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가죽 장갑과 강철 와이어가 마찰하며 자아내는 매캐한 비린내가 좁고 수직으로 뻗은 승강기 통로를 가득 채웠다. 초당 수 미터의 속도로 어둠을 거슬러 오르는 지훈의 신형 가죽 장갑에서 가느다랗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머리 위 먼 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백색 광원망이 칠흑 같은 통로 안의 먼지 입자들을 서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주차 타워 옥상을 뒤흔드는 대형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한 진동으로 철골 구조물을 타고 지훈의 구두끝까지 전해졌다. 왼쪽 어깨 관절에서 뻐근하게 시작된 통증이 쇄골을 지나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왔지만, 지훈은 손아귀에 들어간 힘을 늦추지 않았다. 지금 손을 놓치면 수십 미터 아래의 콘크리트 바닥이 그의 육신을 부수어 놓을 것이 자명했다.

우웅, 하는 이명과 함께 지훈의 망막 위로 푸른색 광학 선들이 얽혀들며 ‘범죄 설계도’가 구동되었다.

이제는 뇌를 태우는 극심한 통증도, 소중한 기억을 갉아먹는 자해적인 대가도 없었다. 서은우의 인지 제어 치료를 거치며 완벽하게 디버깅된 청색 연산의 궤적은 지훈의 의지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간의 물리적 수치들을 계측해 냈다.

파랗게 점멸하는 홀로그램 인터페이스의 우측 하단 구석. 그곳에는 언제나 노이즈처럼 깜박이던 작은 식별자 코드가 있었다.

[User-designed 1092]

매번 시야를 방해하던 녹색 디버깅 태그의 정체를, 지훈은 비로소 완전히 납득했다. 1092. 그것은 지훈이 처음 경찰 제복을 입었을 때 부여받았던 옛 군번의 조합이었다. 백야회가 그의 머릿속에 심어놓은 잔인한 주술이자 저주인 줄로만 알았던 이 가공할 연산 능력은, 실은 3년 전 백야회의 거대한 실체를 목격한 강지훈 본인이 스스로를 사지로 밀어 넣으며 설계해 둔 유일한 역전의 열쇠였다.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절대악의 덫에 자진해 걸어 들어가면서도, 진실을 밝혀낼 최후의 무기만큼은 제 뇌의 가장 깊은 심연에 코딩해 두었던 것이다.

“내가 만든 덫이었어.”

지훈이 가느다랗게 입술을 읊조렸다. 서늘한 자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스로가 괴물이 아니라는 확신, 그리고 이 장치적인 굴레가 결국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짜 올린 정밀한 시나리오였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 박동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바로 그 순간, 머리 위 15미터 상공에서 둔탁한 금속 마찰음이 통로를 울렸다.

철컥-!

지훈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위를 향했다. 어스름한 백색광 사이로 검은 그림자 세 개가 승강기 통로 벽면에 고정된 철제 사다리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백선우가 배치한 최종 마크용 사설 암살팀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소음기가 장착된 서브머신건이 들려 있었고, 가차 없이 총구가 아래를 향해 불을 뿜었다.

퓻! 퓻! 퓻!

강철 와이어에 부딪힌 탄환들이 불꽃을 튀기며 지훈의 뺨 스치고 지나갔다. 뺨 위로 얇은 붉은 선이 그어지며 뜨거운 핏방울이 어둠 속으로 낙하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피비린내가 확산되었다.

지훈은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으로 연산 경로를 띄웠다.

[적 피아 식별: 사설 경비 인원 3명.] [무장 상태: 9mm 소음 기관단총.] [지리적 여건: 수직 낙하 통로, 디딤돌 없음, 지훈의 왼쪽 어깨 가동 범위 63% 제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가장 위에 있던 암살자가 와이어를 잡고 미끄러져 내려와 지훈의 머리통을 향해 전투용 나이프를 내질렀다. 서늘한 칼날이 어둠을 가르며 지훈의 눈앞까지 육박했다.

지훈은 오른손으로 와이어를 움켜쥔 채, 몸을 뒤틀어 칼끝을 피했다. 동시에 왼발로 벽면의 돌출된 철골을 강하게 걷어차며 반동을 이용해 암살자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쿵!

“윽!”

좁은 공간에서 육중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암살자의 몸이 흔들리는 찰나, 지훈의 눈에 상대의 왼쪽 손목이 들어왔다. 그 순간, 지훈의 머릿속에 묻혀 있던 과거의 기억 조각이 선명한 파편이 되어 뇌리를 스쳤다.

과거, 백야회의 2인자 자리를 노리던 민수현을 밀실 심문실에서 몰아붙이던 기억이었다. 민수현은 극한의 압박을 받거나 새로운 거짓 진술을 머릿속으로 설계할 때마다, 유독 왼쪽 손목의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는 미세한 운동 틱 장애를 보였다. 지훈은 과거에 그 사소한 버릇을 파고들어 민수현의 심리적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수많은 알리바이를 깨부수었었다.

‘모든 인간은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자신만의 기계적인 습관으로 도피한다.’

눈앞의 저 전문 암살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격이 빗나가자 놈의 왼손이 반사적으로 전술 벨트의 오른쪽 버클을 만지려 했다. 무기를 바꾸려는 무의식적인 기계적 흐름이었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설계도가 제시한 최적의 타격 관절 범위로 손을 뻗었다.

파랗게 빛나는 타격 점이 암살자의 왼쪽 팔꿈치 안쪽과 쇄골 하단에 겹쳐졌다. 지훈의 오른 주먹이 주저 없이 그 좌표를 관통했다.

빡!

“아악!”

관절이 어긋나는 비명과 함께 암살자의 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져 내렸다. 지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전술 조끼에 연결된 와이어 슬링 데이지 체인을 낚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주 와이어의 반동을 더해, 놈을 승강기 통로 한쪽에 수직으로 길게 늘어진 예비 강철 와이어 슬링에 힘껏 던져 넣었다.

스르륵, 서걱!

수 미터의 와이어가 뱀처럼 꼬이며 암살자의 목과 팔다리를 기괴하게 휘감았다. 몸무게의 중력으로 인해 와이어가 조여들자, 놈은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질식 상태에 빠졌다. 동료의 기괴한 무력화를 본 나머지 두 명의 암살자가 당황하여 사격을 멈추고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지훈에게는 그들을 상대하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머리 위 엘리베이터 케이지의 하부 바닥이 불과 5미터 위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옥상 통제실에서 누군가 엘리베이터의 수동 하강 레버를 당긴 듯, 엄청난 기계음과 함께 수 톤 무게의 엘리베이터 케이지가 지훈을 향해 무서운 가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초당 3미터. 그리고 중력가속도가 더해져 낙하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엘리베이터 케이지와 벽면 사이에 끼어 온몸의 뼈가 가루가 될 판이었다.

[경고: 충돌까지 남은 시간 1.8초.] [대안 탐색 중...]

지훈의 시야에 모든 물리적 수치들이 홀로그램으로 정렬되었다.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천장의 대형 도르래 휠, 그리고 그 휠을 감싸고 있는 비상용 수동 제동 기어 와이어.

“미친 짓이군.”

지훈은 차갑게 중얼거리며 허리춤에서 서부서 압수물 창고에서 챙겨왔던 전술용 고강도 카라비너 고리를 꺼냈다.

그는 몸을 날렸다. 추락하는 엘리베이터 케이지의 철제 프레임을 왼발로 딛고 도약함과 동시에, 천장 도르래로 연결되는 고속 회전축에 카라비너를 정확히 걸어 잠갔다.

팅-! 끼이이이이이익-!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며 고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급제동 같은 고막을 찢는 비명이 통로를 가득 메웠다. 카라비너의 강철 고리가 제동 휠의 톱니 사이에 끼어들며 불꽃의 폭포를 만들어냈다. 지훈의 왼쪽 어깨에 다시 한번 찢어지는 듯한 충격이 가해졌고, 턱밑까지 신물이 올라왔다.

하지만 제동 기어에 걸린 마찰력은 엘리베이터의 낙하 속도를 강제로 감소시켰다. 초당 3미터로 떨어지던 케이지가 순간적으로 덜컥거리며 제자리에 멈춰 서는 반동의 순간, 지훈은 제동 고리의 장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몸을 튕겨 올렸다.

완벽한 응용 물리학의 승리였다. 지훈은 엘리베이터 케이지 상단의 비상 탈출 해치를 양손으로 짚고 가볍게 안으로 착지했다. 해치 철판을 부수고 내부로 미끄러져 들어간 지훈은 곧바로 승강기 문을 발로 차 열어젖히며 옥상 바로 아래층의 계단 통로로 몸을 던졌다.

쿵!

지훈은 먼지투성이가 된 바닥을 구르며 통증이 몰려오는 왼쪽 어께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뺨에 닿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귀에 꽂혀 있던 서은우의 미세 통신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훈 씨! 제 목소리 들려요? 당장 움직여야 해요!

서은우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분함을 잃고 극도로 가빠져 있었다. 지훈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마른침을 삼켰다.

“말해, 은우 씨.”

- 백선우가 탄 헬기... 엔진 시동이 완전히 걸렸어요. 이미 이륙 대기 상태에 들어섰고, 요양원 외곽의 사설 경비원들이 옥상 진입로를 폐쇄하고 있어요. 시간이 없어요. 3분 뒤면 헬기가 이륙해요!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뇌 속의 푸른 설계도는 이미 이 건물 전체의 도면을 지나 옥상 헬기장의 바람 방향과 기온, 그리고 저격수들의 예상 배치 구역까지 실시간으로 계산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설계도의 중심부에는, 또 다른 진실의 조각이 서늘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르카디아 요양원 VIP 명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무연고 치매 환자 ‘강민우’의 차트 정보.

그것은 단순한 익명의 관리가 아니었다. 지훈이 과거 백야회를 추적할 때, 그의 등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가장 신뢰하는 동료이자 형사 민우였다. 백선우는 민우를 납치해 이곳 지하 실험실에서 인간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우고 주입하는 끔찍한 생체 실험의 첫 번째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동료의 영혼을 난도질하고 치매 환자로 위장해 평생을 가두어 둔 채 즐거워했을 백선우의 기괴한 미소가 떠오르자, 지훈의 심장 내부에서 억눌려 있던 분노 조절 장애의 파편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주먹을 쥔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태성 형이 민우를 인계받으러 가고 있어.”

지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예, 한 형사님 팀이 방금 지하 주차장 진입로를 확보했다는 신호를 보냈어요. 하지만 지훈 씨, 백선우를 놓치면 강민우 형사의 억울함을 풀 법적 증거도 같이 날아가요. 백선우의 태블릿과 개인 서버에 모든 임상 실험 데이터와 백야회 자금 세박 설계도가 들어있어요. 반드시 옥상에서 그놈을 막아야 해요!

“막는 게 아니야.”

지훈은 계단을 딛고 올라서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구두 굽이 콘크리트 계단을 디딜 때마다 서늘한 파열음이 울렸다.

“그놈이 만든 지옥의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가 단죄하는 거다.”

지훈이 계단 끝에 다다르자, 옥상으로 통하는 두꺼운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문틈 사이로 헬기 로터가 만들어내는 가공할 바람 소리와 엔진의 굉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소음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포효 같았다.

지훈은 문고리를 잡았다. 그의 망막 위에 투영된 푸른색 설계도가 철문의 잠금장치 내부 핀들의 배열을 순식간에 분석해 냈다.

철컥, 철컥, 탁!

주도권을 완전히 쥔 지훈의 손끝에서 자물쇠가 허무하게 풀려나갔다.

지훈은 온 힘을 다해 철문을 밀어젖혔다.

쾅-!

차갑고 거센 밤바람이 지훈의 코트 자락과 이마를 덮친 머리칼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옥상. 하지만 그곳은 헬기장 주변에 설치된 수십 개의 서치라이트로 인해 기괴할 정도로 밝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명암의 대비가 극명한 공간 속에서, 대형 사설 헬기 AW139의 거대한 프로펠러가 광풍을 일으키며 회전하고 있었다.

이미 헬기의 착륙용 스키드는 콘크리트 바닥에서 약 1미터가량 떠오른 상태였다. 기체는 서서히 우측으로 기울며 밤하늘의 어둠 속으로 기수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체의 투명한 캐빈 창 너머.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백선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소음 속에서도 우아하게 차 잔을 들고 있는 듯한 자세로, 창밖의 지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훈의 시선과 백선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충돌했다.

백선우의 눈 밑에 특유의 기괴한 보조개가 패어 들어갔다. 그는 지훈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 치의 당황도 없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리드미컬하게 창유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마치 지훈의 분노에 찬 심장 박동에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이윽고 백선우는 조소 가득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올려, 지훈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보였다.

그것은 완벽한 탈출을 확신하는 자의 오만이자, 자신을 쫓아온 사냥개를 향한 조롱이었다.

기체가 공중으로 무서운 속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지훈과 헬기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10미터 이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도주는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지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아직 내 설계는 끝나지 않았어, 백선우.”

지훈은 옥상 바닥에 뒹굴고 있던 사설 경비원의 무거운 강철 무선 송수신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청색 궤적이, 이륙하는 헬기의 후방 로터 테일 블레이드의 고속 회전 반경과 정확한 충돌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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