듯했다. 뺨을 스치는 공기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길게 뻗은 복도는 백색 대리석과 무광 스테인리스로 마감되어 있어, 마치 미래의 수술실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훈은 벽에 몸을 밀착한 채 소리 없이 전진했다. 양옆으로 늘어선 방들은 모두 특수 강화유리로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구조였다. 텅 빈 침대, 링거 거치대, 그리고 정체 모를 모니터들이 파란 불빛을 깜박이고 있었다.
복도의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유독 밝은 빛을 뿜어내는 방 하나가 지훈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곳은 수용실이라기보다는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가까웠다. 부드러운 가죽 소파와 앤티크한 목재 테이블,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클래식 LP 음반들. 방 안에서는 은은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단정한 스리피스 수트를 입은 사내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있었다. 백야회의 최종 후계자, 백선우였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손님을 맞이하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눈 밑에 돋아난 기괴한 보조개가 그의 미소를 더욱 이질적으로 만들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요, 강지훈 형사님. 아니, 우리 사냥개라고 불러야 할까요?"
백선우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도자기 소리가 클래식 음악 소리를 뚫고 서늘하게 울렸다.
지훈은 범죄 설계도를 끄지 않은 채 그를 응시했다. 푸른색 레이저 선들이 백선우의 신체 치수와 무게중심, 그리고 주머니 속에 숨겨진 무기의 가능성을 실시간으로 연산하고 있었다.
"연극은 끝났다, 백선우."
지훈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어깨의 통증조차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전부 알아냈어. 아르카디아 요양원은 단순한 요양 시설이 아니지. 백야회의 자금 세탁처이자,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조작하는 생체 실험실이다."
백선우는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유리벽 앞으로 걸어와 지훈과의 거리를 좁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두꺼운 방탄유리 한 장만이 존재했다.
"알아냈다니, 참 흥미로운 표현이네요."
백선우가 유리벽을 손가락 끝으로 톡, 톡 두드렸다. 클래식 음악의 박자에 맞춘 규칙적인 노크 소리였다.
"당신이 '알아낸'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의 머릿속에 '남겨둔' 것이지요.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의 미소 속에 담긴 오만함이 지훈의 피부를 바늘처럼 찔렀다. 지훈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백야회의 후계자라는 자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지배욕이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당신의 그 경이로운 능력, 현장의 모든 단서를 역추적하는 '범죄 설계도' 말입니다."
백선우는 유리를 사이에 두고 지훈의 머리 쪽을 가리켰다.
"그것이 자연적으로 각성한 초능력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나요? 아니면 신이 내린 선물?"
그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속삭였다.
"그건 애초에 우리 연구진이 수년에 걸쳐 개발한 '기억 제어 및 인지 모델링 프로그램'의 완성본입니다. 우리는 그걸 '성배'라고 부르지요. 당신은 그저 그 성능을 검증하기 위해 던져진 가장 똑똑하고 사나운 실험체에 불과해요."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내 머릿속의 설계도가... 그들의 기술이라고?'
머릿속에서 푸른색 홀로그램 배선들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뇌 깊숙한 곳에서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동시에, 가장 소중했던 은사의 기억이 완전히 소멸했을 때의 그 공허한 감각이 다시 한번 가슴을 후벼팠다.
"당신은 우리를 잡기 위해 뛰어다닌다고 착각했겠지만, 사실은 우리가 던져준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여기까지 온 겁니다."
백선우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계도를 가동할 때마다 당신의 인간적인 기억들이 지워지지요? 도덕심, 동료에 대한 신뢰, 가족과의 추억... 그 모든 것들이 지워지고 남는 건 오직 냉혹한 논리와 살인마의 본능뿐입니다. 결국 당신은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우리가 원하는 완벽한 사냥개로 완성되어 가는 중이에요."
그의 도발은 정교했고 가학적이었다. 지훈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된 폭력성과 분노 조절 장애를 정확히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그들이 만든 괴물인가?'라는 극심한 자기의심이 지훈의 이성을 뒤흔들었다. 주먹을 쥔 오른손에 핏줄이 터질 듯 돋아났다. 당장이라도 저 유리벽을 부수고 백선우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지훈은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채우자, 머릿속의 노이즈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니야.'
지훈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서늘해져 있었다.
"틀렸어, 백선우."
지훈이 나직하게 말했다.
"만약 이 설계도가 너희가 만든 완벽한 피조물이라면, 왜 여기에 'User-designed 1092'라는 디버깅 태그가 붙어 있지?"
백선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의 여유로운 미소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지훈은 놓치지 않았다.
"그건 개발자 코드일 뿐..."
"그 코드는 내 옛 경찰 군번이다."
지훈은 유리벽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백선우의 얼굴 위로 짙게 드리워졌다.
"너희가 날 실험체로 쓴 게 아니야. 내가 너희를 완벽하게 낚기 위해, 내 기억을 지우고 스스로 이 덫에 뛰어든 거지. 너희가 자랑하는 그 '성배'의 소스 코드를 해킹하고 재설계한 건 바로 나다."
지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과거의 내가 설계한 자해형 덫. 그 진짜 목적은 너희 백야회의 심장부를 완전히 드러내고, 너희 후계자라는 놈의 오만한 목을 단두대에 올리는 것이다. 난 내 기억을 대가로 지불해서라도 너희를 파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
백선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극도로 차갑고 잔인하게 변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차는 이미 식어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과거의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상관없어."
백선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지나간 유령이 현재의 육체를 구원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향했다.
"여기까지 제 발로 들어온 사냥개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백선우가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딱.
경쾌한 소리가 밀실 안을 울린 순간, 지훈의 등 뒤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쿵! 쿵! 쿵!
복도 양끝을 가로막고 있던 특수 강화유리 문들이 차례대로 내려앉으며 지훈이 서 있는 공간을 완벽하게 밀봉했다. 사방이 투명하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벽으로 가로막힌 거대한 투명 감옥이 완성되었다.
동시에, 천장에 설치된 수십 개의 원형 노즐에서 미세한 소리와 함께 백색의 기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이산화탄소와 신경 가스를 혼합한 특제 가스입니다."
유리벽 너머에서 백선우가 다시 찻잔을 들며 차갑게 속삭였다.
"뇌세포를 마비시키고 호흡을 멈추게 만들지. 당신의 그 잘난 '범죄 설계도'가 이 밀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공식을 연산해 낼 수 있을지 아주 궁금하군요."
가스가 순식간에 복도 바닥을 채우며 지훈의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다. 차가운 백색 안개가 지훈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고,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매캐한 공기에 지훈은 거친 기침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지며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설계도가 미친 듯이 경고등을 울려댔지만, 탈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