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찰칵.

빗소리를 뚫고 정수리를 짓누르는 차가운 금속의 감각은 지독하리만큼 명징했다. 머리 가죽을 타고 흐르는 빗물보다 더 차갑고, 고막을 찌르는 공이치기의 마찰음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날카로웠다.

"가만히 있어, 강지훈 형사."

낮고 차분한 목소리. 빗물에 젖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살의도, 흥분도 거세된 기계적인 어조였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왼쪽 어깨가 탈구되어 가시덤불에서 구른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뇌수의 밑바닥에서부터 둔중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신체 기능은 이미 정상 수준의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 정수리를 조준하는 총구 앞에서는 그 통증마저도 아주 먼 곳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돌렸다. 젖어 든 아스팔트 바닥 위로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 희미한 명도 속에서 총구를 겨눈 인물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단정하게 떨어지는 검은색 레인코트.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안경알 너머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총을 쥐고 있는 손가락은 지나치게 가늘고 길었다.

"서... 은우?"

지훈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억은 완전히 소실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을 형사의 길로 이끌어 준 은사의 얼굴과 이름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지만, 눈앞의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는 뇌의 파편화된 파일 속에서 간신히 인출되었다.

서부경찰서 수사 1과의 정신 자문을 담당하던 정신분석의, 서은우.

그녀는 총구를 거두지 않은 채, 지훈의 초점 잃은 눈동자를 샅샅이 뜯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실험대 위의 해부용 표본을 관찰하는 학자처럼 서늘하고 집요했다.

"맥박 분당 110회 이상 추정. 호흡 불규칙.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수축해 있군요. 나를 알아보는 데 2.4초가 걸렸어요. 평소의 당신이라면 0.5초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은우의 입술이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극도로 긴장할 때 나오는 특유의 버릇대로, 왼손 가운뎃손가락으로 안경테의 정중앙을 툭 치켜올렸다.

지훈은 한 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은우의 총구가 그의 이마를 완벽한 궤적으로 쫓아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당신의 뇌 상태는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자극하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요."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군."

지훈이 이 악물고 뱉어냈다. 부러진 뼈가 어깨 안쪽에서 부딪히는 듯한 둔탁한 통증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밀실 안에서, 내가 칼을 쥐고 있었어. 내 기억은 거기서부터 끊겼다. 서은우 박사, 당신도 나를 살인마로 보고 찾아온 건가?"

은우는 대답 대신 총구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서 소형 펜라이트를 꺼내 지훈의 눈가에 비추었다. 강렬한 백색광이 망막을 찌르자 지훈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구 진탕, 그리고 외상 후 해리 증상."

은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운 얼음물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요. 당신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정확히는, 죽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건 단순한 기억상실이 아니에요. 특정한 시각 정보와 기억의 연결 고리를 강제로 차단하는 향정신성 약물... 혹은 그에 준하는 인위적인 인지 제어 공작의 흔적입니다."

"인지 제어...?"

"쉽게 말해, 누군가 당신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는 뜻입니다. 스스로를 살인마라고 믿게 만들려고요."

은우의 말이 지훈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내가 진짜 죽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안도감과 함께, 동시에 끔찍한 자기의심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내 안의 잠재된 폭력성이 만들어낸 환각이라면? 내가 정말로 그들을 난도질한 괴물이라면?

가슴팍이 턱 막혀왔다. 지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머리를 짓눌렀다.

"시간이 없어요. 수사 1과 동료들이 이 근방을 이 잡듯 뒤지고 있습니다. 한태성 형사가 시간을 벌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일단 제 차로..."

은우가 지훈의 팔을 붙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지훈의 뇌세포들이 돌연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관자놀이가 터져 나갈 듯한 고통과 함께, 시야가 순식간에 푸른색 격자무늬로 뒤덮였다.

*범죄 설계도(The Blueprint) 가동.*

차가운 빗물 속에서, 지훈의 안구 위로 주변 환경의 모든 물리적 수치들이 3D 홀로그램 형태로 징수되듯 시각화되었다.

빗방울의 낙하 속도, 골목길의 풍향, 지면의 마찰 계수.

그리고 은우의 등 뒤, 약 45미터 떨어진 반대편 연립주택 3층 보일러실 난간.

그곳에서부터 길게 뻗어 나오는 노란색 점멸선이 지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명백한 저격 궤적이었다.

'저격 분기점 조준 완료. 충돌 예측 시간 1.8초.'

그런데 설계도 화면의 우측 하단 구석진 곳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주 작고 미세한 노이즈가 깜빡이고 있었다.

`[User-designed 1092]`

희미한 녹색 태그였다. 마치 시스템의 백도어 프로그램처럼, 정체불명의 명칭이 푸른 설계도 한구석을 차지한 채 노이즈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1092.

어디선가 본 듯한 숫자였지만,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저격 궤적의 끝이 은우의 척추 부분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엎드려!"

지훈은 탈구된 왼쪽 어깨의 통증을 악물고, 오른팔로 은우의 어깨를 강하게 낚아챘다.

"뭐 하는...!"

은우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지훈은 그녀의 몸을 거칠게 밀쳐 골목길 모퉁이에 주차되어 있던 은우의 검은색 세단 조수석 안쪽으로 처박았다.

퍼억!

동시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골목을 찢었다.

저격탄이 은우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아스팔트 바닥을 정확히 꿰뚫었다. 파편과 빗물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비릿한 화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소음기를 장착한 저격총이었다.

"차 키!"

지훈이 은우의 조수석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은우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조수석 콘솔 박스 아래로 몸을 웅크린 채, 주머니에서 스마트키를 지훈에게 던졌다.

지훈은 튀어 오르듯 운전석으로 몸을 날렸다. 스마트키가 인식되자마자 스타트 버튼을 강하게 눌렀다. 엔진이 우렁찬 굉음을 내며 깨어났다.

"강 형사님, 저격수의 위치는요?"

은우가 빠른 말투로 물었다. 그녀의 안경알이 차량 내부의 희미한 계기판 불빛을 받아 차갑게 반사되었다.

"11시 방향, 3층 난간."

지훈은 기어를 후진(R) 상태로 박아 넣었다.

머릿속의 설계도가 미친 듯이 연산을 계속했다. 빗방울이 전면 유리를 두드리는 간격과 타이어의 접지력, 그리고 저격수의 재장전 속도가 실시간으로 계산되어 뇌리에 박혔다.

*두 번째 사격 예측 시간: 0.8초 후.* *저격수의 조준 궤적: 운전석 헤드레스트 관통 경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방탄유리가 아닌 이상 운전자는 즉사할 터였다. 하지만 지훈의 머릿속 설계도는 전혀 다른 역전의 경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탄도 궤적 0.1초 단위 예측 완료.' '차량의 후륜 슬립을 유도하여 차체의 각도를 12도 비틀 것.' '저격탄의 예상 낙하지점: 조수석 앞바퀴 우측 타이어 고무 벨트.'

지훈은 가속 페달을 바닥까지 짓밟았다.

끼이이익!

차량이 빗길 위에서 요란한 굉음을 내며 후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핸들을 오른쪽으로 급격히 꺾었다. 조수석 안쪽에서 은우의 몸이 크게 쏠렸다.

탕!

어둠을 뚫고 두 번째 탄환이 날아들었다. 저격수는 완벽하게 예측된 운전석의 머리 높이를 노렸지만, 지훈이 차체를 미끄러뜨리는 바람에 탄환은 빗나갔다.

정확히는, 지훈이 유도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퍽!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조수석 앞바퀴 타이어가 터져 나갔다.

"타이어가 터졌어요!"

은우가 소리쳤다.

하지만 지훈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설계한 물리적 카운터였다.

타이어가 터지며 발생한 급격한 우측 쏠림 현상과 빗길의 수막현상이 결합했다. 차체는 통제력을 잃고 스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훈은 터진 타이어의 마찰 저항을 역으로 이용해 핸들을 반대로 강하게 감았다.

파가각!

휠이 아스팔트를 긁으며 불꽃을 튀겼고, 차량은 괴물처럼 회전하며 저격수가 숨어 있는 연립주택 입구 골목길을 향해 전면을 곧바로 고정했다.

단 1초 만에 조준 방향을 완전히 역전시킨 것이다.

"꽉 잡아."

지훈은 기어를 드라이브(D)로 밀어 넣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세단은 터진 타이어를 질질 끌며 저격수가 있는 건물의 1층 필로티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위층 난간에서 저격수가 당황한 듯 급하게 총구를 아래로 내리는 모습이 지훈의 푸른 설계도 궤적에 포착되었다.

지훈은 차가 건물 입구에 처박히기 직전,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다. 차량이 필로티 기둥을 스치듯 멈춰 서는 순간, 지훈은 이미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왼쪽 어깨의 통증이 비명처럼 뇌를 두드렸지만, 그의 도파민은 이미 고통을 마비시킨 상태였다.

지훈은 코트 안쪽에 품고 있던, 탄창이 빈 권총을 꺼내 들었다.

철컥!

그는 고의로 거칠게 슬라이드를 당겨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극대화했다.

어두운 계단실 위쪽에서 도망치려던 저격수의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빈 총소리에 낚인 것이다. 저격수는 지훈이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계단을 올라온다고 판단하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려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지훈은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계단실 옆, 골목길 모퉁이에 위태롭게 쌓여 있던 대형 목재 화물 적재함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적재함의 무게 약 120kg. 지지대의 균형 붕괴 임계점 15%.' '저격수의 발바닥 위치 확보.'

지훈은 오른발을 크게 뻗어 적재함의 하단 지지대를 강하게 걷어찼다.

우두둑!

지탱하고 있던 나무 받침대가 부러지며, 거대한 목재 적재함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격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쏟아져 내린 수십 개의 목재 궤짝들이 비좁은 계단실 입구와 저격수의 도주로를 완벽하게 덮쳤다. 우당탕탕 하는 굉음과 함께 저격수의 비명이 골목을 메웠다.

지훈은 먼지 구덩이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무너진 목재 더미 사이로 다리가 깔린 채 버둥거리는 검은 옷의 사내가 보였다. 녀석이 권총을 집어 들려 하자, 지훈은 가차 없이 녀석의 손목을 짓밟았다.

드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권총이 빗물 고인 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누구야."

지훈이 저격수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녀석의 얼굴은 짓겨진 목재 파편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누가 보냈지? 백선우인가?"

저격수는 피침을 뱉으며 낄낄거렸다.

"강지훈... 넌 이미 끝났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기억도 못 하는 병신 새끼가..."

그때, 저격수의 젖은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음이 울렸다.

지훈은 거칠게 손을 집어넣어 폴더폰 하나를 꺼냈다. 액정 화면에는 발신자 번호 제한 표시와 함께 한 통의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지훈은 빗물을 닦아내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문자의 내용은 짧고 명료했다.

`[실패 시 살인 용의자의 여동생은 살아남지 못한다.]`

순간, 지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동생?

지훈은 자신의 머릿속을 미친 듯이 헤집기 시작했다. 하지만 뇌의 기억 저장소는 가혹하리만큼 고요했다.

여동생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명백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여동생이 있었던가? 그녀의 이름은 무엇인가? 얼굴은 어떻게 생겼지? 나와 어떤 추억을 공유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빡빡 문지른 것처럼, 여동생과 관련된 모든 기억의 실루엣이 하얀 여백으로 변해 있었다.

방금 전 가동한 범죄 설계도의 연산 대가였다.

지훈은 텅 빈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가동한 그 설계도가, 이제는 자신이 가장 지켜야 할 존재마저 지워버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어둠 속에서, 지훈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잘게 흔들렸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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