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액정 화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차가운 빛을 산란시켰다.

`[실패 시 살인 용의자의 여동생은 살아남지 못한다.]`

문장은 간결했고, 무거웠으며, 비정했다. 지훈은 손가락 끝으로 액정을 쓸어내렸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 감각이 무뎌진 탓에 유리의 매끄러운 감촉조차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다.

여동생.

머릿속에서 그 세 글자가 파문처럼 퍼져 나갔지만, 뒤이어 찾아와야 할 구체적인 상상력은 철저히 거부당했다. 달콤한 비누 향이 났던가, 아니면 늘 잔소리를 늘어놓던 목소리였던가. 동그란 콧날이나 장난스럽게 휘어지던 눈매 같은 파편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뇌의 가장 깊은 곳, 소중한 이들의 기억이 존재해야 할 방은 마치 폭탄이 휩쓸고 간 폐허처럼 하얀 재만 날리고 있었다.

어깨의 탈구된 관절이 욱신거릴 때마다 뇌세포가 하나씩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 범죄 설계도를 억지로 가동해 저격수의 궤적을 역추적한 대가였다. 설계도의 푸른 홀로그램이 눈앞에 선명해질 때마다, 그의 영혼을 이루던 가장 따뜻한 기억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지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정작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증명해 줄 가장 소중한 조각들이 단전에서부터 소멸하고 있었다.

"으, 윽..."

발밑에 깔린 저격수가 신음하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녀석의 젖은 코트에서 고인 빗물이 핏빛으로 물들어 흘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공기를 찢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적색과 청색의 경광등 불빛이 골목 입구의 젖은 보도블록을 번갈아 비추며 춤을 추듯 다가왔다.

시간이 없었다.

이 저격수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왼쪽 어깨는 이미 인대가 늘어나 쓸모없는 고깃덩어리처럼 늘어져 있었고, 갈비뼈 부근은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을 뱉어냈다. 추적자들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길은 막혔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적의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사냥터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

지훈은 저격수의 폴더폰을 손에 꽉 쥐고 자신의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두 갈래의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빗줄기 사이로 서부경찰서 수사 1과의 형사들이 권총을 겨눈 채 쏟아져 나왔다.

"강지훈! 움직이지 마! 양손 머리 위로 올려!"

귀를 찌르는 고함과 함께 가죽 장화가 진흙탕을 짓밟는 소리가 사방을 에워쌌다. 지훈은 반항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가누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아스팔트의 감촉이 바지 무릎을 적시고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용의자 확보! 수갑 채워!"

거친 손길이 늘어진 왼쪽 어깨를 사정없이 꺾어 내렸다. 관절이 비명을 질렀고, 지훈의 입 틈새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마가 축축한 바닥에 처박혔다. 흙먼지와 빗물이 입안으로 밀려들어 왔지만, 지훈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짓누르는 형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들의 눈빛은 살인마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장막 너머,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시선들이 있었다. 지훈은 그 침묵의 신호를 읽어냈다. 그들은 단순히 도망자를 잡은 것이 아니었다.

연극은 시작되었다.

***

서부경찰서 취조실의 명도는 낮고 비정했다.

천장에 매달린 구식 형광등은 신경질적인 주파수로 웅웅거리며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냈다. 방 안의 공기는 서늘했고, 소독약 냄새와 오래된 서류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지훈은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양손은 테이블 아래의 쇠고리에 고정된 수갑에 묶여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쇠붙이의 냉기가 손목 뼈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구두 굽이 시멘트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들어선 사내는 한태성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빗방울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맺혀 있었다. 태성은 지훈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앉지 않았다. 대신 철제 테이블을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쾅, 내리쳤다.

쿵!

방 안의 공기가 진동했다. 취조실 유리창 너머에서 감시하는 이들의 귀청을 떨어뜨릴 듯한 굉음이었다.

"강지훈."

태성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거칠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결국 내 손으로 네 손목에 고랑을 채우는 날이 오는구나. 미친 새끼. 동료들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감히 현장에서 도망을 쳐? 그리고 거기서 또 누굴 담그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거야?"

태성은 지훈의 멱살을 움켜잡고 상체를 강제로 끌어당겼다. 지훈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수갑 체인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찰랑거리는 쇠비듬 소리가 취조실을 채웠다.

"대답해, 이 살인마 새끼야. 네가 죽였지? 아르카디아 요양원 놈들과 무슨 거래를 한 거야!"

태성의 숨결이 지훈의 얼굴에 닿았다. 담배 냄새와 섞인 그의 뜨거운 숨결은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리창 너머의 감시 카메라와 녹음 장비는 이 완벽한 분노의 연출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훈의 심박수는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태성이 멱살을 잡고 흔드는 순간, 그의 시선이 태성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태성이 입은 짙은 감색 양복 상의 사이로 구겨진 셔츠와 넥타이가 보였다. 태성의 성격답지 않게 아주 정교하고 팽팽하게 매여 있는 더블 하프 윈저 매듭. 일반적인 매듭보다 왼쪽으로 약간 치우친 채, 넥타이 핀이 그 매듭의 바로 아래가 아닌 비스듬한 대각선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지훈의 머릿속에서 번쩍하며 기억의 회로가 작동했다.

뇌리가 팽팽하게 조여들며 1화의 밀실 살인 현장 이미지가 눈앞에 3D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피웅덩이 속에 누워 있던 피해자의 옷깃. 그 옷깃에 묶여 있던 독특한 형태의 매듭.

당시에는 범인이 남긴 기괴한 표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매듭은 한태성이 현장을 조작하며 남겨둔 지문이자, 서부경찰서 수사 1과 내부에서 오직 신뢰할 수 있는 극소수만이 공유하는 '구조 약속'의 기호였다.

태성이 넥타이 핀의 각도를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그 동작으로 인해 태성의 넓은 어깨가 천장의 CCTV 렌즈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사각지대가 형성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태성의 눈빛에서 사나운 광기가 걷히고, 서늘하고 명징한 이성이 비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지훈아."

태성의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낮고 빠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취조실 마이크의 수음 한계를 교묘히 피하는 데시벨이었다.

"지금 네가 들고 온 그 저격수의 폰, 백야회 윗선으로 바로 연결되는 다이렉트 라인이다. 하지만 서내에 프락치가 있어. 여기서 정식 수사로 넘어가면 그 폰은 증거물 보관소로 가기도 전에 공중분해 될 거다."

지훈은 태성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목소리는 내지 않고, 미세한 눈짓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태성은 지훈의 멱살을 놓아주며, 이번에는 그의 머리통을 테이블 위로 짓눌렀다.

팍!

지훈의 뺨이 차가운 철제 테이블에 닿았다. 고통스러웠지만, 지훈은 태성의 다음 행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 쓸모없는 새끼. 뇌가 망가져서 기억도 못 한다더니, 진짜 병신이 다 됐군."

태성은 허리춤에서 서류철을 꺼내 테이블 위로 거칠게 던졌다. 서류철이 흩어지며 지훈의 얼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서류들은 단순한 사건 보고서가 아니었다. 태성이 거꾸로 펼쳐놓은 서류의 하단에는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지도가 인쇄되어 있었다.

[지하 2층 압수물 창고 B-14 구역]

지훈의 시선이 그 단어를 읽어내자마자, 태성은 서류를 다시 낚아채며 지훈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철컥, 철컥.

태성이 지훈의 수갑을 강제로 조이는 척하며 손목을 비틀었다. 수갑의 톱니가 살을 파고드는 감각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손바닥 안쪽으로 딱딱하고 얇은 플라스틱 카드가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압수물 창고의 마스터키 카드였다.

"제대로 미쳐서 배후를 물어와라."

태성의 목소리가 지훈의 귓가에 차갑게 박혔다.

"네가 저지른 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만약 진짜 네가 그놈들을 죽인 괴물이라면... 내 손으로 네 정수리에 구멍을 내줄 테니까."

그것은 도발이자, 전장에 서는 동료를 향한 가장 확실한 신뢰의 맹세였다.

지훈은 수갑 뒤편, 손목과 철제 고리 사이의 좁은 틈새에 카드를 교묘히 끼워 넣었다. 손가락 끝의 감각만으로 카드의 마그네틱 선 위치를 확인했다.

태성이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다시 차가운 추격자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은 여기서 평생 썩어도 싸다. 수사 1과 전원, 이 새끼 경계 늦추지 마라. 아주 영악한 놈이니까."

태성은 침을 뱉듯 쏘아붙이고는 취조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당당했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바깥의 소음이 잠시 흘러들어왔다. 태성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대기하던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감시 카메라 상시 확인하고, 면회는 일절 금지한다. 서장님 지시 떨어질 때까지 독방에 쳐넣어."

"예, 알겠습니다!"

쿵, 하고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사방은 다시 웅웅거리는 형광등 소리만 남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지훈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목에 닿아 있는 마스터키의 차가운 플라스틱 질감이 마치 미세한 전류를 흘려보내는 것처럼 짜릿하게 느껴졌다.

한태성은 판을 깔아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억을 잃어버린 사냥개인 자신이, 이 폐쇄된 미로를 어떻게 찢고 나가 백야회의 목덜미를 물어뜯느냐였다.

지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서서히 올라갔다. 서늘한 취조실의 명도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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