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이 섞인 진눈깨비가 가죽 재킷의 어깨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밤공기는 섭씨 영하 2도. 뺨을 스치는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고,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공기에서는 눅눅한 콘크리트 냄새와 녹슨 철가루 냄새가 섞여 났다.
지훈은 도심 외곽에 흉물스럽게 솟아 있는 폐쇄된 주차 타워를 올려다보았다. 사방이 어둠에 잠긴 거대한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는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 방금 우리 강력팀에서 백선우의 은밀한 보관 기지 중 하나를 찾아냈다. 놈들이 보관 기지 안의 증거물들을 통째로 소각하고 탈출하려는 모양이야.
태성의 다급한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지훈은 어깨를 가볍게 돌려보았다. 치료실에서 맞춘 왼쪽 어깨 관절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지만, 묵직한 통증이 신경을 찔러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통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훈은 주차 타워의 깨진 유리문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깨진 유리가 서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어둠 속에서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진 공기가 느껴졌다.
그가 심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범죄 설계도, 기동.’
머릿속에서 나지막한 명령어와 함께, 시야 전체가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망막 위로 푸른색 3D 홀로그램이 파도처럼 밀려와 온 세상을 뒤덮었다.
예전 같았으면 뇌가 타들어가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소중한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떨어져 나가는 상실감이 동반되었을 터였다. 소중한 이들의 얼굴, 은사의 이름, 따뜻했던 기억들이 뜯겨 나가던 그 끔찍한 대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은우의 도움으로 자아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복원해 낸 덕분일까. 뇌세포를 갉아먹던 가학적인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시릴 정도로 차갑고 명징한 청색 연산의 궤적만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기억의 손실 없이, 온전한 강지훈이라는 인간으로서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시야 오른쪽 구석에서 노이즈처럼 미세하게 깜박이는 녹색 문자가 지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User-designed 1092]
지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과거의 자신이 설계해 둔 자해형 덫의 소스 코드. 그 디버깅 태그가 가리키는 숫자 '1092'는 다름 아닌 지훈 자신의 옛 경찰 군번 조합이었다. 타인이 자신에게 주입한 저주인 줄 알았던 이 초인적인 설계 능력이, 실은 백야회라는 거대한 절대악을 무너뜨리기 위해 과거의 자신이 스스로의 뇌를 깎아 가며 구현해 낸 극한의 무기였음을 온전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열쇠였군."
지훈은 나직하게 읊조리며 권총의 노리쇠를 후퇴 고정했다가 놓았다. 쇳소리가 차가운 정적을 깨뜨렸다.
청색 홀로그램은 주차 타워 1층부터 옥상까지의 모든 물리적 공간을 실시간으로 스캔해 나갔다. 바닥에 고인 냉각수의 흐름, 콘크리트 기둥 사이의 미세한 공기 순환, 그리고 저 먼 위층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구두굽 소리까지.
"3층에 열둘. 4층에 여덟. 저격 병력들은 옥상 승강기 주변에 집중 배치되어 있군."
지훈의 눈동자가 청색 빛을 반사하며 차갑게 빛났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주차 타워 2층 슬로프 방향에서 거친 구두굽 소리와 함께 어둠을 뚫고 붉은색 레이저 조준선 서너 개가 바닥을 훑었다.
"거기 누구냐!"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어둠 속에서 방탄조끼를 착용한 백야회의 정예 부하들이 총구를 겨누며 들이닥쳤다. 그들은 지훈을 발견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당!
귀를 찢는 총성과 함께 콘크리트 기둥에 총탄이 박히며 불꽃이 튀었다. 부서진 콘크리트 파편과 먼지가 지훈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훈은 재 빠르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쇠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진동이 등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생포할 필요 없다! 백 의원님이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 쏴라!"
그들의 대화 속에서 살의가 뚝뚝 묻어났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사격에 기둥 모서리가 깎여 나가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지훈은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단 한 발의 살상용 탄환도 쓰지 않고 이 포위망을 돌파해야 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백선우가 원하는 '살인마 강지훈'의 프레임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그의 뇌가 엄청난 속도로 연산을 시작했다. 범죄 설계도가 기둥 너머의 공간을 청색 실선으로 정밀하게 그려냈다. 주차 타워 천장에 매달린 녹슨 볼록거울, 좌측 벽면에 노출된 소방 배관, 그리고 적들이 서 있는 콘크리트 바닥의 마찰 계수.
‘도탄 반사각 연산 완료.’
지훈은 호흡을 멈추고 기둥 옆으로 오른팔을 뻗었다. 그의 시선은 적들을 향하지 않았다. 오직 천장의 볼록거울과 우측의 소방 배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탕!
지훈이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천장의 볼록거울 가장자리를 정확히 때렸다. 찌그러진 거울 표면을 맞고 튕겨 나간 탄환은 다시 우측 소방 배관의 이음새를 강타했다. 두 번의 굴절을 거친 탄환은 예상치 못한 궤적으로 꺾여 들어가, 선두에 서 있던 저격수의 오른쪽 손목을 정확히 스치고 지나갔다.
"으악!"
짧은 비명과 함께 저격수가 소총을 떨어뜨렸다.
지훈은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두 번째 탄환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바닥에 고인 기름때와 벽면의 철제 앵커를 겨냥했다. 도탄된 탄환이 두 번째 저격수의 총열 조절판을 때려 부수며 불꽃을 일으켰고, 총기가 오작동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총이…! 제장, 뒤로 물러서!"
적들이 당황하며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순간, 지훈의 머릿속 설계도가 주차 타워 전체의 역학 구조를 시각화했다.
3층 슬로프에는 폐차 직전의 방치된 대형 SUV 세 대가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다. 그 차량들이 얹혀 있는 주차 상판의 하중 분산 수치가 지훈의 눈앞에 숫자로 떠올랐다.
지훈은 기둥 뒤에서 뛰쳐나가며 비상구 옆의 고정용 와이어 릴 장치를 향해 세 발을 연사했다.
탕! 탕! 탕!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굵은 쇠줄이 끊어지며 탄성을 잃고 요동쳤다. 동시에 3층 슬로프의 제동 장치가 풀리며 무거운 SUV 차량들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2층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어, 어? 차가 내려온다! 피하..."
적들이 경악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훈은 내려오는 차량들의 속도와 궤적을 실시간으로 계산하며, 슬로프 바닥에 놓인 소화전 밸브를 발로 걷어찼다. 고압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미끄러운 기름 바닥을 뒤덮었다.
수 톤에 달하는 고철 덩어리들이 물과 기름이 뒤섞인 바닥에서 미끄러지며 서로 기괴하게 맞물렸다. 퍼석하는 파쇄음과 함께 차량 세 대가 완벽한 V자 형태로 얽히며 주차 구역 입구를 통째로 가로막았다.
단 한 명의 목숨도 빼앗지 않고, 오직 차량의 물리적 하중과 중력만을 이용해 적들을 가둬버린 '소용돌이치는 강철 방어벽'이 완성된 것이다.
"이, 이 괴물 같은 새끼가...!"
차량 너머에서 적들이 울부짖으며 차체를 두드렸지만, 그 무거운 강철 장벽을 맨몸으로 뚫고 나올 방법은 없었다.
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권총을 집어넣었다. 어깨의 통증이 욱신거렸지만,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희열이 차올랐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설계한 힘이었다.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논리와 이성으로 적을 압도하는 힘.
그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주차 타워 3층 통제실로 향했다. 통제실 문을 발로 차서 열자, 백야회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서버 장치와 태블릿 PC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작동하고 있었다.
지훈은 태블릿을 집어 들고 화면을 터치했다. 화면에는 이미 체포된 민수현의 심문 영상과 백야회의 기밀 데이터들이 실시간으로 파기되고 있는 진행 표시바가 뜨고 있었다.
"민수현..."
지훈의 뇌리에 과거 심문실에서 보았던 민수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민수현은 압박을 받거나 거짓 진술을 설계할 때마다, 특유의 미세한 운동 틱 장애를 보였다. 왼쪽 손목의 은색 커프스단추를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며 낄낄대던 그 기괴한 손짓.
그 틱 장애가 발생했던 시간대의 데이터 로그를 추적하면, 그가 숨기려 했던 진짜 정보가 무엇인지 가려낼 수 있었다.
지훈은 빠르게 자판을 두드려 민수현의 거짓 진술 구간을 필터링했다. 예상대로, 그가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환자'라고 주장했던 아르카디아 요양원의 폐기 데이터들이 화면에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붉은색 글씨로 표기된 하나의 차트가 나타났다.
[아르카디아 요양원 VIP 무연고 환자 명단 - 가명: 강민우]
지훈의 숨이 멎었다. 차트 옆에 첨부된 사진 속 사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 핼쑥해진 모습이었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그의 옛 동료이자 자신을 위해 백야회에 깊숙이 침투했던 형사였다. 백선우는 강민우를 단순한 환자가 아닌, 기억 주입 및 삭감 임상 실험의 생체 실험체로 사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우 이 개새끼가..."
지훈의 이가 갈렸다.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랐지만, 그는 억지로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 감정에 휩쓸리면 백선우의 기만에 또다시 놀아나게 된다.
그는 태블릿을 조작해 아르카디아 요양원의 중앙 제어 시스템에 접속했다. 과거 자신이 심어두었던 우회 경로를 통해 요양원의 구출 관련 서류와 환자 이송 동의서를 강제로 변경했다. 강민우의 신변 보호 및 환자 인계 대상을 백야회 전담 병원이 아닌, '서울 서부경찰서 수사 1과 한태성 형사'로 정식 위탁 변경하는 작업이었다.
작업이 완료되자마자 지훈은 태성의 대포폰으로 즉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 지훈이냐! 안에서 총성이 들리던데 무사한 거냐?
"태성 형, 잘 들으십시오. 지금 아르카디아 요양원 지하에 갇혀 있는 '강민우'의 이송 동의 서류를 서부서 수사 1과로 변경해 놓았습니다. 백선우가 손을 쓰기 전에 형이 직접 가서 인계받아야 합니다."
- 강민우...? 설마 그 녀석이 살아 있었단 말이냐?
태성의 목소리가 젖어 들며 떨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백선우의 인체 실험으로 뇌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입니다. 형이 아니면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 당장 움직여 주십시오."
- ...알았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확보하마. 너는 어떻게 할 셈이냐?
지훈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콘크리트 천장을 뚫고 묵직한 진동이 발밑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주차 타워 옥상 위에서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회전하는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백선우가 도주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저는 이 판을 설계한 놈을 만나러 갑니다."
- 지훈아! 위험해! 옥상에는 저격수들이...
지훈은 전화를 끊고 대포폰을 바닥에 던져 뭉개버렸다.
통제실을 나온 그의 눈에 멈춰 서 있는 엘리베이터가 들어왔다. 적들이 도주를 위해 전원을 차단해 버린 상태였다.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훈은 엘리베이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깨의 통증을 무시한 채, 양손으로 엘리베이터 틈새를 잡고 온 힘을 다해 양옆으로 벌렸다.
끼이이이익-!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고, 그 너머로 칠흑 같은 수직 승강기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십 미터 아래의 어두운 바닥이 보였고, 위쪽으로는 옥상까지 뻗어 있는 굵은 강철 와이어 세 줄이 보였다.
두두두두두!
헬기의 엔진 소리가 더욱 거칠어지며 이륙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지훈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차가운 강철 와이어를 움켜쥐었다. 쇠사슬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끝을 내자, 백선우."
지훈은 다리에 힘을 주어 벽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강철 와이어를 움켜쥔 손에 엄청난 마찰열이 발생하며 가죽 장갑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그는 사상 최고 속도로, 어둠을 뚫고 옥상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