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쾅! 경찰이다! 문 열어!"
쇠문이 비명을 지르며 안쪽으로 휘어졌다. 경강등의 붉고 푸른 불빛이 깨진 유리창 틈새로 들이쳤다. 그 파편들이 바닥에 고인 핏물 위에서 기괴하게 번쩍였다.
지훈의 머릿속에서 푸른색 홀로그램 선들이 비선형적으로 요동쳤다. 사방이 꽉 막힌 밀실. 그러나 우측 상단, 공기조화기 필터가 뜯겨 나간 자리에 차가운 외부 공기가 드나드는 좁은 틈이 있었다. 설계도가 가리키는 유일한 탈출구는 10미터 아래 가시덤불이 우거진 환기창뿐이었다.
"체포해! 저항하면 발포한다!"
문짝이 경첩 채로 뜯겨 나가는 굉음과 동시에 지훈은 망설임 없이 몸을 짓겼다. 깨진 유리 파편이 박힌 창틀을 짚고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으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이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공기를 찢었다.
쿠당탕!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온몸의 살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젖은 흙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에 왼쪽 어깨 관절이 어긋나는 둔탁한 파열음이 일었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지훈은 비명을 삼키며 진흙 바닥으로 얼굴을 처박았다.
"저기다! 아래로 떨어졌다! 조명 비춰!"
위쪽 깨진 창문 틈새로 강력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쏟아졌다. 가시덤불 사이를 헤집는 백색 광선은 마치 굶주린 맹수의 눈동자처럼 지훈의 등 뒤를 핥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 부근이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지훈은 진흙을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굳은 피와 흙모래가 섞여 들어갔다. 고통은 선명했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것은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푸른빛 궤적이었다.
*범죄 설계도 가동.*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신체 기능 37% 저하.* *최적 도주 경로: 남서쪽 15미터 지점, 우수관 입구.*
지훈은 이가 깨질 정도로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오른팔 하나에 의지해 젖은 흙바닥을 기었다. 빗물이 눈으로 흘러들어 시야가 흐려졌지만, 뇌리에 각인된 푸른색 3D 선형은 흔들리지 않고 우수관의 녹슨 쇠창살을 가리키고 있었다.
쇠창살은 이미 아래쪽 고정 장치가 부식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지훈은 온 힘을 다해 몸을 밀어 넣었다. 어깨가 조여드는 압박감과 함께 썩은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철벅.
지훈의 발끝이 배수관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진 직후, 그가 누워 있던 가시덤불 자리에 서치라이트 불빛이 정지했다.
"이쪽이다! 흔적이 있어!"
구두가 물웅덩이를 짓밟는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발소리가 가시덤불을 헤치며 다가왔다. 지훈은 좁고 어두운 배수관 내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죽였다. 빗물이 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반장님, 이쪽입니다. 수풀이 꺾여 있고 핏자국이 신선합니다."
낮고 거친 목소리. 지훈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서부경찰서 수사 1과의 베테랑이자, 자신을 가장 잘 아는 동료였던 한태성이었다.
배수관 입구 바로 위에서 구두 굽이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가 멈췄다. 한태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우수관 쇠창살 틈새로 비스듬히 들이쳤다. 그 불빛은 지훈의 젖은 앞머리 끝을 간신히 비추지 못하고 빗겨 나갔다.
지훈은 품속의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만약 태성이 라이트를 조금만 더 아래로 내린다면, 혹은 안을 들여다본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어이, 강 형사."
태성의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낮게 깔렸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혼잣말처럼 툭 던지는 어조였으나, 배수관 내부의 공명 때문에 지훈의 귀에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태성은 허리를 숙여 쇠창살 앞의 진흙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지훈이 기어 들어가며 남긴 선명한 손자국과 쓸린 흔적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도망자가 이 안으로 기 들어갔음을 알 수 있는 조잡한 흔적이었다.
태성이 손전등을 든 손을 까닥였다. 뒤따라오던 부하 형사들이 총구를 겨눈 채 다가왔다.
"반장님, 우수관 안쪽 아닙니까? 흔적이 이쪽으로..."
태성이 무심히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손전등으로 우수관 반대편, 칠흑 같은 잡목림 방향을 홱 비추었다.
"눈깔이 삐었냐? 이 피딱지는 길고양이가 쥐새끼 물고 가다 흘린 거잖아. 내 눈엔 뻔히 보여."
"예? 하지만 손자국이..."
"새끼가 말대꾸는. 저기 잡목림 쪽에 가지 꺾인 거 안 보여? 범인은 저 산비탈 쪽으로 튀었어. 기동대 애들 불러서 북쪽 진입로 차단하라고 해. 당장!"
태성의 퉁명스럽고 강압적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부하 형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수사 1과 최고 베테랑의 권위에 눌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원 북쪽 진입로로 이동한다!"
발소리들이 빠르게 멀어졌다.
지훈은 배수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거친 숨을 내뱉었다. 태성의 행동은 실수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흔적을 보았다. 보았으면서도 수사 방향을 180도 돌려버린 것이다.
'왜 나를 돕는 거지?'
머릿속의 의문은 꼬리를 물었으나, 지금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지훈은 쑤셔오는 어깨를 부여잡고 어두운 배수관 안쪽을 향해 기어 나갔다.
***
하수구를 빠져나왔을 때, 지훈이 마주한 것은 도심 외곽의 왕복 4차선 도로변이었다.
밤하늘은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장대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공기를 찌르르 울렸다. 서부경찰서가 이 일대를 완전히 포위망으로 옥죄고 있음이 분명했다.
경찰차 서너 대가 경광등을 켠 채 도로 모퉁이를 지키고 있었고, 방검복을 입은 기동대원들이 2인 1조로 인도와 골목길을 샅샅이 수색 중이었다.
탈출구는 없었다. 정면으로 나가면 가로등 불빛 아래 그대로 노출될 것이고, 뒤로 돌아가기엔 이미 퇴로가 차단되었다.
지훈은 젖은 이마를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기댔다.
'다시 써야 한다.'
그는 눈을 감았다. 뇌세포 하나하나가 타들어가는 감각과 함께, 차가운 푸른빛 격자들이 그의 시야를 다시 지배하기 시작했다.
*범죄 설계도 가동.* *주변 광원 분석: 가로등 4개, 차량 헤드라이트, 상가 간판.* *포위 요원 시야각(Angle of View) 실시간 시각화.*
지훈의 눈앞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도로를 감시하는 기동대원들의 머리 위로 붉은색 원뿔 모양의 광선들이 뻗어 나갔다. 그것은 그들이 실제로 보고 있는 시야의 범위를 나타냈다.
그 붉은 광선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감시망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광선과 광선 사이, 가로등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어두운 틈새에 푸른색의 안전 구역이 실시간으로 계산되어 나타났다.
그것은 불과 30센티미터 폭의 좁은 틈이었고, 지속 시간은 대원들이 고개를 돌리는 찰나의 몇 초에 불과했다.
"저쪽 골목 확인했어?"
한 기동대원이 무전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를 나타내는 붉은 광선이 지훈이 서 있는 벽면을 비스듬히 비껴갔다.
지금이다.
지훈은 몸을 움직였다. 소리 없이, 그러나 극도로 신속하게.
그는 첫 번째 가로등 그림자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바로 옆으로 순찰차가 서행하며 지나갔다. 헤드라이트의 강한 백색광이 지훈의 발끝을 스쳤으나, 설계도가 지시한 정확한 각도 덕분에 그의 몸체는 차량 사이드미러의 사각지대에 정확히 가려졌다.
"어이, 거기 누구 있어?"
반대편 인도에서 대원이 랜턴을 비추며 소리쳤다.
지훈은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의 타이머가 역산되고 있었다.
*3. 2. 1. 좌측 보도블록 경계선으로 이동.*
그는 젖은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해 어두운 상가 천막 아래로 몸을 숨겼다. 라이트 불빛이 그가 평소 서 있던 자리를 허무하게 훑고 지나갔다.
수십 명의 경찰과 순찰차가 촘촘히 얽혀 있는 도로였지만, 지훈은 마치 그들의 시선을 투시하는 안개처럼 그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물리적인 벽을 통과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와 시선의 빈틈을 완벽하게 해킹한 결과였다.
마침내 마지막 순찰차의 후미등이 멀어지고, 지훈은 인적이 끊긴 주택가 이면도로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통쾌함이 가슴을 쓸고 지나가기도 전에, 뇌를 관통하는 극심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아악...!"
지훈은 벽을 짚으며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이 뜨거운 기름을 부은 것처럼 끓어올랐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뇌의 깊숙한 곳, 기억을 관장하는 영역이 날카로운 메스로 도려내 지는 듯한 영혼의 통증이었다.
*경고: 범죄 설계도의 무리한 연속 연산 수행.* *대가 징수 프로세스 개시.* *무작위 기억 소멸 단계 진입.*
"안 돼... 멈춰..."
지훈은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을 굴렀다.
머릿속에서 환한 빛이 피어오르며, 어떤 풍경이 떠올랐다.
노란색 은행잎이 가득 쌓인 초등학교 운동장. 고아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구석에서 흙장난만 하던 어린 지훈에게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병을 쥐여주던 노신사가 있었다.
"지훈아, 세상이 아무리 차가워도 네 마음속의 불꽃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자신을 지켜주던 유일한 어른. 자신에게 '형사'라는 꿈을 심어주고,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던 은사님이었다.
지훈은 그의 얼굴을 붙잡으려 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의 푸른 격자들이 그 기억 위를 덮치자, 은사님의 얼굴이 마치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흐려지더니 순식간에 새하얀 여백으로 변해버렸다.
"선생님... 선생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는지,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따뜻했던 온기의 감각만이 유령처럼 가슴에 남았을 뿐, 대상은 완벽하게 소멸했다.
지훈은 허탈감과 공포에 젖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가동한 이 설계도가,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던 소중한 벽돌들을 하나씩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배후를 잡기도 전에, 자신은 껍데기만 남은 냉혹한 살인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채로, 오직 생존을 위한 본능만이 그의 사지를 움직였다.
터벅, 터벅.
인적이 완전히 끊긴 좁고 어두운 주택가 골목길. 가로등마저 깨져 있어 완벽한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지훈은 벽에 몸을 의지한 채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바로 그 순간,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그의 정수리에 닿았다.
찰칵.
어둠 속에서 격발을 준비하는 공이치기의 서늘한 마찰음이 고막을 찔렀다. 지훈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만히 있어, 강지훈 형사."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극도로 차분했다. 대상을 향한 살의나 흥분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계처럼 정제된 목소리였다.
지훈은 천천히 눈을 굴렸다. 권총을 쥔 검은 실루엣의 사내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